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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발굴 현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4년부터 진행한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 느낌 등을 한 주에 한 편씩 전할 계획이다. 잘못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고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실과 화해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기자말]
[다시 만날 그날까지⑩] 한국전쟁 당시 자행된 민간인 학살, 피카소 붓을 들게 하다 (https://omn.kr/26c7l)에서 이어집니다. 

신천학살 사건의 전모, 누가 조사하였나

북한 외무상 박헌영이 1951년 4월에 유엔(UN)에 문제를 제기한 영향인지 모르지만, 같은 해 5월 국제민주여성연맹 조사단은 신천학살을 비롯한 북한 지역에서 발생한 잔혹 범죄 행위를 현장 조사한다.

18개국 여성들이 조사단을 꾸렸는데 여기에 참가한 여성들은 미국, 유럽, 아시아, 태평양, 아프리카 등 유엔군에 참가한 나라를 포함해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국제민주여성연맹 조사단
 국제민주여성연맹 조사단
ⓒ 우석대학교 김태우 교수 심포지엄 자료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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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단은 미군과 한국군이 일시적 점령기 동안 노인부터 아동에 이르기까지 시민 수천, 수만 명을 고문하거나 살해했고, 이들은 범죄로 인한 조사나 판결도 받지 않은 채 살해되었다고 보고한다.  

또 다른 조사단 국제민주법률가협회는 보고서에 대량 학살과 같은 잔혹 행위뿐만 아니라 화학무기 사용과 세균전에 관한 내용까지 기술한다.

우석대학교 동아시아평화연구소가 2021년 발표한 '6∙25전쟁과 이북지역의 민간인 학살'에 따르면, 1951년 9월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작전 상황에서 특정한 병원체가 세균전에 얼마나 효과적인지 대규모 실전 테스트 실시 명령을 내렸다.

국제 조사단 두 기구가 신천학살 뿐만 아니라 북한 전체 학살지를 조사하여 객관적이고 정확한 조사와 자료를 볼 수 있게 했다는 사실에 필자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남한 정부는 국내외 대학살 사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는 데 급급했을 뿐만 아니라 미군에 자국민을 학살하라고 묵인하고 작전권까지 넘기지 않았나. 

신천학살의 전모 증언한 황석영 작가와 유태영 목사

황석영 소설가는 미국에서 유태영 목사를 만나 신천학살에 대한 전모를 듣게 된다. 할아버지 고향이 신천이기도 한 황석영 소설가는 장편소설 <손님>을 통해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군에서 벌어진 역사적 비극과 아픔을 세상에 알린다.

황 작가는 이 소설을 쓴 뒤 남과 북의 국가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는 당국의 허락을 받지 않고 북한에 다녀온 죄로 오랫동안 해외를 떠돌다가 1993년 귀국했으며, 귀국 즉시 투옥되었다가 1998년에 석방되었다. 1989년 방북 이후 10년 가까이 작품을 쓰지 못했던 그는 2001년 5월이 되어서야 소설 <손님>을 출간하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 류요섭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인 유태영 목사는 신천이 고향이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유태영은 19세 때 평양에서 공부하던 중 전쟁이 발발하자, 신천에 돌아와 인민군 징집을 피해 장독에서 숨어 지냈다.

형 유태연은 기독교청년단(우익치안대)을 주도해 공산주의로 의심되는 사람들 학살에 적극 가담한다. 그리고 두 형제는 1951년 1∙4 후퇴 때 누나, 조카, 형수를 남겨두고 남한으로 이주하여 10년간 한국에 살다가 1960년대 미국으로 이민 간다.

그 후 40여 년의 세월이 흘러 1999년에 북한을 방문했더니 누나와 형수 모두 살아있었다. 북한이 가족에게 보복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상 밖이었다.

유태영은 북한 당국과 남한의 기독교인이 취한 태도가 다르다고 했다. 그는 우익치안대 가족을 보살펴준 북한에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반면 학살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남한 기독교인의 태도를 지적했다.

유태영은 "남한 기독교가 학살에 대해 죄의식도 가책도 후회도 없이 살아오고 있는 것"을 밝히고 싶어 전 민간인 학살사건 조사팀장이었던 한성훈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에게 증언에 응했다고 한다.
 
황해도 신천학살조사는 국제민주여성연맹조사단이 촬영한 학살지 현장 모습
 황해도 신천학살조사는 국제민주여성연맹조사단이 촬영한 학살지 현장 모습
ⓒ 학술대회 자료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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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학살과 북한의 신천학살, 무슨 관련이 있나

남한의 언론과 연구자 중에는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작품이 신천 학살이나 대전 골령골 학살의 배경으로 그렸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제법 있다. 

피카소는 1950년 9월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1951년 1월 18일 '한국에서의 학살' 작품을 완성한다. 신천학살은 1950년 10월 17일~12월 7일까지(52일간) 벌어졌다.

