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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30일부터 2023년 4월 14일까지 9살 아들과 한국 자동차로 러시아 동쪽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서쪽인 포르투갈 호카곶을 지나 그리스 아테네까지 약 4만 km를 자동차로 여행한(3대륙, 40개국, 100개 도시) 이야기를 씁니다. [기자말]
- 지난 기사 '40대에 공무원 퇴직 후 9살 아들과 떠난 세계여행'에서 이어집니다.

처음 유라시아 대륙횡단 여행을 계획할 당시 내 눈으로 꼭 보고 싶었던 자연환경이 몇 군데 있었다. 첫 번째가 몽골의 초원이고, 두 번째는 모로코의 사하라 사막, 그리고 마지막이 바이칼 호수였다. 바이칼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2,500만 년 전), 가장 깊고(1,700m), 가장 많은 물(지구상 담수의 20%)을 담고 있는 바다같이 거대한 호수이다.

그렇게나 오고 싶었던 바이칼 

학창 시절 지리 시간에 배울 땐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바이칼 호수를 향해 차를 몰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4,000km 정도 떨어진 시베리아 한복판에 있는 바이칼 호수로 가는 길은 점점 오가는 차량도 적어지고 길 양옆으론 자작나무가 끝없이 이어졌다.

울란우데에서 2시간을 달려 미리 검색한 한적한 호숫가에 도착했다. 차박할 자리를 찾는데 한 수도사님이 다가오더니 주차하기에 평평한 곳을 알려주시고 가셨다. 우리가 캠핑하려 주차한 곳 바로 옆엔 그리스 산토리니에 어울릴 법한 아름답고 하얀 수도원이 있었는데 그곳에 계신 분 같았다. 캠핑 준비를 마치고 아들과 호숫가를 걸었다.

남북 방향 길이가 600km나 되는 바이칼 호수는 정말로, 바다인 것처럼 파도가 치고 있었다. 그리고 물은 수족관에 담긴 물처럼 아주 맑았다. 우리가 있던 곳의 맞은편 육지까지는 거리가 40km가 넘는데도, 건너편이 아주 뚜렷이 보일 정도로 공기도 깨끗했다.
 
바이칼 호수를 바라보며 캠핑
▲ 바이칼 호수 차박 바이칼 호수를 바라보며 캠핑
ⓒ 오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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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로 떨어지는 추운 날씨였지만, '겨울의 바이칼에서 한 번쯤 수영을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에 아들과 점심을 맛있게 먹고 수영복만 입고 얼음장 같은 바이칼로 들어갔다.

"태풍아, 사랑한다~"

이런 거창한 아빠의 용기에 관심 없는 아들 녀석은 전기장판을 켜놓은 차 안에 누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은 차가웠지만, 햇살에 반사돼 찰랑찰랑 반짝이는 바이칼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게 아니야! 이렇게 바로 네 옆에도 있잖아!'

그렇게도 와보고 싶었던 바이칼에 몸을 담근 채 따뜻한 차 안에서 재밌어하며 나를 바라보는 아들을 보니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저런 사랑스러운 아들과 함께라면 유럽이나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도 어디서든 행복하겠다.'
 
바이칼 수평선 위로 물든 저녁놀
▲ 바이칼 석양 바이칼 수평선 위로 물든 저녁놀
ⓒ 오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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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물자, 기온이 빨리 떨어지기 시작해 서둘러 아들과 소시지를 구워 라면과 함께 먹었다. 곧 밤이 되자 수도원 근처만 희미하게 밝혀져 있고, 온통 어둠으로 뒤덮여 하늘은 마치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에서나 볼 수 있는 아주 노란 색의 별들이 요란스럽게 반짝였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10월 말인데 벌써 눈이 내려있었고, 바이칼은 풍랑주의보가 내린 듯 파도가 철썩댔다. 서둘러 짐을 정리하고 아들과 계속 서쪽으로 이동했다.
  
거대한 바이칼은 바다처럼 파도가 거칠게 일었다
▲ 파도치는 바이칼 거대한 바이칼은 바다처럼 파도가 거칠게 일었다
ⓒ 오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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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시베리아에서 키즈카페부터 갔다

약 2,000km를 더 달려 러시아의 대전과도 같은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했다. 노보시비르스크는 '새로운'이라는 뜻을 가진 '노보'와 시베리아라는 뜻을 가진 '시비르'가 합쳐진 이름으로 '새 시베리아'라는 뜻의 도시이다.

동서 방향의 길이가 약 10,000km 정도 되는 러시아의 중간에 있는 지리적 특성도 그렇고, 교육과 과학의 도시라는 특성 등 많은 부분에서 이곳은 우리나라의 대전과 비슷한 곳이다. 또 실제 우리나라의 대덕연구단지의 롤모델이 이곳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는 과학연구단지인 '아카뎀고로도크'라고 한다.

그리고 유라시아 횡단자들에게 이곳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이곳부터는 그간 지나온 시베리아 구간에 비해 점점 차량 통행도 많아지고 도시 간의 간격, 휴게소, 도로 상태 등 모든 면에서 운전하기 편한 구간이 이어진다.

척박한 시베리아를 지나올 땐 여러 사정상 아들과 많이 놀지 못해 미안했던 나는 모처럼 만난 대도시에서 아들과 제대로 놀기로 작정하고 키즈카페부터 찾았다. 생각보다 꽤 크고 시설도 깔끔한 키즈카페에서 아들과 땀을 뻘뻘 흘리며 재밌게 놀다 나와 택시를 타기 위해 길을 걷는데, 도시 중심지인데도 차도뿐만 아니라 인도까지도 흙탕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전날부터 이슬비가 조금 내리긴 했지만, 기껏해야 총 강수량 5mm도 안 될 것 같은데 지나다니는 자동차며 인도를 걷는 행인들도 모두 진흙 범벅인 채 아무 일 없는 듯 돌아다니고 있었다.
 
