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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동 서울회생법원 모습.
 서울 서초동 서울회생법원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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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생위원 3년차인 A 사무관은 최근 고민에 빠졌다. 타인의 불행을 심사하는 자신의 업무가 심리적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배우들이 특정 연기 때문에 한참동안 그 역할에서 못 벗어나듯 업무속의 어둠이 A의 어깨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게 주입되는 연민과 심리적 거부감. 하나의 상황에서 느끼는 양자의 모순과 결정의 딜레마가 A 사무관에게 뜻하지 않은 철학적 고민을 안겨주었다. 그는 볼멘소리로 혼잣말을 하곤 했다.

"우리의 삶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
"도대체 행복은 무엇이고, 특정 개인들은 왜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할까?"
"우리 자본주의 시스템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잘 작동되고 있는가?"
"회생법원을 찾은 이들에게서 보이는 저 주저함과 망설임은 무엇 때문일까?"


서로 자주 대화하는 사이라 차근차근 실마리를 찾아 생각의 나침반을 켰다. 삶의 목적, 행복, 자본주의, 사회적 약자, 주저함 혹은 망설임...

행복의 근원은 일부는 사회적 성취와 인간관계, 그나머지는 잘 먹고 사는 것에서 온다. 현실 정치의 목적과 개인 사회생활의 목표는 같다. 잘 먹고 잘사는 것. 그것을 위해 국가와 사회시스템, 법과 제도가 존재한다. 흔히 말하는 도덕정치로 인한 태평성대와 개인의 자아실현의 보람과 기쁨도 배부른 다음의 일이다. 물론 이때 배가 부르다는 것은 육체적인 만족과 정신적인 만족을 포함하는 배부름이다.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소크라테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라는 표현은 양적 공리주의라고 불리던 벤담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의 철학이다. 벤담은 쾌락의 양과 질을 따지지 아니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주는지만을 중시했다. 하지만 질적 공리주의자 밀은 쾌락을 인간의 쾌락과 동물의 쾌락으로 나누고, 양자 중 질적으로 더 높은 인간의 쾌락이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하였다.

평범한 우리는 IQ가 180 이상으로 추정되고 세살 때부터 철학자를 꿈꾸던, 천재 밀의 주장에 동의하기 전에도 이미 경험칙으로 알고 있다. 그저 육체적으로 배부른 상태가 진정한 쾌락과 행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내면의 만족까지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의 행복이 완전함을 갖춘다는 것을. 이러한 밀의 주장은 몇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행복론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리의 경제활동은 자본주의적 유토피아까지는 아니어도 '밀의 행복론'을 지향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과 그 이후의 대학과 취업까지의 고달픈 여정은 '배부르고 싶은 삶'에 관한 목적 때문이 아니었을까?

배부름의 욕망이 결집된 자본주의적 삶은 경쟁과 성공을 신성시한다. 성장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끈다는 모토는 끊임없는 개인의 노력을 요구한다. 자본주의라는 내비게이션이 제시하는 일정한 경로를 이탈하지 않아야 성공에 이를 수 있다고 개인들을 계속 종용한다.

하지만 공정한 게임을 위한 공평한 기회와 무기의 평등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각자도생'이라는 무서운 현실 속에서 개인들의 삶은 숱하게 경로를 이탈하거나 자의반 타의반 삶을 포기한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시스템)의 실패가 아니라 개인(능력과 노력)의 실패로 귀결된다.

자본주의적 삶에서의 마지막 키워드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탈락하거나 밀려난 이들이 가장 많이 찾는 키워드는 실직과 실업급여, 회생·파산과 새출발이다. 한 개인의 사회경제적 삶과 경쟁의 부정적 결과가 절망과 돈으로 점철되는 순간이다. 삶의 과정과 성취가 경제적으로만 평가되고 수렴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적어도 육체적 배고픔을 달래는 게 먼저라는 점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서울회생법원이 2017년 전문법원으로 개원한 이래 각 고등법원 관내로 회생법원이 늘고 있다. 법원조직이나 (예비)회생·파산 파산 신청자들에게는 좋을 수 있겠지만, 이 현상을 마냥 반가워할 수만은 없다. 우리 사회에 경제적 곤궁에 빠진 이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분명한 지표이기 때문이다.

2022년 7월부터 2023년 6월까지 전국 법원에 신청된 개인파산사건 접수건수는 4만 1626건이고, 서울회생법원은 8952건이다. 또한 개인회생사건 접수건수는 전국법원 9만 3171건이고, 서울회생법원은 2만 2619건이다.

매달 전국 회생법원의 개인파산/개인회생 신청건수만으로는 한계채무자의 실체를 본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실제 경제적 파탄에 이른 채무자의 비율은 공식적인 통계 너머에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미시적·거시적 경제적 어려움의 파도는 늘 취약한 고리에서 오기 때문이다.

채무자들이 경제적 한계에 처했을 때 반응은 다양하다. 각기 다른 활로를 모색하거나 파탄의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 누구나 처음부터 개인회생이나 파산 신청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이러한 제도 자체의 존재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를 수도 있다. 어쩌면 회생파산을 떠올리는 것이 가장 마지막 순간일수도 있다.