당시 주한미국대사관 소속 육군 무관 에드워드(Bob,E Ecsards)는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 보고서'를 1950년 9월 23일에 미 육군 정보부에 보고한다. 또 당시 영국 특파원 기자 앨런 위닝턴은 대전 골령골 학살 현장의 모습과 과정을 낱낱이 사진으로 촬영한다.
 
미군이 대전 골령골 학살지를 감시, 감독하는 모습과 당시 앨런 위닝턴이 촬영한 카메라
 미군이 대전 골령골 학살지를 감시, 감독하는 모습과 당시 앨런 위닝턴이 촬영한 카메라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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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골령골 집단학살 당시 영국 특파원 기자 앨런 위닝턴 입고 있던 상의와 모자
 대전 골령골 집단학살 당시 영국 특파원 기자 앨런 위닝턴 입고 있던 상의와 모자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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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진들은 사실을 토대로 현장에서 촬영돼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가능한 많은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판매용 팜플렛 형태로 발행하기 위해 세상에 공개되기까지는 시일이 걸렸다고 한다.

반면 신천학살은 박헌영 외무상이 1951년 4월 유엔에 미군의 신천학살에 대한 잔혹 행위를 문제 제기하면서 세상에 알려진다. 신천학살이 세상에 공개되기 전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은 완성된다.

제목은 한국전쟁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피카소는 하나의 사건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실상 행위 자체를 포괄적으로 고발함으로써 평화에 대한 그의 염원을 총체적으로 표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한미국대사관 육군 에드워드 중령 작성한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 보고서' (대전 골령골 벽보)
 주한미국대사관 육군 에드워드 중령 작성한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 보고서' (대전 골령골 벽보)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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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닝턴의 기사 내용
 위닝턴의 기사 내용
ⓒ 대전골령골 벽보 사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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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짐작해본다.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작품이 신천학살이나 대전 골령골 학살의 배경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피카소는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 9월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딱히 날짜가 맞진 않지만, 피카소가 '한국에서의 학살'을 완성한 게 1951년 1월 18일이다. 피카소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한국전쟁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고, 프랑스 진보언론 <위마니테>나 프랑스 공산당 측에서 정보를 받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미술평론가 알프레드는 '한국에서의 학살'이 공산주의의 선전에 사용될 목적으로 그려졌고 반미 선전의 작품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림으로 한국전쟁의 민간인 학살을 세상에 고발하고 미국과 촉각을 세우며 대응한 그 용기와 대담성은 존경하고도 남을 만하지 않을까.

남과 북의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사건 처리 방법

북한은 신천학살이 우익치안대와 미군의 합작품임에도 인민재판에서 우익치안대 4명만 처벌하고 사건의 전모를 접는다. 한편 신천학살의 모든 책임이 미군에 있음을 주장한다.

북한은 대내외적으로 우익치안대의 활동을 광범하게 알리는 것 자체가 정권 입장에서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었다고 한다. 또 신천박물관은 전시와 사상과 교양의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특히 신천학살 피학살자의 죽음을 국가 차원에서 애도함으로써 구성원들의 집단정신을 고양하는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반면 남한은 보도연맹원, 부역혐의, 정치범, 독립운동가 등 학살 당한 자의 유족을 보호하기는 커녕 가해자 은폐에 급급해, 73년이 넘도록 '가해자 없는 피해자만 남아 있는 형국'이다.

피학살자 가족은 연좌제로 평생을 감시받고 멸시당하면서 살았다. 이제라도 제노사이드에 동조하고 명령에 충성했던 자들이 남은 인생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진실을 밝혀 주길 바란다.

세계사적인 제노사이드나 한국의 제노사이드, 그 뒤편에는 대부분 제국주의 국가가 관련되어 있다. 약소국의 비애를 느끼게 한다.

피카소의 세 반전 작품 중 두 작품(게르니카, 시체구덩이)은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무고한 시민의 죽음이라는 인류의 가치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라는 걸 그림으로 고발하고 경종을 울리게 했다. 피카소의 사상과 마음이 따뜻하고 아름답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나머지 한 작품인 한국에서의 학살은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극동의 작은 나라, 한반도에서 일어난 국지전 성격의 한국전쟁을 피카소가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냉전 시대의 희생양이었던 한국전쟁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에서 비롯된 비극임을 작품에 잔뜩 담아 주었다.

3대 반전 작품의 특징을 살펴보면 게르니카와 시체구덩이는 흑백 유화 작품으로 완성하였지만, 한국에서의 학살은 초록과 황색의 색채로 표현해 '평화와 희망'을 더욱 강조했다.

미국이 자신의 작품을 인정해준 전시장 거래처에 대해 금지령을 내리고 신변을 위협 받으면서까지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린 피카소의 예술가로서 대담성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끝으로 우리나라는 이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섰다. 인권 문제를 대하는 자세도 인권 대국의 대열에 우뚝 설 수 있어야 진정한 선진국다운 국격이 갖춰질 것이다.

12화 아산 설화산 편이 계속 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입니다.


태그:#신천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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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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