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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라는 표현은 할배가 모른다. 우리 사이 공식호칭은 이노우에상이다. 며느리가 시어머니 이름을 태연히 부르는 나라니까 여기서는 그게 당연하다. 내가 글을 할배라 시작한 것은 나에게 그는 딱 인자한 할배이기 때문이다. 처음 만날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일관되게 내 할배같다.

호칭은 중요하다. 과외선생 요시다 디자이너 노모는 아흔 가까운 나이다. 나는 오바상(아주머니)라고 불러 주는데 그게 가끔 오바-상(할머니)으로 들리는 모양이다. 본인에게 어떻게 불러주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오네상(누나)은 어떠냐고 해서 다함께 웃었던 적이 있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지만 본인은 늙는다는 걸 모른다. 살아보니 그렇더라.
 
30년 넘은 노포답게 음식맛이 깊다
 30년 넘은 노포답게 음식맛이 깊다
ⓒ 유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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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나면 할배 차로 바람쐬러 나가는 일이 많다. 내가 자전거만 타고 다니니 좀 안쓰러워 보이는 거다. 차 안에서 옛날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결혼생활 20년을 지날 무렵 어쩌다 자기가 바람을 폈단다. 급기야 마누라가 집을 나갔다. 수차례 용서를 구했는데도 응답이 없었다. 결국 도장을 찍고 끝내 버렸단다. 상대 여자가 이뻤냐니까 그저 그런 여자였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단다. 그 여자하고라도 같이 살지 그랬냐니까 그 여자도 가버렸단다. 

나도 안다. 이혼이 하루 아침에 뚝딱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참고 참다가 어떤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결국 터져버리는 게 이혼이라는 걸. 불합리한 결혼생활을 유지하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서로 참고 살았을 것인가. 이혼하고 30년을 혼자 살았단다.

왜 여자친구를 사귀지 않느냐고, 말동무라도 하면 좋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한마디로 자른다. 세가라시이(귀찮아). 신경쓰기 싫다는 거다. 여자라는 건 일일이 신경 써주지 않으면 삐지고 토라지고 결국 말다툼하게 되는데 이제 그런거 안하고 싶다는 거다. 30년을 혼자 잘 살고 있는데.

할배는 오랜 싱글생활 덕에 맛집을 많이 알고 있다. 그 덕분에 나도 식당에 자주 간다. 누가 먼저 가자고 했든 와리깡(각자 계산)이 기본이다. 편리하고 깔끔하다. 내가 1만엔 월세의 정원사 고학생(?)인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가끔 그가 계산하는 경우도 있다. 합산은 이례적이다. 이 땅은 따로 따로가 완전 기본이다. 가족끼리 둘러앉아 먹는 음식조차도 자기 그릇에 덜어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초 개인주의 사회다. 

요즘 자주 가는 식당은 할배의 오랜 단골인 쿠라야(藏屋)라는 식당이다. 30년 넘은 노포답게 음식 맛이 깊다. 오랜 단골이니 오카미(여주인)와도 친하다. 할배를 좋아하는 눈치가 그녀의 표정에 묻어난다. 내가 보기에 비결은 할배의 유려한 농담이다. 차를 내오면 반드시 한두 마디 농담을 건넨다. 농담은 딱딱한 분위기를 금방 부드럽게 만든다. 여자들이 농담 잘 하는 남자를 좋아하는 건 국경을 초월하는 모양이다.

맵찔이를 위한 매운탕
 
정어리 매운탕은 오두막 시절에도 자주 끓여먹던 메뉴다.
 정어리 매운탕은 오두막 시절에도 자주 끓여먹던 메뉴다.
ⓒ 유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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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을 나누는 데는 먹는 것을 나누는 만큼 중요한 게 없다. 내가 매운탕을 끓여서 할배와 나눠 먹을 때도 있다. 원래 내 음식솜씨는 허당중 상 허당인데 매운탕 재료가 싱싱하니까 여기서는 뭘 끓여도 맛있는 것 같다.

역시 음식맛은 재료가 중요하다. 문제는 매운맛이다. 매운 맛을 조절하지 않으면 이사람들 입도 대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매운탕이라 부를 수도 없는 국적불명 음식이 만들어진다. 매운맛을 줄이고 간만 맞춘 것이니 말하자면 맹탕 매운탕이다.

내 입맛에는 맹탕이지만 할배는 무척 좋아한다. 첫 번째 냄비는 이와시(정어리)였다. 정어리 매운탕은 오두막 시절에도 자주 끓여먹던 메뉴다. 무와 대파, 숙주나물만 있으면 된다. 원래는 콩나물을 넣어야 제 맛이겠으나 이곳에는 콩나물이란 게 없다.

정어리 한팩에 200엔. 홋카이도에서 생산된 단단한 무 한개 200엔. 숙주나물 35엔. 합계 435엔(한화 약 4350원)이면 매운탕 한 냄비가 뚝딱 완성된다. 싸고 맛있고 게다가 손쉬운 '한일 퓨전음식'이다.

