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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날 그날까지④] 70년만 찾은 형의 유품, 동생은 찾아가지 않기로 했다(https://omn.kr/25sel)에서 이어집니다.
 
정태인 선생 각하 통지서
 정태인 선생 각하 통지서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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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화위)에서 고 정태인 선생에 대한 결정문 각하 통보가 왔다.

각하 통보 이유를 알아보니, 정태인 선생의 가족은 진화위 1기 때 신청하여 결정통지서를 받았다. 통지서를 받을 시 민사소송을 해야 하는데 소송에서 승소할 가능성이 낮고 형의 죽음을 배상받는 것 자체가 싫어 고민 끝에 민사소송을 진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1기 때 결정문 받고 3년 이내 소송 하지 않으면 2기 때 재신청을 해도 각하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게 정부의 방침이라고 진화위는 설명했다. '손해배상청구권 3년 공소 시효 소멸'을 적용한 것이다.
  
세계사적으로 국가 공권력에 의한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학살범죄)'는 장기소멸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부는 3년 공소 시효를 적용했다.

결국 고 정태인 선생의 유족은 배상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73년을 기다려서도 끝내 원하는 배·보상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막냇동생인 정상중 어르신은 "배상 안 받아도 된다"며 안타까워하는 필자를 위로했다.

남은 가족의 상흔
 
 
정상중 어르신은 통화할 때마다 "그 상흔을 어찌 말로 다 할 수가 있겠어요"라고 말한 후 한숨을 쉰다. 긴 이야기지만 독자 여러분과 함께 들어보고자 한다. 

"큰형이 학살되고 둘째 형은 큰형의 좌익활동 기록으로 경찰한테 온갖 수모를 겪었어요. 한국이 싫다며 미국으로 떠나서 오지 않아요. 누나 둘은 시집 가기가 쉽지 않았어요. 부모님은 '큰누나를 경찰한테 시집 보내면 고통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편이 좌익활동을 한 여자와 결혼했다는 소문에 경찰 생활이 어려워지자 이혼했어요.

저희는 진양호 수몰 지역 마을 이주 문제 당시 전답과 양조장
등을 보상받아 부산으로 갔어요. 본가는 언덕 높은 곳에 있어 팔지 않았고, 대신 어머니가 부산과 진주를 오가며 살았어요. 그런데 큰 문제가 생겼죠. 진주 보상금을 큰누나가 친구한테 빌려줬는데 사기를 당했어요. 온 가족이 무일푼 신세로 더욱 고난의 세월을 보냈어요.
 
외가도 쑥대밭이 되어버렸어요. 외삼촌(김석대)이 육군 대위로 근무했는데 맡고 있던 중대원들을 데리고 월북하다가 잡혀서 다리에 총을 맞고 형무소에서 25년간 감옥살이를 했어요. 노후에는 순댓국 장사를 해 돈을 잘 벌었어요.

또 다른 외삼촌(김석종)은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당시 경찰서장 자리도 거절할 정도로 똑똑하셨나 봐요. 속으로 '왜 서장 자리를 거절하지'라고 생각했어요. 국회의원 출마까지 할 정도의 능력과 실력이 뛰어난 분이었다고 해요.

안타깝게도 외가에서 도움받은 기억은 없어요.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 오면서 거의 연락이 두절됐어요. 2000년 초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석종 삼촌의 아들(외사촌형)이 서울대를 졸업하고 포항제철 이사로 근무하며 잘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어요.

그래서 외사촌 형한테 '형 아버지가 우리 형과 누나들 세뇌해 집안 망하게 했던 거 알고 있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이제 지난 일이니 다 잊고 살자'고 하데요. 어찌나 속상한지 그게 잊자고 잊히는 겁니까? 끔찍한 수난과 상흔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어요.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도 못하고 단돈 3만 원 가지고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했어요.  모진 고생하면서 안 해본 일 없고 끼니 굶은 건 애사 일이었어요. 1982년 결혼했지만 자식들 핫도그 하나 사줄 형편이 안 될 정도로 힘들었어요. 모진 고통과 상흔을 이겨내고 83세인 지금, 광장동에서 동네 유지가 돼 잘살고 있어요."

정상중 어르신이 필자와 헤어질 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냐고 묻자 '작은 성의'라고 한다. 정중히 거절한 후 헤어진 우리는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그 후 어르신으로부터 주소를 알려달라는 연락이 왔다. '왜 그러냐'고 여쭤보니 '미역 조금 보내드리면 안 되겠냐'고 하신다. 성의를 무시하는 듯싶어 주소를 드렸더니 미역과 멸치를 보내주셨다.

정 많고 따뜻한 어르신을 뵙고 나니 그의 형인 고 정태인 선생도 어질고 넉넉하고 멋있는 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25세 나이에 꿈 한 번 펼쳐보지 못한 채 학살된 게 얼마나 억울했으면, 52년 만에 본인이 누구인지 명백하게 밝히는 도장과 젓가락, 구두칼을 품고 우리에게 왔나 싶었다. 
       
뼈에는 좌우가 없다
      
여양리 발굴 중간 보고회 때 이상길 교수는 무릎까지 구부리고 유족들에게 유해와 유품을 설명했다.
 여양리 발굴 중간 보고회 때 이상길 교수는 무릎까지 구부리고 유족들에게 유해와 유품을 설명했다.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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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길 교수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여양리 발굴 관련 연구와 민간 학살 문제를 꾸준히 제기했다.

