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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인 판사 A와 점심을 먹을 때의 대화다. 메뉴는 깔끔한 바지락갱국이었다.

"제가 아는 대학동문 선배님 딸이 이번에 OO로스쿨 졸업하고 @@로펌(3대 로펌 중 하나)에 들어갔는데... 참 교육 잘 시켰죠?"
"그 선배는 어디 근무하는데..."
"아! 그 선배님도 △△법원에 근무하시죠. 잘나가는 부장판사로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살짝 배가 아파왔지만, 음식 문제는 아니었다. 며칠 전 친구와 저녁 만남이 떠올랐다. 친구는 큰딸이 대학을 졸업하고도 몇 년 동안 취준생의 신분이어서 걱정스럽다는 얘기를 했다.
 
"처음에 5급 공채로 바뀐 행정고시 준비한다고 했다가, 잘 안되어서 지금은 7급 공무원 준비하고 있는데... 그것도 쉽지 않은가 봐."
"그렇지. 각종 고시나 공무원 시험도 경쟁률을 생각해보면 만만한 게 하나도 없지. 다들 몇 년씩은 준비해서 운 좋게 합격하는 거지."

 
"신림동 갔다가, 학교 고시반에 있다 다시 노량진으로 옮겨서 공부하다 지금은 집 근처 스터디카페에서 인강으로 공부한다고 하는데, 가끔씩 밤늦게 보면 안쓰럽더라고..."
"그러니까. 우리 공주님 속은 오죽하겠어! 가뜩이나 비교하기 좋아하고 내보이기 쉬운 한국 사회에서... 여러 친구들 집에서 다들 난리네."

 
우리 인생에 오답(정답)노트는 있을까?
 
우리 삶에 오답노트가 필요 있을까? 오답노트는 학창시절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준비할 때 틀린 문제를 기록하고 반복하는 비장의 무기다. 정해진 범위 내의 지식과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시험이라면 당연히 오답노트가 빛을 발한다. 오답을 확인하는 것은 계속 틀리는 문제와 잘못된 이해를 수정하는 최적의 비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의 오답노트는 없지 않을까? 왜냐하면 오답은 정답을 전제로 존재하고, 그 정답과 오답 사이에는 명확한 판단기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의 삶은 정답이 존재하는 문제보다 훨씬 복잡한 상황이 존재하고, 객관적으로 명확한 성패의 판단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은 '소수의 성공과 다수의 실패(라는 판단)' 속에서 꽃처럼 피고 진다. 소수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꽃길을 걷고, 다수는 패배의식과 자존감에 상처를 입고 살아간다. 사농공상의 유교적 관념이 깊숙이 뿌리내린 우리공동체에서는 유난히 성공하는 삶과 실패하는 삶에 대한 명암이 크다. 때문에 국가고시의 명성과 전문가 라이선스, 대기업 취업의 영광은 한 개인의 일생 동안 지속된다.
 
부모의 사회적 신분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직업적 세습을 하고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한참 동안 정국을 흔들었던 사건들의 중심에도 부모들의 욕망이 있다. 후배인 판사는 전문가 직역에 종사하는 이들이 자녀들의 교육과 직업에 더 열성을 보인다고 한다. 최근 들어 유독 적극적인 부모들이 많아졌다는 얘기를 한다. 대를 이어 판검사와 고위관료, 변호사와 의사를 하는 이들이 증가하는 것을 보면 한편으로는 부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그런 측면에서 평범한 부모들의 기본적인 지원 아래 자신들의 앞날을 묵묵히 키워나가는 수많은 젊은 친구들이 대견하다. 적어도 이 친구들은 부모의 배경이나 모종의 품앗이 없이 자기 인생의 성취를 자신의 노력과 만족에서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패에 대한 관용과 실패예찬이 필요한 시대
 
