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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명절이 되면 친정 아버지가 사과를 보내신다. 추석에는 홍로가, 설에는 부사가 온다. 올해는 언제나 주문하시던 과수원의 작황이 좋질 않아 대신 얼음골 사과로 보냈다고 하셨다. 물가가 올라 한 상자에 8만5천 원이나 하더란다. 시댁으로 보내신 알이 좀 더 큰 선물용은 한 박스에 12만 원이었다고 한다.

사과를 받고 나서 남편에게 맛이 어떠냐고 하니까 일반 사과와 별 차이를 못 느끼겠단다. 그럴 리가 싶어 직접 먹어보니 맛이 시원하고 깊었다. 아삭한 식감은 분명 홍로인데도 달콤한 부사 맛이 났다. 우리 집 냉장고에 아직 굴러다니는 시장 사과와는 확실히 맛이 달랐다. 이렇게 맛 차이가 확실한데도 별다른 걸 못 느끼겠다니 남편은 사과 맛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나는 사과가 좋다
 
사과가 나무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모습이 가을이 왔음을 나타낸다.
▲ 사과 사과가 나무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모습이 가을이 왔음을 나타낸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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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 홍로가 보이기 시작하면 추석이 다가왔다는 걸 알 수 있다. 홍로는 가장 대중적인 품종인 부사에 비해 색도 더 빨갛고 크기도 대체로 더 크고 살짝 울퉁불퉁하다. 부사보다 좀 더 단단하고, 달콤하기보다는 시원한 맛이 더 강하다. 한마디로 늦여름에 나오는 파란 아오리와 늦가을에 나오는 부사의 가운데 쯤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오리처럼 홍로도 1년에 딱 한 계절 잠시 먹을 수 있다. 추석 직전에 나와서 추석이 지나면 들어간다. 그래서 추석 차례상에 오르는 사과는 무조건 홍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품종은 부사이고, 다들 사과라고 하면 부사의 달콤한 맛을 떠올리지만, 나는 홍로의 아삭하고 시원한 맛이 좋다. 왠지 여름의 더위를 걷어가는 시원한 가을 바람을 떠올리게 하는 맛이다. 울퉁불퉁하지만 빨갛게 윤 나는 가을 미인, 홍로는 내가 가을을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다.

홍로에 대해 길게 늘어놓긴 했지만, 사실 사과는 원래 내가 좋아하는 과일은 아니었다. 어릴 때는 배를 사과보다 더 좋아했다. 지금도 배를 좋아하긴 한다. 제대로 고르기만 한다면 배의 넘치는 과즙과 꿀 같은 맛은 사과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배는 이상하게 실패할 확률이 높다. 잘못 고른 배는 무맛이다. 맛이 없어서 無맛이기도 하고, 심할 때는 정말 야채 무 같다는 느낌까지 든다.

그런 배는 배숙을 만들거나, 고기 양념으로 갈아 넣는 것 이외에 마땅한 처리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게다가 배는 대체로 사과보다 크고 무겁고, 가격도 비싸서 사기도 부담이 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실패 확률도 적고 단맛도 고른 편인 사과를 더 많이 먹게 되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어른들은 다 사과를 좋아하시는 듯하다. 시어머니도, 친정 부모님도 하루 사과 한 알을 밥처럼, 보약처럼 드신다. 당신들만 드시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자식에게도 부지런히 그 믿음을 전파하신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도 사과를 제법 부지런히 먹고 있다.

여기에 이유를 하나 더 달자면, 예전에는 늦여름엔 파란 아오리, 추석엔 홍로, 그 이후엔 부사, 이정도로 사과 품종이 단순했던 것 같은데, 요즘은 그 종류가 확 늘었다. 한 마디로 선택지가 늘었다는 이야기다. 당장 기억나는 것만 해도 늦여름의 아오리, 추석의 홍로에다가, 파란 빛이 도는 노란색의 달콤한 시나노 골드(올해는 시나노 레드도 보인다), 양광, 아리수 사과, 아, 홍옥도 있다.
 
