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1월 3일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입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는데요. 1953년 '학생의 날'로 제정되었다가, 1973년 박정희 정부가 폐지했습니다.

학생들이 유신 독재에 반대하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벌였기 때문인데요. 그러다 다시 1984년 제11대 국회에서 '학생의 날'이 법정 기념일로 부활하였고, 2006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19년 3.1운동, 1926년 6.10만세운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3대 민족운동으로 손꼽힙니다. 당시 10대 청소년들이 세상을 뒤흔든 대사건이었습니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 사건을 계기로 촉발되어, 1930년 5월까지 전국과 간도, 미국, 중국 심지어 일본에까지 확산된 저항이자 독립운동입니다.

저항은 전국으로 퍼져 학생들의 동맹휴학과 항일 거리 시위가 이어졌는데요. 항쟁에 참여한 학교는 194개, 학생 수는 5만4000여 명이었습니다. 퇴학 처분자 582명, 무기정학 2330명, 피검자 1642명으로 수많은 청소년이 옥고를 치렀는데요.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 민족 저항과 분출이었습니다.
   
애국지사 강석원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 263호)
 애국지사 강석원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 263호)
ⓒ 임재근

관련사진보기

   
애국지사 장매성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 83호)
 애국지사 장매성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 83호)
ⓒ 임재근

관련사진보기

 
일제의 거듭된 차별, 저항 의식 싹트게 하다


대전현충원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가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분이 안장되어 계십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학생투쟁지도본부'를 조직한 강석원 지사가 독립유공자 1묘역 263호에, 장석천 지사는 독립유공자 3묘역 38호에 안장되어 계십니다.

항쟁을 이끈 성진회와 독서회 간부였던 김성환 지사는 독립유공자 3묘역 24호에, 송동식 지사는 1묘역 133호에 계십니다. 투쟁의 한 축에는 여학생으로 구성된 소녀회가 있었는데요. 소녀회를 조직한 장매성 지사는 독립유공자 2묘역 83호에 잠들어 계십니다.

또한 대전현충원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당긴 나주역 사건의 주인공이 함께 안장되어 계시는데요. 독립유공자 2묘역 893호 박준채 지사와 독립유공자 4묘역 206호 이광춘 지사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1920년대 전라남도에는 최고 교육기관이 두 군데 있었습니다. 일본인 학생을 위한 광주중학교와 조선인 학생을 위한 광주고등보통학교였습니다. 두 학교 학생은 마치 견원지간처럼 만나기만 하면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고등보통학교는 12세 이상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남성이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4년제로 출발하였다가 중간에 5년제로 바뀌었는데, 일본인이 다니는 중학교와는 학교 명칭과 배우는 과목에서 차별이 존재했습니다. 조선인에게는 실업교육을 가르쳐 하급 기술자로 양성하려는 일제의 의도였습니다.

1919년 5월 말 통계에 따르면,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 자녀의 진학률은 91%였고요. 조선인 자녀의 진학은 37%에 불과했습니다. 일본인 거주민 1만 명당 113명이 입학했지만, 조선인은 1만 명당 1명이었습니다.

일제의 거듭된 억압과 차별은 자연스럽게 조선인 학생 사이에 저항 의식을 싹트게 했습니다. 1920년대 학생들이 선택한 대표적인 저항 방식은 바로 동맹휴학이었는데요, 1921년 23건으로 시작한 동맹휴학은 1926년 55건, 1927년 72건, 1928년에는 83건으로 급속도로 증가했습니다.

동맹휴학의 원인으로는 1920년대 초반에는 일본인 교사가 저지르는 모욕적인 언사와 횡포가 많았습니다. 요구 조건으로는 설비개선, 교육 방법 및 교육과정의 시정, 일본인 교사 배척 등이 있었습니다.

