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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늦은 봄, 계단이 무수히 많은 한양도성을 걸었다. 계단과 씨름 아닌 씨름을 하며 힘들고 즐겁고 감사하는 감정 모두를 맛보았다. 인생살이처럼.
 지난 늦은 봄, 계단이 무수히 많은 한양도성을 걸었다. 계단과 씨름 아닌 씨름을 하며 힘들고 즐겁고 감사하는 감정 모두를 맛보았다. 인생살이처럼.
ⓒ 정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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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게 만만치 않다. 은퇴하면 시간 여유가 많아 모든 게 좋을 줄 알았는데, 당장 몸부터 따라주지 않는다. 수년 전부터 시작된 피부 알러지가 올여름 유독 나를 괴롭힌다. 여름만 아니면 보습으로 그럭저럭 관리가 되는 상태여서 병원에 가지 않고 버티고 있다.

지난주엔 난데없이 멀쩡하던 무릎마저 걱정 하나를 더했다. 사나흘 남짓 시큰거리더니 다행히 괜찮아졌다. 안도하는 마음도 한순간, 이번에는 잇몸이 나를 괴롭힐 조짐이다. 이미 두 개의 인플란트를 장착하고 있는데 이래저래 심란하다.

남들에게는 사소하게 보이겠지만 내 손톱 밑의 가시가 가장 고통스러운 법인데 어쩌겠는가. 고통을 먹고 자라는 게 인생이겠지만 아프지 않은 날을 고마워해야 하는 처지인가 싶어 우울해진다.

20년이라는 시간

한국인의 평균 기대수명으로 보면 내 남은 삶은 20년 남짓이다. 고통스럽고 덧없게 느껴지는 인생, 그래도 살만한 가치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이제 은퇴해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은 나로서는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는 것일까?

<고민하는 힘>의 저자 강상중은 자신의 또 다른 책 <살아야 하는 이유>(사계절, 2012)에서 정신의학자 빅토르 에밀 프랑클의 말에 기대어 '인생이란 인생 쪽에서 걸어오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치의 유대인수용소에서 참혹한 경험을 한 프랑클은 삶의 주체인 인간이 지닌 진정한 가치를 세 가지로 분류했다고 한다. 뭔가를 만들어내는 '창조', 창조하지 못하면 체험하여 만들어내는 '경험',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고 체험하는 것도 아닌 그저 마음속으로 빌고 생각하는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프랑클은 이 셋 중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태도'를 가장 중시했다고 한다. 강상중도 프랑클과 의견을 같이한다. '태도'는 단순히 상황에 반응하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인생이 던지는 물음에 하나하나 답하려는 결단의 마음가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본 세 가지 가치에 대응시켜 생각해보면, 자신이 세계에 대해 요구해 가는 것이 '창조'이고 자신을 넘어선 세계로부터의 요구에 대해 책임을 갖고 답해 가는 것이 '태도'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태도'를 단순히 수동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세계를 자신의 힘이 미치지 않는 '초의미'의 존재로 인식하면서, 게다가 그 안에서 자신에게 요구되는 역할에 대해 하나하나 책임을 갖고 결단해 나가는 것입니다."(책 <살아야 하는 이유> 186~187쪽)

결국 '태도'는 인생이 걸어오는 물음에 응답하게 하고 나아가 실천까지 하게 만드는 원동력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모호한 내 마음을 아는지 강상중은 프랑클과 어느 말기 암 환자 사이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통해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쉽고 명확하게 설명한다.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환자는, 회진 때 의사가 죽기 몇 시간 전에 통증을 완화해 주는 모르핀을 주사하도록 지시한 사실을 알고 그날 밤 죽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그 환자는 프랑클에게 "지금 그 주사를 놓아 주세요. 그러면 선생님은 저 때문에 밤중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니까요"하고 말했습니다. 프랑클은 이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비할데 없이 인간다운 업적"이라고 칭송했습니다." (책 <살아야 하는 이유> 176쪽)

고통과 감사함

그의 말대로 곰곰이 생각해보니 피부 알러지가 견딜만하다 싶다. 아니 감사한 마음조차 살짝 든다. 병원에 가지 않고 나름 잘 버티고 있고 곧 여름이 끝날 터이니 희망도 보인다.

지나간 내 인생을 곱씹어보면 고통스러운 것이 많았다. 하지만 자식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줬고, 아내가 생명을 염려할 정도로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잘 극복하여 내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다. 이제는 글을 쓰는 여유까지 부리고 있으니 감사한 마음이 절로 나온다.

그러고 보니 주어진 삶에 왜 감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알 것 같다. 철학자 전시륜이 인생을 왜 공짜 유람선 여행이라 했는지도 수긍이 간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났지만 전(全) 우주에서 오직 하나뿐인 나에게, 단 한 번 거저 주어진 인생은 절대적으로 소중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유람선 여행은 참 재미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우리는 새 승객을 위해서 하선해야 한다. 약속된 일정이 끝났기 때문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유람이었던가! 우리는 유람의 기회를 얻은 걸 고마워하면서 후회 없이 하선을 한다. 이 유람에서 제일 고맙고 아름다운 일은 그 누군가 나에게 공짜표를 거저 선사해주었다는 데 있다. 이것이 인생이 아닐까? 제발 유람을 즐기십시오." (전시륜 지음, <어느 무명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 행복한 마음, 2015, 30쪽)

일깨워준 강상중, 프랑클 그리고 전시륜이 그저 고맙다. 삶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존경스럽다. 돌이켜보니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내 인생이 공짜로 주어진 데다 소소한 재미도 있고, 견뎌내는 내 삶의 대견한 몸짓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러니 삶을 즐기지 않을 이유가 없고 감사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태그:#인생살이, #강상중, #전시륜, #빅토르 에밀 프랑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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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와 산책을 좋아하며, 세상은 더디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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