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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책을 들고 다닌다. 잠깐이라도 틈이 나면 꺼내 볼 요량으로 하는 일이다. 일을 하러 나갈 때도, 아이들과 외출하는 주말에도 가방에는 늘 책이 있다. 견물생심이라고 눈에 띄면 아무래도 손이 더 갈 거란 생각에 실천하고 있다. 독서를 위해 시간을 내는 건 집안일이나 밥벌이처럼 의무적인 일과의 대결인 것 같지만, 사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간과의 대결이다.

별생각 없이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의도적으로 멀리하고 있다. 읽어야 하는 책이 많기도 하고, 읽고 싶은 책이 쌓여 있기도 하다. 학부모 독서모임에서는 한 달에 한 권의 책을 함께 읽는다. 글쓰기 모임에서는 혼자라면 도전하기 어려울 책을 선정해 느린 속도로 함께 읽고 있다. 그 밖에도 내가 읽고 싶어 빌려오거나 소장 중인 책까지 읽고 있다. 수시로 틈틈이 읽어야만 하는 상황인 것.
 
올 가을엔 한 번도 도전해보지 않았던 영역의 책을 읽어 보는 건 어떨까.
▲ 한 권의 책 올 가을엔 한 번도 도전해보지 않았던 영역의 책을 읽어 보는 건 어떨까.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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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욕심이 많은 편이다. 많이 읽는 게 꼭 좋은 건 아니라고 스스로를 달래지만, 뒤늦게 책을 읽기 시작한 사람으로서 세상엔 왜 이리 읽고 싶은 책이 많은지. 글을 꾸준히 쓰다 보니 책을 많이 읽는 게 당연한 의무가 되기도 했다.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독서에도 탄력이 붙어 더 부지런히 책을 읽고 있다. 당장 탐독하고 싶은 책과 읽을 넉넉한 시간, 따뜻한 커피 한 잔만 있으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다.

최근 읽은 책 중에는 '독서'에 대한 책도 있다. 매리언 울프의 <책 읽는 뇌>. 책을 읽는 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뇌과학적인 측면에서 알려주고, 아이가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 독서를 배우는지 설명한다. 늘 혼자 읽다 함께 읽으니, 독서를 두려워하거나 제대로 책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 역시 책을 마주하면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 얇은 에세이나 소설은 접근하는 게 어렵지 않지만, 인문사회과학 서적이나 고전의 경우 두께가 만만치 않으면 두려움이 엄습한다. 책을 정복하고 싶다는 욕구와 과연 잘 읽어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동시에 찾아오는 것.

그럴 때는 책을 일단 오래 곁에 두고 째려본다. 흘끔흘끔 간을 보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독서에 들어가기 전에 차례도 들여다 보고, 서문도 읽어보고, 추천사나 저자에 대한 소개도 찬찬히 살핀다. 주변을 계속 맴돌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오늘이다' 싶은 날이 찾아온다. 어떤 텍스트든 다 소화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는 날. 그런 날은 과감하게 책을 열고 30~50페이지가량을 내리읽는다. 그 정도 읽고 나면 감이 온다. 이 책이 읽을 만한지, 아직 내게 시기상조인지.

숫자나 도표, 전문용어가 많아 도입이 힘겨운 책이라도, 막상 읽다 보면 술술 읽히는 경우도 많다. 생각지 못한 통찰이 전해져 지적 유희를 느끼기도 한다. 이때 느끼는 기쁨은 길게는 며칠간 지속된다. 어려운 책에 계속 도전하는 건, 이때 분비되는 도파민이 거의 최고치라는 확신 때문이다. 세상의 비밀에, 삶의 진실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충만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준다.
 
책을 읽으면 뇌 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책 읽는 뇌> 매리언 울프 지음, 살림 출판
▲ 책 읽는 뇌 책을 읽으면 뇌 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책 읽는 뇌> 매리언 울프 지음, 살림 출판
ⓒ 박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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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뇌>에서 저자는 인간에게는 독서를 위한 유전자가 없다고 말한다. 문자를 발명하고 사용하기 시작한 지 고작 2천~3천 년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서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뇌의 모든 부분을 총동원해 학습해야만 가능하다. 저자는 독서를 배운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라고 말한다. 글자의 음을 알고 뜻을 떠올리며 표면적인 의미와 숨겨진 의미까지 읽어내는 것이 독서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독서가 발달하는 양상을 5단계로 구분한다. 입문 단계의 예비 독서가, 초보 독서가, 해독하는 독서가, 유창하게 독해하는 독서가, 숙련된 독서가가 그것이다. 입문 단계의 예비 독서가는 글자를 배우기 전 단계로, 다양한 음성과 단어, 개념, 이미지, 이야기 등을 맛보는 시기다. 이 시기에 독서는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포근한 보호자의 무릎에 앉아 문자를 듣는 것과 사랑받는 느낌이 결합되면서, 기나긴 학습 과정의 토대가 마련된다.