1920년대 후반에는 동맹휴학의 성격이 변화했습니다. 식민지 노예 교육 철폐, 조선 역사 교육, 교내 조선어 사용, 언론 집회의 자유 등이 구호로 등장합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그렇게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1929년이 되어서도 학생들의 저항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일제와 학교 당국은 유시퇴학이라는 방법으로 학생들을 탄압합니다. 저항 의식이 높은 학생을 교장의 직권으로 퇴학시켰는데요. 광주에서도 교내 분위기가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1929년 3월 23일 광주고등보통학교 졸업식장에서 '광주고보 교장실 포위 사건'이 일어납니다. 유시퇴학을 당한 김봉길과 여도현이 '퇴학 처분 반대와 조선인 본위의 교육 실시' 등 내용을 담을 유인물을 나누어 주었고요. 교장에게 공개적으로 따져 묻자, 교장은 교장실로 숨어버리는데요. 이에 학생들은 교장실 문짝을 부수고 창문을 깨뜨리며 소동을 벌였습니다.

경찰까지 출동해 학생들은 연행되었고, 이윽고 징역형까지 선고받았습니다. 같은 해 6월 25일에는 5학년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동맹휴학에 들어갔습니다. 6월 26일에는 2, 3학년 학생들이 따라 수업을 거부했습니다.

6월 26일에는 '운암역 개고기 사건'이 벌어집니다. 당시 광주로 학교에 다니던 학생은 인근 지역에서 기차로 통학하는 사람이 많았는데요. 통학 열차 중 한 칸은 일본인 중학생을 위한 전용칸이었습니다.

기차가 운암역에 정차했을 때, 일본인 학생 곤도(近藤)는 창밖을 보며 "저것 봐! 개고기! 조선사람들이 즐겨 처먹는 개고기! 조선사람은 야만인이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일본에 대부분 식량을 강탈당하고 초근목피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가난에 못 이긴 일부 사람이 개고기를 먹곤 했습니다.

곤도(近藤)의 발언을 들은 조선인 학생 김기수 등은 모멸감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다른 조선 학생이 함께 곤도(近藤)를 구타하며 응징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렇게 조선인 학생의 분노는 폭발할 계기만을 찾고 있었습니다.
  
(좌)이광춘 지사 (우)박기옥 지사
 (좌)이광춘 지사 (우)박기옥 지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련사진보기

   
애국지사 이광춘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 206호)
 애국지사 이광춘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 206호)
ⓒ 임재근

관련사진보기


일본 학생의 조선인 희롱, 일본 경찰의 조선인 진압

이런 분위기 속에서 10월 30일, 드디어 '나주역 사건'이 발생합니다. 사건은 하굣길에 벌어지는데요. 광주를 출발한 기차가 나주로 향하던 오후 5시 30분 경이었습니다. 일본인 중학생 후쿠다(福田)와 다나카(田中)는 조선인 여학생 박기옥, 이광춘, 이금자 등 곁에서 시시덕거리며 희롱하고 있었습니다.

후쿠다(福田)는 박기옥에게 "'아이 러브 유'를 일본말로 뭣이라고 해석해요?"라며 희롱했고, 이광춘의 댕기를 당기며 "이것은 영어로 뭐라고 해?"라며 놀렸습니다. 여학생들은 분노를 삭이며 다른 칸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인 중학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주역에 내려서까지 여학생들을 따라와 찝쩍거리며 놀렸습니다. 후쿠다(福田)는 박기옥의 댕기를 낚아채듯 잡아챘는데요. 이 광경을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생이던 박준채가 목격했습니다. 박기옥의 사촌 동생이었던 박준채는 후쿠다(福田)에게 뛰어가서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후쿠다(福田) 너는 명색이 중학생인 녀석이 야비하게 여학생을 희롱해!"
"뭐라고? 센징노 쿠세니(조선놈 주제에)!"


어린 박준채는 '센징노 쿠세니'라는 말을 듣자, 이성을 잃을 정도로 흥분했습니다. 후쿠다(福田)의 멱살을 끌고 개찰구를 빠져나왔는데요. 당시 주변에 있던 광주고등보통학교 5학년인 김보섭과 최의선도 '센징노 쿠세니' 폭언을 듣는 순간 피가 역류하는 듯이 흥분해 달려왔습니다.