레시피랄 것도 없다. 무 절반을 뚝 잘라 냄비에 적당히 깔고 그 위에 정어리를 올린다. 정어리는 내장을 제거하지 않아야 쌉싸름하게 제 맛이 난다. 그 위에 고추가루 다대기와 간마늘을 적당량 올려서 물을 붓고 한숨 끓인다.

정어리 감칠 맛이 무에 배어들게 하려는 것이다. 한숨 끓고 나면 숙주나물을 올리고 잠시 익힌 다음 대파를 썰어 넣고 불을 끄면 완성된다. 콩나물을 넣으면 맛이 더 좋아질 것 같은데 아쉽다.

정어리대신 방어를 넣어도 괜찮다. 방어회를 뜨고 난 머리와 뼈들은 팩에 넣어 판다. 듬뿍 넣어서 200엔 정도. 할배는 정어리보다 방어를 더 좋아한다. 이열치열. 삼복더위에 땀 흘리며 함께 먹는 맹탕 매운탕은 별미다. 내가 이렇게 음식을 잘 하는지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맨손으로 찢어먹는 밀가루 피자는 그때가 첫 경험이었다.
 맨손으로 찢어먹는 밀가루 피자는 그때가 첫 경험이었다.
ⓒ 유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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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탕 매운탕을 끓이다가 과외선생 요시다 디자이너가 생각났다. 이 집 식구들은 한국음식을 엄청 좋아한다. 먹다가 싸우지 않으려고 식구 수 대로 정확히 3등분해서 먹는다는 파래김은 전설적인 선물이 된 지 오래다. 깻잎 김치에다가 작년 가을에 담근 묵은 김치까지 나눠줬다. 좋아한다.

무료 과외를 수강 중인 몸인지라 뭔가 보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게 맹탕 매운탕이었다. 할배가 좋아하는데 한국 음식 마니아들이 안 좋아 할 턱이 없다. 과외 공부 날 방어 한 냄비를 물만 부어 끓일 수 있도록 준비해 들고 갔다.

이렇게 좋아할 수가. 다들 맛있게 잘 먹었다고 문자가 왔다. 답례로 온 가족이 초대하는 전문 이탈리아 레스토랑 식사까지 대접 받았다. 맨손으로 찢어먹는 밀가루 피자(알고보니 난이라는 인도 빵)는 그때가 첫 경험이었다. 
 
하루미씨 저녁 때를 맞춰 아지새끼 매운탕을 들고 갔다
 하루미씨 저녁 때를 맞춰 아지새끼 매운탕을 들고 갔다
ⓒ 유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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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력을 받은 맹탕 매운탕은 요리경력 60년 하루미씨에게도 전해졌다. 시도 때도 없이 밥상 차려 놓고 부르는데 뭐든 답례를 해야지. 저녁 때를 맞춰 싱싱한 아지새끼 매운탕을 들고 갔다. 솔직히 하루미씨네는 준비하면서도 걱정이 많았다. 요리 전문가들한테 이게 뭐하는 짓인가. 

며칠 뒤 하루미씨가 빈 냄비에 시원한 캔맥주를 담아왔길래 물어봤다. 혹시 나 몰래 슬그머니 버리지 않았느냐고. 솔직히 대답해 보라고. 내 질문은 진심이었다. 만들어주고 내내 걱정했으니까. 아껴두고 먹느라 빈 냄비가 늦었단다. 그녀는 직선적인 성격이다. 액면 그대로 믿어도 된다.

음식을 나누는 것

일부러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만 맹탕 매운탕은 이곳 지인들에게는 한국음식의 상징같은 게 됐다. 음식을 나누는 것은 소통의 지혜다. 냄비를 알려줬으니 다음에는 젓가락 뿐인 이곳 식탁에 숫가락을 선물할 계획이다. 국물에 밥 말아먹는 매운탕 궁극을 경험시켜야지. 원초적인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맹탕매운탕의 원조는 이노우에 할배였다.

나는 할배를 좋아한다. 나를 할배에게 이끈 것은 인연이었다. 내가 원해서 이 땅에 왔지만 나머지는 내 의도가 아니었다. 이곳에 오면서 새로운 인연들이 '스스로' 생겼다. 쿠마우에 사부도 이노우에 할배도 과외선생 요시다 디자이너까지 모두 인연의 선물이다. 내 삶은 새로운 인연들이 싹트고 자라면서 지경이 넓어지고 풍요로워졌다. 

더불어 산다는 건 살아있는 유한한 시간들을 함께 나눈다는 거다. 좋은 인연과 함께 한 일상들이 쌓이고 쌓여서 추억이 되고 그 추억들이 또 살아갈 힘이 된다. 삶이 고달프더라도 이런 인연들이 있기 때문에 인생은 한번 살아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다보면 좋은 인연들이 소리 소문도 없이 찾아오는 법이니까. 

덧붙이는 글 | 내 블로그(https://blog.naver.com/lazybee1) 일본정원 이야기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일본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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