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그룹 '육아삼쩜영'은 웹3.0에서 착안한 것으로, 아이들을 미래에도 지속가능한 가치로 길러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서울, 부산, 제주, 미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보호자 다섯 명이 함께 육아 이야기를 씁니다. [편집자말]
초등학교 2학년인 첫째는 승부욕이 남다르다. 이기고자 하는 욕구가 너무 강해 어릴 적부터 함께 게임을 할 때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아이의 기질을 바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기질을 바꾸려면 아이의 생각을 바꿔야 하고 나아가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하루아침에 바뀔 리 만무하다. 부모로서 할 수 있는 거라곤 반복해서 이야기해주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이, 종종 너무나 막막하다.

모든 사람에게는 장점과 단점이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배울 점이 있다. 함부로 친구를 무시하거나 깎아내리면 안 된다. 욕설을 하는 건 강해 보이는 게 아니라 나빠 보일 뿐이다. 뛰어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게 더 어렵고 가치 있는 일이다.

수없이 말하지만,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들과 실제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속속들이 알기란 어렵다. 아이의 말이나 아이 친구들의 말, 선생님의 이야기 등 파편들을 모아 추측할 뿐이다.

긴장되는 상담 시간
 
ⓒ elements.envato

관련사진보기

 
2학기 학교 상담을 앞두고 긴장이 됐다.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나는 또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아이와 관련해 선생님에게 첫 상담을 받은 건 네 살 때 다닌 어린이집에서였다. 그 자리에서 나는 펑펑 눈물을 쏟았다. 선생님은 아이가 사회성이 너무 떨어진다며 엄마인 나의 육아방식을 탓했다. 

첫째였고, 첫 상담이었고, 나름 육아관이 서있다 생각했는데도, 그 말을 들으니 모든 게 나의 탓인 것만 같았다.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다 나왔다. 이후 곰곰 생각해 보니 의문이 하나씩 생기기 시작했다. 

네 살 아이가 사회성이 있는 게 신기한 일이 아닐까. 어른인 나도 사회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쉽지 않은데. 어린이집을 다니는 이유가 바로 그 사회성을 기르기 위함이 아닌가. 사회성이 꼭 좋아야만 할까. 사회성이 좋은 사람도 있고, 좋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게 아닐까. 그건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게 아닐까. 

여러 의문을 품은 뒤에야 나는 다시 나의 육아관을 세울 수 있었다. 사람마다 기질이 다르니 모두가 사회성이 꼭 좋아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이는 사회를 벗어나 살 수 없으니, 적당한 사회성을 기르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 시절 나는 선생님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거나 협력하지 못했다. 모든 게 서툰 초보 엄마였다. 몇 년 동안 정기적으로 상담을 하면서 나도 조금씩 자랐다. 수용할 건 하고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면서, 감정보다는 이성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그런데도 상담은 여전히 긴장되는 일이다. 게다가 상담 일주일 전, 아이가 한 친구와 놀이를 하다 크게 다퉈 돌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까지 받은 상태였다.

상담 날 담임 선생님은 역시나 아이의 지나친 승부욕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언급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놀이를 하려고 고집을 부리다 친구들과 다툼이 벌어지는 것에 대해서도. 

선생님은 1학기 때보다 훨씬 더 아이의 기질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 설명해야 아이를 설득할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한창 욕을 배우고 사용하기 시작하는 나이라 그 부분에 대해서도 학교와 가정에서 함께 지도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눴다.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야기해주고 격려한다면 아이는 조금씩 달라질 거라고.

'함께' 아이를 키우는 학교와 가정

대화를 나누다 보니 '함께'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선생님은 학교에서, 보호자인 나는 가정에서, 한 아이의 성장을 돕고 있구나. 나는 내 아이만 돌보면 되지만, 선생님은 매년 이렇게 많은 학생들의 기질과 성격, 환경 등을 파악하고, 한 명 한 명에게 맞는 방법을 고심하면서 지내겠구나. 그러면서도 반 전체 학생들이 큰 문제 없이 어우러질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게 선생님이라는 무거운 자리구나.

상담을 하고 돌아와 아이와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는 친구들과의 반복되는 다툼으로 억울함이 쌓여 있었다. 친구들이 자신만 차별대우 한다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선생님께 들은 대로 말해주었다. 아이들은 너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너가 그 상황에 보여준 말과 행동을 싫어한 거라고. 너가 좀 더 유연하고 부드러운 말과 행동을 보이면, 친구들도 달라질 거라고. 함께 노력해 보자고.  

아이의 강한 기질을 마주할 때면, 온몸에 힘이 쭉 빠지곤 한다. 뾰족한 아이는 앞으로 얼마나 더 부딪히고 부딪히며 살아가야 할까. 부모로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어디까지이고, 어디에서부터는 아이 혼자 헤쳐나가야 할까. 

과연 돕는다고 바뀔 수 있을까. 무엇을 바꿔야 하고, 무엇을 지녀야 할까. 유전자는 얼마나 강력한 것이며, 그걸 뛰어넘어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우면서도 대단한 일인가. 긴 한숨 속에 끝없는 생각이 이어진다.

포기할 수 없는 아이, 결국은 믿음

생각 끝에 도출한 결론은 하나다.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면 안 된다. 나는 아이의 엄마니까. 아이는 아이의 선택이 아니라, 나의 선택으로 삶을 부여받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를 끝까지 사랑하고 보듬으며,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걸. 결국 바꾸는 건 아이 자신의 몫이겠지만, 나는 지치지 않고 아이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그게 아이를 낳은 나의 책임이다. 

그 외롭고 지난한 여정을 함께 할 수 있는 선생님이 있어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그 소중한 사람들이 연이어 목숨을 버리고, 뜨거운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현실이 떠올라 가슴이 무너졌다. 

나부터 선생님을 믿겠다고 다짐한다. 내 아이의 개별성을 인정하면서도 한 교실에서 평화롭게 다른 아이들과 공존할 수 있도록, 나는 내 역할을 다하겠다고. 

결국 믿음이 열쇠인지도 모르겠다. 교육의 3주체인 선생님, 학생, 보호자가 서로를 믿는 것. 보호자는 선생님을 믿고, 선생님과 보호자는 아이의 성장 가능성을 믿고, 아이는 그런 보호자와 선생님을 믿는 것. 

믿음은 존중을 낳고 존중은 사랑을 키워나갈 것이다. 그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아이들도 자라고 어른들도 함께 성장하는 게 아닐까. 막막함을 내려놓고 다시 힘을 내어 걸어간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 게재됩니다.


지속가능한 가치로 아이들을 길러야 한다는 의미를 담아 육아 이야기를 씁니다.
태그:#학교, #교실, #믿음, #교육3주체, #상담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쓰는 사람. 『아직도 글쓰기를 망설이는 당신에게』를 펴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