노란색의 달콤한 시나노 골드.
 노란색의 달콤한 시나노 골드.
ⓒ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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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내가 특별히 아껴 먹는 감홍 사과와 외국 품종인 엔비도 더해야 한다. 이 두 품종은 한우로 치면 안심처럼 특별한 부위다. 특별 부위답게 가격도 특별해서 한 번 사려면 큰 맘 먹어야 하지만 그래도 한 번 정도는 그 정도로 손을 떨어가며 사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남편은 새콤한 홍옥을 좋아하는데 예전엔 흔하고 쌌다지만, 지금은 잘 나오지 않아 사려면 시장을 뒤져야 한다. 가격도 숨이 턱 막힐 정도다. 11월이 되면 부사가 깔리기 시작하고 다른 사과들은 슬슬 자취를 감춘다. 부사가 나올 때 즈음이 되면 나는 사과에 대한 흥미가 점차 없어진다. 하지만 부모님 세대에서는 사과하면 여전히 부사다.

이렇게 다양한 품종을 한 번씩만 맛을 본다 해도 어느새 가을이 훌쩍 지나 겨울이 되어 버린다. 게다가 사과는 한 알씩만 살 수 없으니까 남은 사과는 계속 냉장고를 차지하게 되고 결국 그것들을 처리할 방법을 이리저리 궁리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안 만들던 잼을 만들기도 하고 파이니 파운드 케이크니 하는 것도 건드려 보게 된다. 서양 사람들이 이런 이유로 사과 파이를 만든 건 아니겠지만, 사과가 흔하니 파이 재료로 썼을 거다. 그런 이유로 나도 2~3년 전까지만 해도 사과를 이용해서 각종 베이킹을 시도해 보기도 했다.
 
사과 파이는 미국의 상징이라고 한다. 사과가 값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이니 그럴 것이다.
▲ 애플파이 사과 파이는 미국의 상징이라고 한다. 사과가 값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이니 그럴 것이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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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지만 맛은 덜한 외국 사과들

재래 시장만 가도 어느새 이렇게 사과 종류가 많아진 걸 보고 있노라면 싱가포르에 살던 시절 마트에서 사과를 고르던 때가 떠오른다. 그곳 사과는 모두 수입된 것이라서 당시 한국에서는 알지도, 듣지도 못한 외국 품종들 뿐이었다.

파란 것이 아오리를 닮았구나 싶으면 그래니가 어쩌구 하는 이름이었고(그래니 스미스 Granny smith), 빨간 사과도 종류가 많아서 레드 딜리셔스(red delicious), 핑크 레이디(pink lady) 등 각기 기억하기도 힘든 이름들을 가지고 있었다. 예쁜 이름이나(핑크 레이디, 레드 딜리셔스, 허니 크리스피) 새빨간 겉모습만 보면 정말 맛있을 것 같지만, 막상 먹어보면 그 중에서 진짜 맛있는 사과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는 것만 기억난다.

이상하게 그것들은 대부분 수분이 적고 그다지 달지도 않았다. 백설공주가 먹었던 것 같은 새빨간 사과는 특히 맛이 없었다. 아마도 그래서 베이킹에 적합한 재료인가 보다. 외국에서도 역시 맛있는 건 일본산 후지(한자로 치면 우리나라 부사와 같다) 사과였는데 아마 우리나라 부사 품종이었을 것이다. 가격이 비싸 단 한 번도 사 먹을 엄두를 못 냈다.

그러던 중 여전히 비싸긴 하지만 후지보다는 싸면서도 우리나라 사과 맛을 떠올리게 하는 사과가 있어 한 번 사 봤다. 그게 바로 엔비(Envy)였다. 처음 먹어 본 엔비는 얼마나 맛있던지 한국에 돌아와서도 유일하게 그리워했던 외국 사과가 엔비였다.

그러던 것이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엔비 품종을 키우는 게 가능해져 이제 여기서도 엔비를 살 수 있다. 비록 처음 먹었을 때만큼 감동적인 맛은 아니지만, 엔비 역시 감홍과 더불어 내가 1년 동안 손꼽아 가을 사과를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다.

외국 살던 시절, 사과를 사면서 딱 하나 좋았던 건 쌌다는 거다. 맛은 좀 떨어졌지만, 가격 하나만큼은 저렴하니 싸게 비타민을 보충한다는 생각에 잔뜩 사서 부담 없이 먹곤 했다. 그러다가 질리면 잼도 만들고 파이도 구웠다.

