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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에 오랜만에 일곱자리 숫자가 찍혔다. 월급이 들어왔다. 고2 아들, 중3, 초3 딸에게 '옜다, 용돈'이라는 문구와 함께 용돈을 보냈다. 이럴 땐 빛의 속도로 답장이 온다. '엄마 사랑해요. 하트 뿅뿅'. 일 할 맛 난다. 나머지 돈은 쓰임이 정해져 있기에 통장 속의 돈은 그저 숫자에 불과해 보인다. 그중에 내가 점심을 사먹는 대신 나를 위해 쓰기로 한 16만 원을 제외하고는.

내가 나에게 "넌 뭘 좋아하니?"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 건 작년 6월이었다. 점심시간에 점심을 먹지 않고 산책을 하면서 남는 돈 16만 원을 나를 위해 써보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뭘 해야할지 몰랐다.

옷을 사거나 화장품을 사거나 그런거 말고 평소에 하지 못했던 일이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날, 지하철역 광고판에서 박효신이 출연하는 뮤지컬 <웃는 남자> 광고를 보게 됐다. 오래 전부터 '눈의 꽃'이라는 노래를 좋아했지만 그 가수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다른 노래들을 들어보고 너무 좋아서 그의 팬이 되었다.

그래, 뮤지컬 티켓을 사자! 검색을 해보니 내가 원한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미 1, 2차 티켓 판매가 오픈된 시점이었고 박효신이 나오는 회차는 전석 매진이었다. 다행인 건 아직 3차 티켓 판매가 남았고, 불행인 건 내가 그리 손이 빠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냥 포기할 수는 없지. 피켓팅 전쟁에 뛰어들어 보자!

6월 28일 오후 2시, 뮤지컬 웃는 남자 3차 티켓 오픈. 혼자서는 자신이 없어 남편, 언니, 친구, 직장 동료에게 부탁을 했다. 중요한 시험을 앞 둔 사람처럼 떨렸다. 드디어 2시 땡! 한참의 대기 끝에 내 차례가 됐으나 너무 긴장을 한 나머지 날짜 선택을 안 하고 예매하기를 클릭하고 말았다.

다시 만 명 이상의 대기 순번 로딩 지옥에 걸려 버렸다. 남편과 친구는 티켓 사이트에 진입조차 하지 못했고 언니는 박효신이 아닌 다른 배우를 예약해 실패했지만, 다행히 직장동료가 2층 A석 구석자리를 티케팅 했다.

"와~ 너무너무 고마워요. 내가 밥 살게!"

무슨 시험에 통과했거나 대회에서 일 등이라도 한 것처럼 행복한 순간이었다. 좋은 자리를 사지 못했지만 대신 두 장을 살 수 있었다. 7월의 마지막 날, 뮤지컬 <웃는 남자>를 보기 위해 언니와 함께 광화문에 갔다. 스테이크와 파스타를 파는 근사한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광화문 거리를 걸어 세종문화회관에 들어갔다. 세종문화회관 안에 들어와 본 건 처음이었다. 너무 넓고 높아서, 2층에서는 무대가 아득했다. 게다가 내 앞에 키가 큰 남자분이 앉아 무대 중앙을 떡하니 가리고 있었다. 1부 85분의 시간 동안 집중이 잘 되지 않았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휴식시간에 잠깐 바람을 쐬러 밖에 나가 생각했다.

'내가 간절히 원했던 순간인데 왜 이렇지? 난 지금 장애물에 신경쓰면서 이 순간을 망치고 있어. 지금 효신님이 나를 위해 노래하고 있다고!'

2부가 시작되고, 나는 보이지 않는 걸 보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소리에 집중했다. 집중하기 시작하자 비로소 즐길 수 있었다. 음원으로 들었던 깔끔한 음색이 아닌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만이 들을 수 있었던 소리들.

내가 좋아하는 넘버 끝 고음에서 박효신의 음성이 조금 갈라져서 컨디션이 안 좋은가 싶었는데, 바로 이어지는 넘버에서 소름 끼칠 정도의 길고 맑은 소리를 들려줬다. 역시~ 최고의 뮤지션 인정~!!
 
티켓만 봐도 배부른 느낌
▲ 일 년 동안 본 공연 티켓 티켓만 봐도 배부른 느낌
ⓒ 윤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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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남자> 공연을 본 지 1년이 지난 지금, 그때를 떠올릴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게 그 부분이다. 음성이 갈라져 살짝 주춤한 듯했지만 그걸 딛고 확 올라가 버리는 그의 경이로운 모습이 내 기억에 아름답게 남아있다.

이 뮤지컬을 보고 나서 생각났다. 내가 뮤지컬을 좋아했었다는 게. 고등학교때 학교 단체 관람으로 뮤지컬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남경주 배우가 돈키호테로 출연하는 <맨 오브 라만차>였다. 난 그때 뮤지컬의 매력에 빠졌고, 결혼하기 전까지 몇 편의 뮤지컬을 보러 다녔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는 뮤지컬을 취미로 즐기기에는 티켓 가격이 너무나 비싸 마음을 아예 접고 지냈다.

지난 일 년 간, 웃는 남자를 시작으로 박효신이 출연하는 뮤지컬 <베토벤>을 두 번이나 관람했다. 그리고 다른 뮤지컬 배우들한테도 관심이 생겼다. 홍광호 배우가 출연하는 <물랑루즈>를 보았고, 최근에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을 보고 양희준 배우의 매력에 빠지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다룬 <영웅>에 감동받았고, 대학로에서 <빨래>를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다음 주에는 조승우 배우가 출연하는 <오페라의 유령>을 보러갈 생각에 벌써부터 설렌다.

대부분의 공연은 언니와 함께 보러 다녔다. 티켓을 구하기 힘든 공연은 나 혼자 보기도 했다. 남편과 함께 뮤지컬 한 편과 이문세 콘서트를 보러 갔었는데 남편은 뮤지컬이 본인 취향이 아니라며 앞으로는 콘서트만 함께 가겠다고 했다. 9월에 열리는 이승철 콘서트를 예약해 두었다. 공연을 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고 언니, 남편과 추억을 만드는 것도 행복하다.  

걷는 게 좋아 점심밥을 먹는 대신 산책을 했다. 한 달 점심값 20만 원 중 4만 원은 기부하고, 남은 16만 원으로 나를 위해 선물한 많은 공연들. 일 년 동안 뮤지컬 뿐 아니라 연극, 콘서트, 전시회 등 다양한 문화 생활을 즐겼다. 티켓을 보고 있으면 밥 안 먹어도 배 부른 느낌이다. 늘 세 아이가 우선이었던 나는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뮤지컬을 즐기며 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창작의 날씨에도 게재합니다.


태그:#뮤지컬, #공연티켓, #취미생활, #점심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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