우리 사회의 빠른 성장과 경제적 성취의 이면에는 능력주의 세계관이 숨어있다. 그 기여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능력주의는 성적과 사다리, 자기계발과 기회로 만들어진다. 능력의 측정과 평가는 대학과 각종 고시, 대기업이나 공공기관 등의 공채로 나타나고 세태에 따라 변모한다. 지금은 서울의 아파트 소유와 주식이나 가상화폐로까지 그 능력이 확장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능력은 곧 사회적 계급이 된다. 그 능력을 쟁취하고 키우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학교 성적과 대학 이름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학력은 최고의 능력으로 인정받으며 SKY졸업자들은 한국사회의 주류임을 자처한다. 정·관·재계나 법조계 등 사회 모든 부분에서 학력과 학벌로 이루어진 끈끈한 사다리와 인맥은 부모에서 자식으로까지 이어진다.
 
우리 사회는 능력에 따른 과도한 보상을 당연하게 여기고 능력에 따른 차별과 불평등도 당연하게 여긴다. 능력이 부족하다고 평가되거나 경쟁에서 뒤처진 이들에게 형편없는 보상 또한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러한 시선으로는 정규직 근로자가 정규직이 되고자하는 비정규직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경쟁에서 탈락하거나 뒤떨어진 이들을 위해 갱생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도 납득하기 쉽지 않다.
 
실패에 대한 사회적 관용이 약하다보니 그 두려움에 대한 내성이 약하고, 누구나 반복되는 시행착오의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두려움이 반영된 경쟁상황은 온갖 (불법)지원와 비법이 동원되는 전면전과 같다. 무한경쟁 시스템은 결국 비정한 사회의 토대가 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공정경쟁과 무기평등, 합리적인 규칙과 선의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처럼 실패에 대한 방어시스템이 약한 사회는 위험사회의 가능성이 크다. 비통한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지원시스템이 없는 사회는 더 위험한 재앙사회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위험사회에는 패자부활전에 대한 제도적인 고려가 부족하다. 이 시점에서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실패에 대한 관용과 실패예찬이다.
 
다양한 패자부활전이 필요한 사회
 
수많은 패자부활전이 필요하지만 제도적 뒷받침은 가뭄에 콩 나듯 하다. 실직하거나 사업에 실패하면 경제적 신분은 급전직하 되어 나락으로 떨어진다. 일부 전문직과 기술직을 제외하고는 비슷한 레벨의 재취업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저서 제목이다. 큰 기업을 일으킨 창업주라 해서 실수나 실패가 없을 리가 없다. 이는 위대한 사업가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인드며 자신감의 표현일 뿐이다. 하물며 대부분의 평범한 개인의 삶속에는 사소한 실수부터 큰 실패까지 다양한 에피소드가 존재한다.
 
주위를 돌아보면, 실패하지 않는 삶은 거의 없다. 만약 존재한다면 그러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 특별히 배울 것은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인생의 가장 큰 교훈인 겸손을 배울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 대부분은 수많은 실패와 실수 속에서 성장하며 자신의 삶을 이끌어나간다. 어쩌면 실패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성찰의 계기가 될 수 있겠다.
 
실패는 도전과 기회의 또 다른 이름이다. 도전하지 않는 이들에게 실패가 존재할 수 있을까? 배는 항구에 정박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어떠한 위험이나 실패도 없다. 하지만 더 큰 바다로 나아가지 않는 배는 더 이상 '배'라는 자존감도 의미 있는 성취도 없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문제는 수많은 개인의 실패가 공동체의 실패로 끝나는 경우다. 이는 사회공동체가 개인들의 실패를 외면하고 방치할 때 발생한다. 현실 속 패자라 불리는 이들의 유형은 여러 평면위에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만큼 우리는 수많은 경쟁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살아간다. 개인들이 직면하는 위험상황을 극복하는 능력과 방법론은 그 한계가 분명하다.
 
결국 경쟁에 뒤처진 이들에게 패자부활의 장을 마련해주고 저마다의 능력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책임은 국가공동체에 있다. 그래서 승자독식의 공식을 깨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이 중요한 것이다.
 
