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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발굴 현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4년부터 진행한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 느낌 등을 한 주에 한 편씩 전할 계획이다. 잘못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고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실과 화해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편집자말]
[다시 만날 그날까지⑫] 설화산에 젊은 어머니와 아이들의 울부짖는 소리(https://omn.kr/26fau)에서 이어집니다.

충남 아산 지역에서는 1950년 9월 말경 부역혐의자들의 학살이 자행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51년 1.4 후퇴 전후로 부역혐의자 가족들을 학살하기에 이른다. 설화산 피학살자 208구 중 남자 23구이다. 남자들은 온양경찰서로 잡혀간 후 며칠간 구금됐다가 집으로 보낸다. 

'속리산 구경시켜줄 테니 집에 가서 먹을 것 준비해 오라'고 했단다. 그 길로 집에 가서 도시락까지 싸 들고 다시 경찰서로 갔는데, 이들은 그곳에서 바로 설화산 학살지로 끌려갈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을 것이다.

설화산 수직 금광(가로 3m 세로 6.5m)에는 시신이 바닥층부터 차곡차곡 포개져 5층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각 층 사이에는 마사토와 진흙, 잡석과 짚이 채워져 있었다. 바닥층과 4층에서 불에 그을린 뼈들이 일부 확인되기도 하였다.

관자놀이에 꽂힌 나무... 끔찍한 유해 상태
 
 
관자놀이에 나무가 꽂혀있는 모습과 총상 흔적이 남아 있는 머리뼈
 관자놀이에 나무가 꽂혀있는 모습과 총상 흔적이 남아 있는 머리뼈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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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위별로 분류된 유해들과 하나씩 떨어진 치아들
 부위별로 분류된 유해들과 하나씩 떨어진 치아들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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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산 전체 발굴된 유해 208구 중 여성 유해는 61%인 127구이었다. 마을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이들은 배방동 금곡초등학교에 갇혀 있다가 중리마을에 있는 금방앗간에 2~3일간 감금됐으며, 이후 설화산으로 끌려갔다. 하얀치마 입은 어머니와 아이들이 함께 끌려갔다고 한다.

학살 당시 나무가 관자놀이에 꽂혀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날의 끔찍한 장면을 짐작해본다. 당시 결혼한 여성들이 꽂은 은비녀와 은반지 쌍가락지 4혈 단추 등이 쏟아져 나왔다. 어머니들의 연령은 18세~24세가 가장 많았고 25세~29세, 40~49세, 50세 이상 순이었다.
 
필자가 발굴한 비녀의 모습과 은비녀들(기혼자들이 사용)
 필자가 발굴한 비녀의 모습과 은비녀들(기혼자들이 사용)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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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남녀 상의 4혈(穴) 단추 모습과 발굴 현장 드러난 유해와 유품들의 모습
 성인 남녀 상의 4혈(穴) 단추 모습과 발굴 현장 드러난 유해와 유품들의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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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스런 은반지와 특별한 꽃무늬가 새겨진 쌍가락지
 고급스런 은반지와 특별한 꽃무늬가 새겨진 쌍가락지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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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된 은비녀와 옥비녀 그리고 반지, 쌍가락지 등 유품들을 살펴보면 가정형편이 상당히 유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역혐의자로 잡혀가 학살된 시아버지, 아버지, 삼촌, 오빠 등도 비슷한 가정형편이었을 것이다.

반지도 아주 고급스러운 모양이고, 쌍가락지도 꽃무늬로 아주 예쁘고 세련됐다. 결혼한 여성이 꽂는 비녀도 보통의 비녀보다 고급스럽고 귀티가 난다. 4혈 단추도 일반인은 하얀색인 데 갈색 등으로 좀 더 세련돼 학살된 이가 부유층으로 추정된다.
 
 어린아이들의 머리뼈 모습, 어린아이들의 치아 조각들(치아의 길이와 크기로 나이 구별함)
  어린아이들의 머리뼈 모습, 어린아이들의 치아 조각들(치아의 길이와 크기로 나이 구별함)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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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손가락뼈와 발가락뼈, 등뼈와 갈비뼈
 어린이 손가락뼈와 발가락뼈, 등뼈와 갈비뼈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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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산의 유해발굴 208구 중 어린아이 유해는 58구(28%)였다. 머리뼈도 조그만 해  애틋하게 보인다. 세상에 빛도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살해되었다. 치아의 길이로 나이를 구별하는 데, 치아의 길이가 매우 짧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갈비뼈와 등뼈는 너무나 작아 보인다.

특히 어린아이의 장난감인 구슬과 청동제로 만든 종은 상당히 귀하고 중요하다. 어느 발굴장에서도 볼 수 없는 유품들이다. 아이들이 구슬치기로 놀면서 쪼그리고 앉아있는 모습과 작은 손으로 구슬을 굴리는 모습이 떠오른다. 아이들의 신발도 한 짝은 가죽신, 한 짝은 고무신 끈 달린 귀여운 신발이다. 형태가 그대로인 것을 보니 가슴이 아프고 눈에 아른거린다.
 
어린아이 청동제 종과 구슬 장난감 출토와 어린아이들의 구멍 없는 단추 모양
 어린아이 청동제 종과 구슬 장난감 출토와 어린아이들의 구멍 없는 단추 모양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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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신발 모습과 어른들의 귀이개와 어린아이들의 귀이개
 어린이 신발 모습과 어른들의 귀이개와 어린아이들의 귀이개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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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엄마 품에서 또는 엄마 등에 업혀서 아니면 엄마 손을 붙잡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울음소리가, 눈꽃 속에 가려진 설화산 골짜기에 메아리가 되어들리는 듯 하다.