예전엔 우리나라에서도 그랬다. 남편은 지금도 어린 시절 만화책을 보며 시어머님이 바구니 가득 담아 주신 홍옥을 하나씩 먹어치우던 추억을 이야기하곤 한다. 슬프게도 사과가 그렇게 저렴한 과일이던 시절은 이제 갔다.

요즘 과일은 '金일'

추석 전 경동 시장을 갔다가 홍로 3개를 만 원에 파는 걸 보고 기절할 뻔했다. 물론 그 홍로는 차례용인 듯 아주 크고 모양도 예뻤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과 3개에 만 원은 너무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 정도면 사과가 아니라 배 가격이다.

하지만 사과는 가장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과일이 아닌가? 막 나온 홍옥도 만 원에 7개가 가장 싼 가격이었다. 도매 시장이라는 경동 시장에서 가격이 그 정도이니 마트 물가는 안 봐도 뻔했다.

세계 이곳저곳에서 과일을 좀 먹어 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한국 과일이 세계 제일까지는 아니어도 분명히 맛있는 측에 속한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도매 시장에서조차 살까 말까 지갑을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며 망설이게 하는 가격도 세계 제일이 아닌가 싶다.

이런 가격 구조는 과연 제대로 된 걸까? 과일을 사며 상인들에게 물어보면 날씨 탓, 인건비 탓을 한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언제나 무슨 이유가 있다. 결론은 가격은 오르기만 할 뿐 내리지는 않는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렇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다 인플레를 겪고 있다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먹거리에 관한 체감 물가 오름새가 극심하다.

그날 경동 시장에서 장을 보며, 몇 년 전 싱가포르의 대형마트에서 산처럼 쌓여 있는 각종 미국 사과들을 부담 없이 골라 비닐백에 담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 시절 사과는 정말로 서민의 과일이었다. 부담 없이 집어 먹고 남으면 디저트용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지금 사과는 한 알 사면 과육의 작은 한 조각도 허투루 버리면 안 될 것 같다. 과일이 아니라 '金일'이다. 가을은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라고 하지 않던가? 언제부터인가 우리 밥상 물가는 가을이 왔다고 해서 풍성해지지 않는 것 같다.

냉장고에는 아직 친정 아버지가 보내 주신 얼음골 사과가 아직 꽤 남아 있다. 추석 연휴 내내 여행을 다녀왔더니 아직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다. 하나 깎아 먹어 보니 시간이 꽤 지난 탓인지 과육이 퍼석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귀한 사과가 아깝게 그냥 맛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도 옛날 이야기를 하며 투덜거리는 건 그만두고 사과 맛이 더 가기 전에 빨리 하나 더 깎아 먹어야겠다.

**홍로 : 국내 육성된 최초의 사과 품종. 스퍼어리 블리어리와 스퍼 골든 딜리셔스를 교배하여 얻은 얻은 품종이다. 1988년에 추석기 출하용 품종으로 인정받았다.

**시나노 골드 : 10월에 출하되어 다음해 7월까지 유통된다. 일본에서 시작했으나 미국과 뉴질랜드에도 많이 재배되고, 지금은 우리나라 유명 사과 산지에서도 많이 키우고 있다. 중대형 크기로 맛은 달콤하면서도 시큼 아삭하다. 꿀과 바닐라를 섞은 듯한 달콤한 향이 특징이다.

**양광 : 골든 딜리셔스 자연교잡을 통해 선발된 사과 품종. 일본에서 육성하여 1981년 품종등록을 하였고, 우리나라에는 1983년 들어왔다. 10월에 출하되며 조직이 단단하고 맛이 좋다.

**후지(부사富士) : 사과 산지로 유명한 일본 아오모리현 후지사키정에 위치한 원예시험장에서 개발된 품종이다. 기존 품종인 국광과 레드 딜리셔스를 교배해 개발한 품종으로 단맛이 많고 신맛이 적으며 저장 기간도 길다.

태그:#사과, #물가, #홍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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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랫동안 내가 좋아하는 것, 진심을 다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있습니다. 내 몸과 정신을 적시는 모든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글쓰기를 통해 이런 '나'를 표현하는 방법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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