공존공생을 위한 우리만의 다양한 <빅이슈>가 필요하다
 
홈리스들에게 일자리 기회를 제공하는 빅이슈코리아
▲ 빅이슈 잡지  홈리스들에게 일자리 기회를 제공하는 빅이슈코리아
ⓒ 빅이슈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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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는 홈리스(Homeless, 거리노숙, 비주택/비적정 주거 거주민 등의 주거취약계층)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잡지다. 홈리스들에게 스스로 일어설 기회를 주고, 노동의 가치를 깨닫게 하며, 정당한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존감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영국에서 1991년 사회적기업으로 시작한 빅이슈는 한국에서 빅이슈코리아로 뿌리내리고 있다. 빅이슈코리아 홈페이지의 첫 번째 보이는 문구는 "빅이슈의 미션은 빈곤해체입니다"이다. "당신이 읽는 순간, 세상이 바뀝니다"는 이들의 슬로건이다. 이 단체의 아이덴티티는 인간성의 회복과 주거취약계층의 존엄에 기반한 자립솔루션이다.
 
일정한 주거 공간 없이 빈곤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긍정적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사회경제적 해결의 기회를 제공함을 사명으로 한다. 다시 말해 빅이슈의 사명감은 패자부활전이라는 사회경제적 기회의 제공이다.
 
대부분의 사회보장제도의 근본취지는 사회경제적 약자에게 기본생계유지와 교육기회의 제공에 있다. 하지만 현실은 경제적 약자들이 제도에 쉽게 의존하다보니 사회적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는 역설이 발생한다. 빅이슈는 이러한 문제적 인식을 바탕으로 경제적 활동 기회 제공을 그 목표로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회생파산제도 또한 빅이슈 못지않게 패자부활전을 위한 기회제공 제도이다. 비록 기반이나 대상은 다르지만 분명 회생파산제도는 빅이슈의 의도와 닮아있다. 빅이슈의 활동을 통해 홈리스들이 경제적 갱생의 의지를 갖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처럼, 회생파산제도도 한계 채무자들에게 새출발을 위한 기회를 제공한다. 회생파산제도의 아이덴티티도 경제적 자유인으로서 자존감 회복과 경제적 약자들의 존엄에 기반을 둔 해법 제공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패자부활전이 자유로운 사회구조와 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 실패를 개인의 문제로만 보기보다는 사회나 국가 제도적 관점에서 살펴볼 때 실패한 이들의 삶이 더 자세히 보인다. 이를 개인의 실패로만 규정할 때, 사회적 책임에서 벗어난 국가와 법과 제도는 더더욱 개인들의 삶에서 멀어져간다. 무엇보다 개인의 시행착오를 실패라 규정하지 않고 다시 시도하고 일어설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인식이 절실한 때다.
 
그러한 인식개선과 더불어 능력주의를 보완하는 완충지대, 경제적 실패자들을 위한 완충지대를 만들어야 한다. 실패하거나 좌절한 그 상황에 머물지 않고 다시 출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해줘야 한다. 모든 개인의 실패를 국가나 제도가 떠안을 수는 없지만, 새롭게 시작하려는 의지가 있는 개인들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이 필요하다. 이는 결국 패자부활의 전초기지를 만들어 내는 법과 제도 설계의 문제이며, 기업이나 개인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회생파산제도는 그중 하나다.
 
카이스트에서 실패연구소를 만들고 실패주간을 선포했다는 소식
▲ 카이스트의 실패연구소  카이스트에서 실패연구소를 만들고 실패주간을 선포했다는 소식
ⓒ 카이스트 실패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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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재들의 학교라 불리던 카이스트에서도 '실패연구소'를 만들고 '실패주간'을 선포했다고 한다. 끊임없는 무한경쟁은 모두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뫼비우스의 띠를 제공한다. 이제는 그 무한궤도에서 벗어나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유연성과 크고 작은 실패로부터의 회복탄력성을 가져야 한다. 위대한 세상은 특별한 1인들이 아닌 공존 공생했던 수많은 이들이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회생법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태그:#실패예찬, #패자부활전, #빅이슈, #회생파산제도, #실패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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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교육원 교수를 거쳐 현장에서 밥벌이 중입니다. 부모와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을 꿈꾸고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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