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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깨기 전 거실에 설치한 크리스마스트리 전구에 불을 밝혀 두었다. 눈을 뜨면 내가 있는 방으로 쪼르륵 달려오던 여느 날과 달리 아이가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가 나고도 별다른 기척이 없다. 거실로 나가보니 눈을 반쯤 뜬 아이가 소파에 앉아 트리를 바라보고 있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초등학교 1학년인 딸아이가 종종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꺼냈다. 산타에게 어떤 선물을 받을까 고민하거나 언제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밀지 물었다. 그러다 우리 집에도 커다란 트리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선뜻 답할 수 없었다. 

아이를 위해 트리를 새로 사는 게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였다. 평소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데다 종교도 없고 나이가 들수록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도 시들한데 크리스마스 장식을 위해 돈과 시간을 쓰는 게 맞을까 회의적이었다.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던 마음
 
명동 신세계 백화점 앞은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져 길을 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 크리스마스 장식 명동 신세계 백화점 앞은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져 길을 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 김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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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하루는 엄마 아빠가 외출하신 날 언니와 동생들과 합심하여 창고에 있던 트리를 꺼내 장식한 적이 있다. 우리끼리 장식을 하고 작은 메모에 소원을 적어 매달았다. 외출에서 돌아오신 부모님은 그걸 보고 기뻐하셨고 어린 아이들의 행동이 기특했던지 다음 날 명동으로 데려가 선물을 사 주셨다. 

북적거리는 시내로 나간 일이 처음이라 거리를 가득 매운 인파와 끝없이 흘러나오는 캐럴에 눈과 귀가 휘둥그레졌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는 것만으로 발걸음은 이미 가벼웠는데 거리에 매달린 반짝이는 장식과 사람들 사이를 떠도는 흥겨움에 젖어 내 심장은 평소보다 크고 빠르게 뛰었다.

길 모퉁이마다 빨간 냄비를 앞에 두고 빨간 겉옷을 걸친 구세군의 손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둠이 내리자 건물 벽과 나무 위를 뒤덮은 알전구에서 불빛이 흘러나왔다. 빨강, 노랑, 초록의 빛으로 뒤덮인 도시는 동화 속 세상 같았다. 성냥팔이 소녀의 마지막 성냥 불빛에 떠오른 환한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크리스마스란 세상을 신비롭고 아름답게 채색하는 놀라운 날이라는 생각이 어린 내게 스며들었다.  

명동 성당에서 자정 미사까지 참여했던 그날, 미사의 대부분을 졸고 말았지만 하얀 미사포를 쓰고 두 손을 모은 채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평소 경험하지 못했던 숭고랄까, 고귀함, 인간의 아름다움 같은 걸 감지할 수 있었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장막 같은 게 드리워져 있어 대부분의 날에는 그 아래에서 일상의 나날이 흘러가지만 크리스마스 같은 날이면 막이 걷히고 감추어진 아름다움이 드러난다고. 평범한 세상과 사람들이 소중히 품고 있던 기쁘고 선한 마음이 온 세상을 뒤덮어 알전구처럼 반짝인다고. 

그 뒤로 크리스마스는 더 각별한 날이 되었다. 해마다 학교에서 크리스마스 씰(seal)을 구입하는 것으로 크리스마스 시즌은 시작되었다.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반복했던 일이었는데 이제와 생각하면 추운 겨울 온기가 필요한 이를 배려하고 무언가를 나누는 것을 배웠던 게 아닌가 싶다.

차가운 날씨가 유독 더 아픈 사람들이 있고 그걸 보듬고 온기를 지펴주는 것이 함께 사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구세군 냄비를 보면 성금을 내고 쌀을 모아 어딘가로 보내었던 겨울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겨울은 춥기에 따뜻한 것들이 더 따뜻하게 좋은 계절이 되었다.

크리스마스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일은 단연 카드 만들기였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방학식 즈음이면 친구들에게 줄 카드를 만드느라 바빴다. 고운 색지를 오려 그림을 그리고 정성스레 글을 적느라 때로는 밤이 늦도록 잠을 잘 수 없었는데 그걸 받고 활짝 웃을 친구들을 떠올리면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당시에도 산타의 존재나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믿을 나이는 지났지만,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희망만은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주고받는 작은 카드, 그 안에 적힌 애정과 그리움의 말들로 일순간 마음이 환해지는 일이 내겐 기쁨이고 희망이었고.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리는 사이 세상과 삶은 누리고 싶은 즐거운 대상이 되었다. 돌아보니 사소한 행동으로 기분을 바꾸고 작은 노력으로 주변을 즐겁게 만드는 일이 우리가 삶에서 행하는 작은 기적이 아닐까 싶다. 기적이란 각자가 삶에서 짓는 기쁨으로 세상이 미세하게 따뜻해지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각자가 삶에서 짓는 기쁨의 온기 
 
우리집 거실에 설치한 크리스마스 트리. 불을 켜면 차가운 거실에 온기가 감돈다.
▲ 크리스마스 트리 우리집 거실에 설치한 크리스마스 트리. 불을 켜면 차가운 거실에 온기가 감돈다.
ⓒ 김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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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기다리던 특별한 마음은 옅어졌지만 차가운 계절 잿빛으로 비어 가는 거리에 빛과 온기를 더하고 설렘과 기대로 즐거움을 키울 수 있다면 그걸로도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충분할 것 같다. 가게들이 하나 둘 밝힌 불빛으로 온 거리가 알록달록 물들면 삶의 즐거움과 뜻밖의 아름다움을 상기할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 마음에 기쁨의 빛 하나 드리울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축하할 일이라고 내 마음을 돌려세웠다.  

주문한 트리가 도착하고 상자 안에 모아진 가지와 잎을 펼치는데 한두 시간이 흘렀다. 털실처럼 감겨 있던 전선과 전구를 풀어 트리에 감을 때엔 인내심을 내야 했다. 해마다 집안 어딘가를 장식하느라 사 모았던 오너먼트를 꺼내 다니 그럴듯한 트리가 완성되었다. 딸깍, 스위치를 켜니 환한 빛이 트리에서 깜빡거렸다.

여전히 산타의 존재를 믿는 아이는 일 년 내내 잊을 만하면 산타에게 받을 선물 이야기를 꺼냈다. 무얼 받을지 고민하는 사이 아이의 목소리엔 생기가 돌고 얼굴에는 화색이 비쳤다. 기대감으로 즐거운 기분에 젖는 것이다. 그런 아이의 모습이 어여뻐 맞장구를 치거나 한 수 더 떠서 산타의 방문을 강조하기도 했는데.

삶과 미래를 기대하고 꿈꾸게 하는 일은 아이의 작은 가슴에서 내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산타는 거짓이고 기적 같은 건 없다고, 나이가 들어 허무를 알게 되는 건 아무래도 슬픈 일이니까.

커다란 트리를 갖고 싶다는 아이의 말을 들었을 때엔 트리가 무슨 소용일까 한참 고민했는데, 삶에는 가뭇없이 사라져 버리는 황홀한 빛 또한 필요한 것을. 그런 빛이 삶과 내일을 기쁘게 긍정하게 한다는 걸, 기억해야지.

전구를 켜면 차가운 거실에 온기가 돌고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아이 곁에 앉아 깜빡거리는 불빛을 바라본다. 이 빛으로 아이와 내 마음에 온기가 차오르면 어딘가로 또다시 선물처럼 흘러갈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개인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태그:#크리스마스트리, #삶과내일을긍정하는힘, #기대와희망, #허무에젖지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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