격분한 조선 학생들이 뛰어들었고, 주변 일본인 중학생도 합류해서 나주역 앞은 난투극이 벌어졌는데요. 일본인 중학생 50여 명과 조선인 학생 30여 명 간 백병전과 다름없었습니다. 당시 심정을 훗날 박준채 지사는 이렇게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나는 피가 머리로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가뜩이나 그놈들과 한 차에 통학하면서 민족 감정으로 서로 멸시하고 혐오하며 지내온 터인데, 그들이 우리 여학생을 희롱하였으니 나로서는 당연한 감정적인 충격이었다. 더구나 박기옥은 나의 사촌 누님이었으니, 분노는 더하였다. '조센징'이란 말이 후쿠다의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의 주먹은 그자의 면상으로 날아가 작렬하였다."
  
학생 시절 박준채 지사
 학생 시절 박준채 지사
ⓒ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관련사진보기

   
애국지사 박준채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 893호)
 애국지사 박준채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 893호)
ⓒ 임재근

관련사진보기

 
이때 일본인 순사가 난투장에 개입하며 상황이 정리되었는데요. 그런데 일본인 순사 모리다(森田松三郞)는 박준채의 목덜미를 후려갈기고 뺨을 때리며, 일방적으로 조선인 학생만 진압했습니다.

이를 본 조선 학생들은 '왜 한쪽만 때리는 거요?'라며 항의했지만, 노기등등한 순사는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일본인 학생들은 유유히 떠났고, 조선 학생들은 서러움과 분함 그리고 억울함에 눈물만 줄줄 흘리고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소식이 순식간에 나주에 퍼지게 되고, 조선인 학생 학부모들이 경찰서에 항의 방문하는데요. 이 자리에서조차 일부 학부모는 뺨을 맞았으며, 폭언과 욕설을 듣고 쫓겨납니다.

다음날인 31일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하굣길 통학 기차에서 주인공들이 다시 만나게 됩니다. 박준채는 후쿠다(福田)에게 당당하게 다가가 이야기하는데요.

"너 어제 우리 누나한테 희롱한 것 사과할 테냐 안 할 테냐?" 그러자 후쿠다(福田)는 이번에도 "건방진 자식!"이라며 박준채의 뺨을 후려갈겼습니다. 싸움이 커지던 찰나 이번에는 기차 차장이 싸움을 말리러 오는데요. 그 와중에 주변 일본인 승객들이 "조선놈들은 애새끼까지 저 모양이다", "센징 주제에 건방지다", "센징 학생들이 잘못했다" 등 폭언을 내뱉었고 박준채는 서러움과 모멸감에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1월 1일에는 일본의 반격이 이어졌습니다. 광주중학교 유도선생 이다(伊田)는 나주역 사건 복수를 하겠다며 30여 명 일본 학생들을 이끌고 왔는데요. 일본 학생들은 야구방망이와 죽창, 죽검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광주역 플랫폼에 매복해 있다가 이다(伊田)의 호각 신호에 일제히 돌격해서 조선 학생을 짓이길 계획이었는데요. 다행히 조선인 학생들이 먼저 낌새를 알아차렸고, 양 학교 선생님이 뛰어나와 충돌을 저지했습니다.

11월 2일은 토요일이었습니다. 광주시민 사이에는 '어제 광주에서 일본인 중학생과 조선인 학생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조선인 학생이 많이 다쳤다느니', '중학생이 칼질하여 조선인 학생 수 명이 부상을 입었느니' 등 소문이 퍼져 나갔습니다. 민족 차별에 억압당하던 조선인 사이에서는 무언가 '한바탕 터졌으면'하는 불안한 기대감도 감돌았습니다.