경제적 파탄시기부터 파산신청까지의 기간을 살펴보면 망설임과 주저함이 보인다. 서울회생법원의 2022년 통계를 보면, 동일연도나 1년 이내에 조기 파산신청을 한 경우는 31.85%, 파탄원인이 발생한 때로부터 6년 이후에 파산 신청한 채무자의 비율은 45.26%다. 4~5년 사이 신청자까지 합하면 고민하다가 파산 신청한 한계채무자의 비율은 55.06%에 달한다.

경제적 파탄에도 회생·파산 신청을 주저하는 네 가지 이유 

첫째는 '도덕적 양심'의 문제다.

개인파산 하면 선의의 채권자에게 일방적으로 경제적 피해를 주는 행위로 인한 죄책감이나 심리적 불편함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타인에게 돈을 빌려서 갚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도덕적 선함 때문이다. 규범적 도덕의 기준에서는 파산을 '도덕과 성실함의 실패'로 볼 여지도 있다.

법과 제도를 활용하여 자기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는 '도덕적 해이'를 활용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선입견 때문에 주저한다. 사실 양심의 문제는 개인이 극복해야할 영역이다. 사회적 낙인과는 달리 법률적 제한을 받지 않으면서도 마음속 두려움 때문에 자신이 갱생할 최적의 골든타임을 놓치는 것은 더 큰 후회를 불러올 수 있다.

둘째는 '사회적 시선과 낙인'의 문제다.

파산자라는 사회적 낙인은 예전에는 호적에 붉은 줄이 그어진다는 얘기까지 들릴 정도로 꺼려지는 것이었다. 지금도 신용불량에서 파산선고까지의 과정에서 경제활동의 제한을 받는 것은 분명하다. 채무자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파산선고로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역시나 선언적 규정에 불과하다.

몸에 주홍글씨를 새기고 사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회생파산으로 마치 지금까지의 사회생활이 부정당하는 생각마저 든다. 면책이 되면 파산선고로 인한 각종 불이익이 복권되지만, 현실의 경제활동에서는 그 부정적 파급효과가 꽤 오랫동안 미치게 된다. 특히 파산선고가 신용전과가 되어 새출발을 하는데 큰 장애요소가 된다는 관념이 뿌리 깊게 놓여있다.

셋째는 '법원 출석의 불편함'에서 온다.

신청인들에 의하면, 법원 재판정에서 자신의 사정을 구구절절 토로해야하는 심리적 공포가 크다고 한다. 마치 자신의 죄를 인정하거나 변명처럼 들리는 얘기를 해야 하는 상황은 공황장애의 전 단계를 유발할 수도 있다.

법원은 다른 관공서에 비해 부담과 불편함이 큰 공공기관이다. 소송이나 각종 사건 신청을 위해 드나들지만 가급적 피하고 싶은 곳이다. 법정에서 판사가 진행하는 절차에서 자신의 사정을 변론하고 억울함을 호소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다. 생경한 법정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인생사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그렇지만, 거기에서 나아가 그 상황이 패소로 귀결될 수 있다는 두려움도 클 것이다.

넷째는 드러내기 힘든 '비양심적 동기'에서 온다.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회생파산제도를 재테크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경우다. 회생파산제도를 채무면탈의 고의를 가지고 경제적 파탄을 고의적으로 일으킨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또는 적극적으로 소득을 숨기고 재산을 은닉하거나 갚을 의사 없이 빚을 얻는 등 기망행위를 통해 경제적 파탄지경에 이른 경우도 이에 속한다.

신청인의 정직함이 의심받은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판사가 심문을 통해 신청자격과 면책 받을 자격을 결정할 수도 있다. 실제 파산선고를 받더라도 면책을 거부당한 경우가 존재한다. 신청인의 비양심적 동기가 서면심사 등에서 드러난 케이스다. 이러한 상황을 미리 예상하게 되면 자신의 정직하지 않은 양심과 행동 때문에 신청에 주저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 낙인과 불이익은 도덕적 양심의 차원과는 달리 제도적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다. 파산선고와 회생 정보가 각종 불이익으로 존재하는 현행법과 제도에 대한 인식을 전향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또한 회생파산 절차에서는 법원 출석의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 회생파산절차는 비송의 영역이고 대부분 서면신청과 서면심사로 종결된다. 신청도 신청대리인에게 부채증명서나 개인이 준비해야할 서면을 준비해주면 족하다. 법정에서 변론해야할 가능성은 거의 없고, 판사가 심문하거나 면담을 요청하는 경우 또한 극히 드물다.

우리 모두가 철학자가 되는 세상은 바람직하면서도 불편하다. 철들지 않는 영혼들이 존재할 때 철학이 의미를 갖는 것은 세상살이의 아이러니다. 우리 사회는 누군가는 철학자나 농부가 되고, 다른 누군가는 시인이나 빵집 주인이 되었을 때 비로소 건강해진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회생법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태그:#경제적 파탄 , #회생파산, #회생법원, #공리주의 , #밀의 행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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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교육원 교수를 거쳐 현장에서 밥벌이 중입니다. 부모와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을 꿈꾸고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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