초보 독서가는 스스로의 힘으로 문자를 읽고 의미를 이해하는 방법을 익히는 단계다. 해독하는 독서가는 문자의 해독 규칙과 단어들의 비밀스러운 의도를 파악한 뒤, 감정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단계다. 유창하게 독해하는 독서가는 텍스트 아래 감춰진 것을 발견하는 단계로 은유, 추리, 유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성년에 이를 때까지 계속 발달시켜야 하는 단계로, 이 과정에서 기존의 지식이 어떻게 바뀌고 해석될 수 있는지를 알아채고, 정보를 종합해 추론을 이끌어 내며,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간다.

마지막으로 숙련된 독서가는 여러 가지 의미론적, 통사론적 프로세스뿐 아니라 다양한 독해 프로세스를 사용해 텍스트를 이해한다. 이 과정에서 좌뇌와 우뇌의 브로카 영역, 우뇌의 각회 영역, 소뇌의 우측 반구 등 전반적인 뇌가 활성화된다. 정적인 독서가 이처럼 활발한 뇌 활동을 이끌어 낸다는 게 자못 신기하다. 저자는 독서 발달의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끝없이 확장되는 인간 지성의 진화를 보여주는 살아 움직이는 증거가 바로 숙련된 독서가라는 것.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느 단계의 독서가인지를 가늠해 보았다. 어릴 때는 마냥 어렵기만 했던 고전들이 최근 들어 눈에 잘 들어온다. 꽤 난해해 보이는 문장의 진의가 한두 번 정독하는 행위만으로 내 안에 흡수될 때 묘한 쾌감을 느낀다. 점점 읽는 속도와 이해 속도가 비슷해진다고 느끼는데, 돌이켜 보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마흔이 넘어 이런 현상은 더 두드러졌다. 텍스트와 인생의 경험 사이에 상호 작용이 일어나는 듯하다. 어릴 때 읽었던 책이 나이 들어 다시 읽었을 때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도, 아마 그런 영향일 것이다. 삶의 경험이 축적되고 꾸준한 읽고 쓰는 행위로부터 개인적인 통찰이 쌓이면서, 타인의 통찰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 것. 이럴 땐 나이 들어가는 게 더 없는 축복이다.

숙련된 독서는 무엇을 읽는지, 어떻게 읽는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고 한다. 독서량은 많지만 생각이 정체돼 있거나, 실제 삶에 독서가 별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아마도 늘 비슷한 책만 읽기 때문은 아닐까. 책을 읽고 난 뒤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생략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독서도 적절한 학습과 도전, 도약이 필요해 보이는 까닭이다.

에세이나 소설을 주로 읽는 사람들 중에는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읽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주로 읽는 사람들 중에는 에세이나 소설 읽는 걸 낭비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경계를 허물고 편견을 지우고 독서를 때로 쉼으로 때로 도전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 모두는 숙련된 독서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지식과 지혜와 통찰을 차곡차곡 쌓아 실제 자신의 삶과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것. 결국 그게 우리가 독서를 하는 진짜 이유가 아닐까.

나는 내 능력을 크게 신뢰하진 않지만, 뇌의 가소성은 믿는다. 나도 뇌를 가진 인간이기에,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노력하면 또 다른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를 바꾸고 내가 그릴 수 있는 세상의 범위를 넓히는 건, 어쩌면 단 한 권의 책인지도 모른다. 한 번도 도전해보지 못한 영역의 한 권의 책. 한 권이 열 권, 수십 권으로 불어나 뇌 속뿐만 아니라 내 앞에 새로운 길을 낼지도. 그 이후의 세상은 이전과는 분명 다른 세상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 게재합니다.


태그:#독서, #책, #가을, #독서의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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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 『아직도 글쓰기를 망설이는 당신에게』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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