그리고 11월 3일이 되었습니다. 이날은 1월 1일, 기원절(紀元節), 천장절(天長節)과 더불어 일제 4대 국경일이었던 명치절(明治節)이었습니다. 일본 왕 메이지의 생일을 기념하는 날이었는데요. 공교롭게도 그날은 음력으로 10월 3일. 우리 민족 명절 개천절이었습니다.

조선인 학생은 우리 개천절은 기념하지 못하고, 일제 명치절 기념식에 끌려다녀야 하는 신세였습니다. 일본인에게는 축제 같은 분위기였고, 우리 민족에게는 더욱 서글픈 날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명치절 기념식에서 단체로 저항했습니다.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불러야 하는 순서에서 아무도 입하나 뻥긋하지 않았습니다. 침묵의 저항이었습니다. 학교 당국은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눈치챘습니다. 원래 단체로 신사 참배를 할 계획이었는데요. 개별 참배로 바꾸고 학생들을 서둘러 귀가시켰습니다.

이윽고 광주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조선인 학생과 일본 학생 간 충돌이 빚어졌습니다. 한 무리 학생들은 왜곡 보도를 일삼던 광주일보사로 몰려가 윤전기에 모래를 뿌렸고요. 광주 신사 앞 천변에서는 일본인 학생들이 조선인 학생에게 시비를 걸어, 조선인 학생 최쌍현의 얼굴을 단도로 찌르는 일이 벌어집니다. 광주역에서 양측 학생 200여 명씩 몰려와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하는데요.

오전의 충돌로 조선인 학생 10여 명이 부상당합니다.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 광주고등보통학교 조선인 학생들은 학교에 결집하여 향후 계획을 논의하는데요. '우리의 투쟁 대상을 광주중학생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로 돌릴 것, 적개심에 불타는 학생들을 식민지 강압 정책 반대 시위로 돌릴 것' 등이 논의됩니다.

오후 2시경 토론을 마친 학생 300여 명은 8열 종대로 스크럼을 짜서 교문을 박차고 나섰습니다.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광주농고, 광주사범학교 학생들까지 시위에 합류하며 대열은 끝없이 불어났습니다. 그 광경을 본 시민들은 각목과 장작을 가져다주며 환호했고요. 호떡 장사 아저씨는 호떡을 가득 가져와 나누어주고, 감 장수는 감을, 떡 장수는 떡을 나누어 주며 시위를 응원했습니다.

"신천지에 뻗어가는 우리 동포야,
길이길이 기다리던 오늘 왔구나
무등산서 길러낸 힘 힘껏 써보세."


그날 하루 광주 시내에는 천여 명이 넘는 학생 시위대 행진가와 만세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습니다. 그렇게 전국을 뒤흔든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한편 나주역에서 일본 학생에게 희롱당했던 이광춘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벌어지자 전면에 나서 투쟁했는데요. 11월 3일 시위에서 치마에 돌멩이를 싸 들고 와 시위에 가담했고요. 1930년 1월 13일 시험 시간이 되자 돌연 교단으로 올라가 백지동맹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붙잡혀 간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투쟁했습니다. 이광춘 지사가 선도해서 백지 시험지를 두고 교실을 뛰쳐나오자, 친구들이 동조했고 이윽고 전교생 집단으로 시험을 거부했습니다. 이광춘 지사는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고,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갖은 고초를 당했습니다.

박준채 지사는 1914년생입니다. 나라가 이미 강제로 병탄된 이후 태어난 세대로, 1929년 당시 16세에 불과한 청소년이었습니다. 당시 전국적인 항쟁을 지도했던 이들 역시 16~24세 청소년 청년이었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이래 단 한 순간도 자주독립 국가에 살아보지 못했음에도, 당시 청소년들의 민족혼은 시퍼렇게 살아있었습니다.

태그:#대전현충원, #학생의날, #광주학생독립운동
댓글3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전의 시민활동가입니다. 우리 지역 현장 곳곳을 다니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마이크가 필요한 분에게 마이크 드리는 것이 제 역할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