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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첫 문장 '오늘, 엄마가 죽었다' 만큼이나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가슴 아픈 현대사의 한 단면을 그리고 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표지
 <아버지의 해방일지> 표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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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화자인 아리의 아버지는 빨치산의 일원이었다. 그는 1948년 입산한 구빨치산이었으며 전향으로 위장해 자수하지만, 다시 투옥되어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연좌제가 존재했던 당시에 아버지의 빨치산 이력은 집안을 풍비박산 내는 원인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아리의 혼삿길도 망쳐놓았으니, 아버지는 모든 갈등의 원흉이다.

본래 빨치산은 게릴라를 수행하는 비정규군을 뜻하는 파르티잔에서 비롯되었다. 이 단어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빨치산이란 단어로 변질되었는데, 빨갱이와 산이라는 용어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바람에 빨치산은 빨갱이와 동의어로 쓰이곤 한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미군정을 거쳐 1948년 8월 15일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한다. 이 과정에서 제주 4.3 사건과 여순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아리의 아버지는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한 남로당 구빨치의 일원이었다.

우리나라 현대사는 매우 혼란스럽고 복잡하다. 따라서 당시 시대를 살아보지 않고서 문자만으로 그 시절을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기본적인 역사적 지식 없이 소설 속 이야기를 접한다면 이 소설이 그저 밋밋하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시대적 상황과 배경을 이해한다면 소설이 보다 입체적으로 그려질 것이다.

또한 이 소설은 실제 빨치산 아버지를 둔 정지아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이므로 소설을 통해 당시 역사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물론,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이미 경제성장이 정점인 시기에 이 시절을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소설을 통해 조금이나마 그 간격을 메울 수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빨갱이라는 어감은 예나 지금이나 좋지 않다. 상대를 욕하거나 비난하기 위해 쓰는 말이다 보니 이 말을 듣는다면 모욕을 당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시대적 분위기가 엄격했던 당시 이 말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낙인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아리에게 있어 아버지는 그 잘난 사회주의로 인해서 집안을 망친 죄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장례식을 통해 그간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참모습이 드러난다. 그는 누구보다 열렬한 사회주의자였지만, 그렇다고 강경한 이념으로 무장한 사람도 아니었으며 그저 정 많고 따뜻한, 그러면서도 누구와도 벽을 두지 않는 '평등주의자'였다.

아버지의 삶은 장례식을 찾는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재조명되고 비로소 평생 아버지를 따라다니던 사회주의자라는 낙인은 사라진다. 아리도 이를 통해 아버지와 화해하게 되고 아버지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비록 소설을 관통하는 커다란 사건의 줄기는 없지만, 장례식을 통해 드러나는 아버지의 삶은 제법 특별하게 다가온다. 그는 평생 사회주의자 또는 빨갱이라는 낙인 속에 살았지만, 사람이 오죽하면 그랬겠냐며 오히려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념의 대립은 여전히 격렬하다. 사회적 참사 앞에서도 이념으로 갈라지는가 하면, 굵직한 사건·사고마다 이념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물론, 인간 사회에 있어 서로가 지지하는 사상이나 철학이 있기 마련이지만, 이 이념적 충돌이 지나쳐 상대를 몰아가고 비난하며 감정싸움과 소모적 논쟁이 벌어지는 것이 일상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은 무엇 하나도 바꿔놓지 못하는 그저 소모적 논쟁에 그칠 뿐이다. 또한 혼란스럽던 격동의 시기를 거쳐 문화와 가치관이 모두 변한 현대에도 구시대적 이념 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꽤 안타까운 일이다.

여기에는 이념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만이 담겨있다. 이 추종 속에서 사회가 진보할 일은 결코 없다. 이념에 대한 맹신은 서로의 이념만 존재하는 세상만 되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그런 세상은 망하기 십상일 테니 말이다.

아리의 아버지 '고상욱'은 결코 세상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놓지 않았기에 그의 장례식은 좌우를 가리지 않았고, 심지어 십 대 소녀와도 담을 쌓지 않았다. 그의 삶을 들여다본다면 좌우의 대립은 보잘것없어진다. 중요한 것은 사람 아니겠는가.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아버지가 사회주의자라는 꼬리표에서 해방되는 일지이기도 하지만, 실제 해방 이후 격동의 역사의 산증인인 아버지의 삶, 또는 민중의 삶을 뜻하는 중의적 의미가 담겨 있다. 3일간의 장례식 속에서 각기 다른 인물을 통해 전개되는 이야기는 액자식 구성과 비슷한 면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때론 웃음을, 때론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우리 사는 세상에 인정과 관용, 이해와 포용은 참 어렵다. 어쩐지 갈수록 사람과 사람 간 정 마저 사라져가는 삭막한 세상이 되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이 존재하던 동네라는 개념이 현대에는 그저 하나의 지명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곤 한다.

이제 동네라는 개념도 나와 이어진 여러 사람이 살아가는 곳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민등록상 내가 소속된 곳임을 드러내는 지명에 불과하니 말이다. 직장을 찾아 낯선 도시에 살아가다 보면 도시에 대한, 동네에 대한 애정은 그다지 생기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도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사람 간 정이 싹틀 리도 만무하다. 세상이 점차 나만 중요해지는 것도 이해가 갈 법하다. 그렇지만 이런 말도 있지 않던가.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민겨."

사람은 결국 홀로 살아갈 수 없다. 사회적 관계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고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냉정하고 냉혹한 또는 삭막한 시선보다는 세상에 대한 애정과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 사회의 갈등도 조금이나마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소망을 가져본다.

역사는 늘 당시의 숨겨진 이야기를 담지 못한다. 진실 속에 가려진 '그러나' 말이다. 역사를 오늘날의 관점으로만 해석하려 들 때 갈등과 오해가 반복된다. 혼란했던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지 않으면 아버지는 단지 빨갱이일 뿐이지만, 숨겨진 속 이야기를 통해 마침내 우리에게도 인간 '고상욱'이 다가온다.

따라서 역사는 단지 기록만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러나' 속에 숨겨진 비극을 이해해야만 역사는 역사로서 온전히 다가온다.
 
"사램이 오죽하믄 글겄냐."

무슨 주의자가 되기보다 사람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았던 고상욱처럼 우리 또한 이해와 관용으로 다가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 또한 숱한 사회적 갈등의 해방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해 본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은이), 창비(2022)


태그:#정지아, #아버지의해방일지, #빨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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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가 입니다. 블로그 "사소한 공상의 세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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