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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입니다. 20대(Z), 30대(M), 40대(X)까지 총 6명의 여성들로 이뤄진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편집자말]
'어떤 색을 좋아하나요?'라는 질문에 고민없이 단숨에 대답하는 사람을 동경했다. 자기소개를 해 보라는 면접관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는 면접자 같은 기운이 느껴져서일까. 내가 좋아하는 색을 찾는 일은 꼭 나라는 사람을 드러내는 일처럼 느껴져서 특히 사춘기 시절 조급함을 느꼈더랬다.

중학생 땐 친구를 따라 노랑색을 좋아했다. 병아리같은 귀여움을 어필할 수 있는 색인 데다, 같은 노랑색이라도 채도와 명도가 약간씩 달라 나만의 노랑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땐 우연한 기회로 보라색을 좋아했다. 하루 종일 쓰고 다니던 안경 안쪽과 겨울철 한 몸과 같았던 패딩 안감, 무거운 책 때문에 각이 흐트러진 가방 안쪽까지 의도하지 않게 전부 진한 보라색이어서 보라돌이로 불렸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좋아하는 색이 무엇이냐는 질문엔 시원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색을 좋아하자니, 필기구며 담요며 온갖 액세서리를 특정 색으로만 맞추고 다니는 다른 친구들만큼 그 색을 열렬히 좋아할 자신도 없었던 것 같다. 그저 특정 색깔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기만을 기대하며 수동적으로 기다리길 20년. 드디어, 때가 찾아왔다.

처음으로 인식한 흰색
 
한국인의 흰 옷 사랑은 비단 조선시대 뿐 아니라 삼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인의 흰 옷 사랑은 비단 조선시대 뿐 아니라 삼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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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첫 교양수업이었다.

"여러분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OT날은 출석을 확인하고 강의계획서 정도만 읽고 빨리 마치는 것이 국룰인데, 교수님의 질문은 새내인 우리에게 뜬금없었다.

"음식, 도구, 건물 등등…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아주 많을 겁니다, 그렇죠? 그 중엔 놀라운 발명품들도 많을 거고요. 나는 인간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상징symbol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것들 중 가장 위대한 것도 마찬가지고요."

엥?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지? 동기, 선배와의 밥 약속으로 가득찬 머릿속에 그제야 수업 내용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늘 여러분들이 타고 온 버스나 차를 생각해봅시다. 차는 정지선 앞에 서고, 정해진 차선을 함부로 넘나들지 않죠. 사람들은 횡단보도를 통해 이동하고요. 내가 지금 말한 횡단보도, 정지선, 화살표 등은 물리적인 힘이 없습니다. 맘만 먹으면 그것들을 무시하고 다닐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의미를 가진 기호일 뿐인 것이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고 삶을 보조합니다. 관념만으로 행동을 바꿀 수 있다는 것. 신기하지 않나요? 여러분의 대학생활이 무의미한 상징이 아니라 의미를 가진 상징이길 바랍니다. 다음 수업 때 뵙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횡단보도 앞에 가지런히 선 사람들과 조금 삐뚤빼뚤하지만 정지선에 나란히 선 차들이 보였다. 그 아래에서 무수히 많은 이들의 삶을 받치고 있던 하얀 선들도.

흰색. 빅뱅의 노란색과 소녀시대의 분홍색, BTS의 보라색까지 형형색색한 색깔이 친구들 사이의 유대감을 끈끈하게 만들던 10대 시절, 흰색은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색이었다(HOT 팬들껜 죄송하다). 흰색은 말그대로 무색무취(無趣). 취향(趣向)이 없는 사람임을 인증하는 색. 뭐 하나라도 더 드러내야 하는 중고딩 사회에서 가장 매력적이지 않은 색이었다.

그렇게 대학생이 되어 흰색도 색임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됐다. 다른 색과 섞이면 그 색을 묽게, 흐리게, 옅게 만들어서 존재감을 흐릿하게 하는 색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강렬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도, 무엇을 맹렬히 외치지도 않지만 스스로 의미를 담아 세상에 일조하는 색. 이게 좋아한다는 감정인가 싶지만 흰색의 새로운 의미가 마음 깊이 다가온 것만은 확실했다.

우리가 꾸준히 사랑한 색

최근엔 <알쓸별잡>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인천의 역사를 살펴보다가 흰색이 언급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길거리는 오물로 가득하고 살림살이는 가난하여 지저분한데 유독 사람들이 입고 다니던 옷만이 새하얬다고.

한국인의 흰 옷 사랑은 비단 조선시대 뿐 아니라 삼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3세기에 편찬된 <삼국지>의 <위지 동이전>에 백색 옷을 즐겨 입는 풍속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심지어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는 여러 차례 '백의금지령(白衣禁止令)'이 내린 적도 있다는 사실!

백색이 서쪽을 상징하며 상복과 같은 색이라 금지령을 내렸다고 하는데, 한국인의 흰옷 사랑은 임금님도 막지 못한 것이었다는 점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출처: 서봉하. (2014). 한국에서 백의호상(白衣好尙)현상이 고착된 배경에 관한 논의 유창선(劉昌宣)의 백의고(白衣考)를 중심으로 (pp. 152-164). 한국복식학회).

흰옷을 입는 풍습은 흰색을 숭상하는 문화, 흰색이 가진 청렴과 순결함의 이미지, 색을 욕망으로 간주하는 유교 사상 등 다양한 원인에 기인하고 있다고 한다. 나도 백의민족의 후손으로서 돌고돌아 결국 흰색을 좋아하게 될 운명이었던 걸까. 홀로 순결하나 다른 색과 함께일 때는 그 색을 온전히 품어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색이라는 점도 열정적인 중재자(ENFJ)인 나와 퍽 닮아 있었다.

출근길 버스를 탄다. 버스 안, 기사 아저씨의 손에도 흰색 장갑이 있다. 맞은편 길에서 같은 번호의 버스가 오면 스윽- 기사 아저씨의 손이 올라간다. 무심한 듯 다정하게 인사가 오고 가면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이 더 따뜻해진다. 어쩜, 인류애까지 가진 색이라니.

아직 '어떤 색을 좋아하나요?'라는 질문에 단박에 '흰색이요'라는 대답이 나오진 않는다. 아무래도 함께 한 세월이 적다 보니. 시간이 흐르면 흰색은 나에게 또다른 상징이 되어 내 삶을 떠받치고 있지 않을까. 흰색은 이미 자기 방식대로 나에게 스며드는 중인 것 같다.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
태그:#좋아하는색, #흰색, #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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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사랑이 이긴다고 믿는 낭만파 현실주의자입니다. 반건조 복숭아처럼 단단하면서도 말랑한 구석이 있는 반전있는 삶을 좋아합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나 모순적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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