설화산 발굴지 토질은 모래와 흙이 섞인 마사토였기에 물이 잘 빠지는 지형이다. 때문에 유해나 유품들이 양호한 상태로 보존된 듯하다. 개체수의 형태를 모두 맞출 수는 없지만 뼈조각들이 낱낱이 부위별로 많이 출토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간단한 헌화의 모습과 간단한 제례를 모시는 모습
 간단한 헌화의 모습과 간단한 제례를 모시는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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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많은 40일간의 설화산 발굴작업을 무사히 마무리하였다. 발굴을 마친 후 발굴장에는 헌화와 간단한 제례를 올렸다. 아산시 배방동 설화산 발굴을 마치고 내려와야 하는데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1~2년만 있으면 초원으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교훈의 장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영령들은 설화산 골짜기에서 눈과 비를 맞으며 온갖 풍파 속에서 67년간 백골로 떠돌다가, 40일간의 발굴작업을 끝으로 세종추모의 집에 모셔졌다.
   
설화산 발굴장 입구에서 마지막 기념사진과 설화산 208구의 유해와 유품을 상자에 보관한 모습
 설화산 발굴장 입구에서 마지막 기념사진과 설화산 208구의 유해와 유품을 상자에 보관한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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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은 왜 붉은 피로 물들었나

대전유족회장 전미경 작

일제 삼십 육년 해방가를 부르며 봄인가 했더니
하룻밤 꿈이었나
동족상잔 전쟁이 웬 말이요
오뉴월 뙤약볕 아래 피땀 흘려 기른 곡식
식솔들 주린 배 채워 줄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추럭에 실려 성재산 방공호에서
머리에 가슴에
총구멍 뻥뻥 뚫려 붉은피 쏟으며
황천길이 웬말인가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만삭의 어머니
그리고 열 식구 몰살

용암처럼 펄펄 끓어오르는 분노
가슴속에 불덩이 홀로 쓸어안고
끝내 저세상 가신 아버지
이 나라의 국민임을 인정하는 도민증을
어찌하여

저승가는 살생부로 악용했더냐
남녀노소 젖먹이 영유아까지
두 손은 새끼줄에 묶은 채
몽둥이 찜질에 전기고문 생매장까지
고문 방법도 쪽발이 한테 배운 그대로
탕정면 뒷산 방공호 속에 널브러진
매곡리 주민들

세상이 망해도 용서 못 할 인간 백정들의 살인 축제
내 동포 형제를 이유도 없이 척살하는
저기 저것이 사람이냐 짐승이냐
부역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돌 반지 끼고
엄마 등에 업혀
설화산 방공호 속에 죽은 아가야
서러워 울지 말고 다음 생애는 동족상잔
비극 없는
세상에 환생하여 천수를 누리거라
민중의 지팡이로 세워진 경찰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러 아산 땅 골짜기마다 핏빛으로 물들이고

쇠판이골 염통산 방공호 폐금광에서
눈보라치는 엄동설한 주린 배 움켜쥐고
언 발 동동 구르며
오늘은 고모 집으로 내일은 삼촌 집 문전으로

하늘에 땅에 소리쳐 불러도
대답 없는 아버지 어머니
저 피맺힌 고아들의 통곡 소리 들리는가
원통해 저승길 못 가고 흐느끼는 원혼들
하루아침에 온 가족을 몰살시킨 천인공노할 만행을
하늘이여 하늘이여 어찌하오리까
 
역사의 한 축으로

어느 발굴장이나 참혹하지 않은 지역은 없다. 그러나 필자는 설화산 발굴장이 가장 충격적이고 잔인한 발굴장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특히 가족 모두가 몰살당해 사연도 거의 없고 부모나 자식, 형제도 남아 있지 않아 (증언해 줄) 유족들이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인간이 태어나면 대대손손 후손을 남기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거늘, 집안이 몰살당해 후손이 끊긴 것이다. 과연 이념이 무엇이길래 인간의 생명과 자연의 섭리와 이치까지도 단절시켰을까. 이러한 행위는 혈통의 싹을 자르는 것이다.

필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증언이 담긴 엘리 위젤의 <나이트>와 에디트 에바 에거 <마음 감옥에서 탈출했습니다>를 보면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극이 떠오른다.

"유대인은 아리안의 땅에 우리와 인종이 다르다." 나치는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혈통의 싹을 자르기 위해 '뉘른베르크 법'을 만들어 여성에게 강제적으로 불임수술을 시켰다. 나치의 무도한 행위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행되었다. 그러나 독일은 나치 대학살극을 국가 차원에서 사과하고 반성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와 부헨발트 수용소도 기념관으로 보존, 관리하여 역사의 한 축으로 남아 있다. 훌륭한 관광지로 거듭나 예약하지 않으면 방문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기 관광지가 되었다.

암흑의 역사는 수치가 아니라 '미래의 등불'이다. 이것은 독일의 또 다른 저력이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독일처럼 '인권 문제'로 접근하여 국가가 사과하고 반성해야 한다. 또 전국의 집단학살지 532지점을 발굴하여 유해와 유품을 기념관에 보존과 전시하여 '역사의 한 축으로' 남기길 바란다.

끝으로 유해 발굴에 적극적인 지원을 해준 오세현 전 아산시장과 이창규 전 아산시 부시장께 감사를 표하고 싶다. 
 
유족들을 위로하는 이창규 전 아산시 부시장
 유족들을 위로하는 이창규 전 아산시 부시장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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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세종시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입니다.


마음 감옥에서 탈출했습니다 -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내면의 빛을 보는 법에 대하여

에디트 에바 에거 (지은이), 안진희 (옮긴이), 위즈덤하우스(2021)


나이트 - 개정판

엘리 위젤 (지은이), 김하락 (옮긴이), 위즈덤하우스(2023)


태그:#설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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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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