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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백범 김구.
ⓒ 백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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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원'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칠십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하여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達)하려고 살 것이다.

- <백범일지> '나의 소원' 가운데
  
이 글은 <백범일지> '나의 소원' 편의 앞부분이다. 나는 교단생활 33년 가운데 29년을 고교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다. 그 무렵 국어교과서에는 이 글이 줄곧 실려 있었다. 그래서 아마도 '나의 소원' 단원을 최소한 100번은 더 가르친 듯하다. 해마다 4학급에서 6학급의 수업을 담당했기에 20년만 추산해도 100번은 넘는다.

지금 회상해도 그때 나는 이 단원을 가르치면서 대단히 비분강개한, 때로는 그 말씀에 깊이 감동, 학생들을 가르친 듯하다. 그런 가운데 교단생활 말년에 고향 출신의 한 독립전사(허형식 장군)를 알게 된 이후, 시민기자가 됐다. 이후 백범 시해범 안두희를 10여 년 끈질기게 추적한 한 의인 권중희 선생을 만나 그 대담을 기사로 쓴 바 있다. 그때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백범암살 배후의 진실을 규명하고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치청(NARA)에서 가서 40여 일간 그곳 서고에 소장된 자료들을 두루 열람하기도 했다.

그 이후 아예 교단에서 은퇴한 뒤 중국대륙에 흩어진 항일유적지 답사를 4차례, 안중근 의사의 행적을 답사하고자 러시아 연해주와 뤼순 일대, 그리고 일본 여러 곳과 미국 버지니아 주 남쪽 군사도시 노퍽의 맥아더기념관도 두 차례나 둘러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런저런 이야기를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와 어린이 도서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을 펴내기도 했다.
   
북행길에 38선 표지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다(왼쪽부터 선우진 비서, 백범, 아들 김신).
 북행길에 38선 표지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다(왼쪽부터 선우진 비서, 백범, 아들 김신).
ⓒ 백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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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런 과정에서 효창동 백범기념관 문턱을 부지런히 넘나들면서 가장 궁금했던 '백범의 북행' 이야기를 듣고자 당시 백범을 수행하신 비서 선우진 선생, 그리고 아드님 김신 백범기념관 이사장님과 인터뷰하기로 약속까지 잡았다. 그런데 그 무렵 다른(작품집필) 일에 빠져 지내다가 두 분 모두 세상을 떠나 그 기회를 그만 놓쳤다.

그런 가운데 2018. 11. 금강산 뱃길을 다시 잇고자 마련된 남북민화협 연대 모임 때 당시 민화협 김홍걸 남측 상임의장의 배려로 김진 선생과 함께 동행,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게다가 2000년부터 올해까지 4년에 걸쳐 '민화협-롯데장학재단'이 주관하는 독립운동 유공자후손 장학시업에 같은 심사위원으로 돈독한 정의를 나눴다. 그때 김진 선생님에게 언제 한 번 뵙자고 제의를 드린 적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또 차일피일하다가 지난 11월 6일, 이종찬 광복회장을 뵙고자 광복회관에 찾아간 중에 바로 옆방에 김 부회장이 계시기에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 순간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라는 전과가 떠올라 지난 23일로 곧장 날을 잡았다. 약속한 그날 오후 3시 광복회 부회장실을 들르자 실내장식이 온통 백범 선생의 글씨, 글, 사진 등으로 도배됐다.
  
백범 장손자 김진 광복회 부회장
 백범 장손자 김진 광복회 부회장
ⓒ 광복회 임소희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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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민족밖에 모르는 우직한 촌부

대담에 앞서 백범 선생의 휘호 "민족정기(民族正氣)" 액자 밑에서 방문기념을 촬영하고 곧장 대담을 시작했다.

- 조부 백범 선생님을 뵈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제 어머님 말씀으로는 저를 배었을 때 의사가 진찰을 한 뒤 아들 같다고 하기에 그 말씀을 바로 전하자 할아버지께서 대단히 기뻐하셨답니다. 그 얼마 뒤 할아버지는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지셨습니다. 할아버지는 1949년 6월 26일에 돌아가셨고, 저는 그해 10월 30일에 태어났기에 어머니 뱃속에서 할아버지가 시해 당하시는 참변을 겪은 셈이지요."

- 부모님을 통해 들으신 , 또는 그동안 당신께서 느끼신 조부님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말씀해 주시면 어떤 분이셨습니까?

"저희 할아버지는 (권모술수에 능한)정치가가 아니라, 오로지 나라와 민족밖에 모르는 우직한 촌부(시골할아버지)였습니다."

그 순간 내 머리가 핑 돌았다. 내가 그분 행장을 집필할 때, 백범 선생은 '조선의 무명베'와 같은 분이시다. 그리고 당신은 암살범 안두희로부터 네 발을 총알을 맞은 바를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그 첫 번째 총알로 흘리신 피는 조국의 수호신에게 바쳤다.

그 두 번째 총알로 흘리신 피는 당신이 사지로 보낸 동지들에게 바쳤다.

그 세 번째 총알로 흘리신 피는 이 땅에 남아 있는 백성들에게 바쳤다.

그 네 번째 총알로 흘리신 피는 이 나라 후세들에게 남겼다.

- 박도 지음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중에서
  
백범 휘호 '민족정기'
 백범 휘호 '민족정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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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 선생의 말씀을 들은 뒤, 조금 전에 배경을 삼아 방문 기념촬영한 액자 속의 백범 휘호 글씨 왼쪽 끝 부분의 서명 글씨를 가까이 다가가 읽었다.

"대한민국 29(1947)년 6월 23일. 칠십이세 노부 백범 김구(七十二歲 老夫 白凡 金九)"

나는 순간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의 진품 '국부'를 만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아마도 나 같았으면,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라는 직함을 넣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그런 직함을 빼고 단지 '노부(老夫)'라고 썼다. 노부란 '늙은 지아비'란 말이 아닌가. 그 백범의 겸손함과 순박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아! 아! 백범, 당신은 순결한 이 겨레의 어버이이십니다."

(다음 회로 이어짐)

태그:#백범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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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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