이 교수는 '2005년 한국전쟁 55년 기획발표-한국전쟁기 경남지역 민간인 학살 문제' 학술발표대회에서 '마산 여양리 민간인 학살의 실상과 성격'이란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논문에서 보상이나 배상, 책임자 처벌보다 중요한 것은 억울한 학살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졸지에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문제는 좌우 이념을 떠나 도민의 애환이자 민원 사항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의 여양리 발굴에 대한 애정은 바로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발굴사업의 최우선 목적이 유해를 유족에게 돌려주는 것이었기에 더욱 뜻깊게 다가온다.  
   
필자는 이 교수가 논문에 남긴 글귀에 가슴이 찡했다.
 
70여 년 넘게 지나 지금 드러난 하얀 백골을 보면,
저 뼈에 좌우 이념이 있을까 싶다.
저 뼈를 가지고 오늘날 또다시
좌우를 논해야 되는지 자문해 본다.

지금까지 수백 구의 유골을 발굴해 보았지만
나는 아직 뼈에서 이데올로기를 발견
하지 못했다. 그저 죽어서 잊힌 인간일 뿐이었다.
 
컨테이너 속 플라스틱 상자에 공기와 노출된 상태로 머리카락, 손가락, 옷감 등이 보관된 모습.
 컨테이너 속 플라스틱 상자에 공기와 노출된 상태로 머리카락, 손가락, 옷감 등이 보관된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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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2023년 어느 봄날, 여양리 유품과 유해를 점검하기 위해 컨테이너를 열었다. 21년 동안 컨테이너 안에서 에어컨 1대에 의지한 유해들을 펼쳤는데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카락, 손가락, 발가락 대부분이 발굴된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4년 발굴 당시 상황이 눈에 선하다. 유해 발굴을 전국적으로 다녔지만 머리카락, 손가락 등 유해 상태가 이렇게 좋은 걸 본 적이 없다. 여양리 발굴 유해 163구를 모두 확인한 후 52년만에 세상 빛을 보았지만 여전히 안식처를 찾지 못한 영혼들이 맴돌고 있다는 사실이 후손으로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살아 숨 쉬고 있는 여양리 발굴장

지금까지 전국 발굴지 중 견학이나 답사가 가능한 곳은 경상 코발트, 고양시 금정굴 등 두 곳이다. 발굴 후 표지판 하나로 방치하기 때문이다. 또 발굴장의 특성상 산속이기 때문에 1, 2년 지나면 무성한 초야(草野)로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여양리는 다르다.

마산시는 사유지였던 여양리 발굴지 8천 평을 매입했다. 발굴 사업을 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또 이 교수가 여양리는 지리적으로 서부 경남 중심지이므로 추모시설과 위령탑을 만들고, 역사교육 현장으로 활용하도록 제안했는데 마산시가 수용하여 매입을 결정했다.

마지막으로 발굴 현장인 폐광과 너덜겅, 숯가마 3개소는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왜곡된 역사를 후대에 알릴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될 수 있는 가치와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
  
2015년 4월 추모논문집, 2023년 4월 10주기 추모논문집
 2015년 4월 추모논문집, 2023년 4월 10주기 추모논문집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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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2021년 여름, 여양리 유품 확인차 경남대학교 박물관에 방문한 바 있다. 박물관장인 조호연 교수는 필자가 사학과를 다닐 때 계셨던 마지막 교수이다. 그런 그가 이렇게 말한다.

"동료와 제자들이 2015년 추모 논문집을 발간했어요. 이 교수는 행복한 사람이에요."

올해 4월, 이상길 교수 추모 10주기가 열렸다. 이번에도 고고학 동료와 제자들은 그를 기리며 '10주기 추모논문집'을 간행했다. 이 교수의 제자인 홍성우가 필자에게 추모사를 부탁했다. 추모사를 하는데 마냥 눈물이 났다. 

필자는 <단디뉴스>에 작성한 여양리 편 원고를 들고 이 교수를 찾았다. 진주삼강문화연구원 뜰앞 작은 묘비에 원고를 바쳤다.
 
고 이상길 교수의 묘비
 고 이상길 교수의 묘비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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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유수(行雲流水) 떠나가는 구름과 흐르는 물처럼 자유를 찾아'라는 글귀가 연구원 앞뜰을 지키고 있다. 이 교수는 짧지만 굵게 살다 떠나가는 구름과 흐르는 물처럼 자유를 찾아 떠났다. 

마지막으로 필자와 이 교수의 인연을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는 1990년대 대학원 고고학 수업에 제출할 리포트를 새벽 4시에 완성했다. 당시 컴퓨터가 처음 보급되는 시기라 다루는 것이 서툴러 그만 리포트가 모두 삭제되고 말았다.

복원 방법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며 인문학관 계단에서 교수를 만나 사정을 설명했지만, 그는 단칼에 '안 된다' 하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결국 필자는 C 학점을 받고 잠깐 서운한 마음을 지녔다.

돌이켜 보면 그게 이 교수의 성격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강직함이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 본다. 그를 정직하고 올바른 생각을 지닌 좋은 분으로 기억하고 있어, 오늘따라 그의 죽음이 더욱 슬프고 안타깝다.

6회 용산고개 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입니다.


태그:#마산 여양리 민간인 피학살자, #정태인, #이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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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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