여행 출발 후 처음 찾은 키즈카페
▲ 노보시비르스크 키즈카페 여행 출발 후 처음 찾은 키즈카페
ⓒ 오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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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도시를 지나오며 인프라가 좋지 않은 걸 볼 때마다 '여기는 시골이라 그렇겠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여기는 러시아의 3대 도시로 인구는 160만 명이나 되는 대도시인데도 도심지의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한국인으로 살면서 그동안 러시아를 유럽 국가로 생각했던 내 생각이 현실과 충돌하며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와 동시에 내가 지금 '러시아 동쪽에서 자동차를 운전해 내리 달려온 지 19일이나 됐지만 아직도 한 국가의 중앙에 있다'라는 사실이 그 '혼란스러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정말로 거대한 나라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지평선을 한 달 내내 볼 수 있는 곳. 그래서 그 나라를 잘 개발하고 관리하기에는 여러모로 힘에 부치는 것만 같았다.

왼쪽은 유럽, 오른쪽은 아시아  

며칠 더 서쪽으로 석양을 바라보며 운전해 1,500km 정도 떨어진 예카테린부르크에 도착했다.

우리나라도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는 섬진강으로 나뉘듯이 대부분 국가와 도시의 경계는 보통 높은 산맥이나 강 같은 자연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는 '유라시아라'는 유럽과 아시아가 함께 있는 커다란 대륙에 있다.

그럼,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는 어디일까? 바로 우랄산맥이다. 도시나 국가의 경계도 아닌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경계인 우랄산맥은 어떤 곳일까? 궁금해하던 찰나에 한 유튜브 구독자가 댓글로 '11월이 되기 전에 우랄산맥을 빨리 넘어야 한다'라고 조언해 주었다.

우랄 산맥의 바로 동쪽에 있는 예카테린부르크에 우리는 10월 30일에 도착했다. 아들과 나는 도시 서쪽에 있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 기념비가 세워진 곳으로 갔다. 남북 방향으로 우랄산맥을 따라 여러 개 세워진 기념비 중의 하나인 이곳은 특히 큰 도시 근처에 있기도 해서 경계 기념비 중 가장 유명한 곳이다. 신기하기도 해 아들과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태풍아, 너는 지금 유럽에 있는 거야."
"그래? 그럼, 여기는?"
"어? 이제 아시아로 넘어왔네? 아빠는 유럽이고."
"와~ 아빠 너무 신기해."

 
우랄 산맥을 따라 대륙 경계비가 여러 개 있다
▲ 유럽 아시아 대륙 경계비 우랄 산맥을 따라 대륙 경계비가 여러 개 있다
ⓒ 오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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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발이 날리기 시작해 서둘러 숙소로 향했다. 다행히 뒤따라오는 함박눈을 제치고 우랄산맥에서 거의 다 벗어난 곳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아직 산맥을 온전히 다 넘은 지역은 아니라서 불안한 마음에 다음 날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숙소 주변으로 눈이 조금 쌓이긴 했지만, 운전할 수 없는 정도는 아니어서 조심히 운전하고 있는데 점점 갈수록 고도가 높아지며 길에는 쌓인 눈의 깊이가 깊어졌다. 30여 분을 운전하니 길가에는 운전을 포기한 건지, 차 위에 눈이 수북이 쌓인 차가 여러 대 주차되어 있었다.

'계속 가야 하나? 되돌려 가야 하나?' 하며 망설이는데 맞은편에서 차들이 한두 대 내려오고 있었다.

'저 차는 산맥을 넘어오는 차일까? 아니면 되돌아오는 차일까?'

문득 걱정된 나는 차를 잠깐 옆에 세우고 사람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영어도 통하지 않고 통신 신호도 잡히지 않아 손발짓 하며 물었더니 러시아인은 '겨울용 타이어에 4륜이 아니라면 힘들다'라고 말하는 듯 바닥의 눈과 타이어, 그리고 손가락 4개를 펴 보였다.

한국에서는 겨울철 해발 1,000m 이상 고산지대에서 운전한 경험이 많았지만, 어린 아들을 생각해 무리하지 않기로 하고 차를 돌렸다. 그리고 오늘 도착지까지 길을 다시 검색하니 원래 480km였던 거리가 700km로 늘어났다. 지금 이 거리를 운전해서 가는 건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잠시 생각을 해봤다.

기상학을 전공한 나는 '현재 눈이 많이 쌓인 도로의 고도가 대략 400m이고, 아침에 숙소가 있던 곳은 해발 100m에 온도가 영상 1~2도 정도 됐다'는 정보를 이용해 해발고도 300m 이하 지점을 경로에 넣어 다시 검색해 봤다. 그렇게 만들어진 거리는 600km였다. 고민할 겨를도 없이 바로 운전을 시작했다. '10km, 20km….' 긴장하며 운전하는데 눈이 간간이 내리기는 하지만 바닥에 쌓이지는 않았다.

고도계를 확인해 보니, 지금 운전하는 도로의 고도는 대략 해발 200~300m였다. 대성공이었다. '아! 평생 직업을 이럴 때 써먹는구나.' 이후 4시간 정도를 쉬지 않고 운전해 우랄산맥을 거의 다 내려와 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아들과 잠시 내려 화장실에 다녀와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샀다.

"태풍아, 아빠랑 기지개 켜고 스트레칭 하자. 이따가 차 오래 타야 할지도 몰라."
"응, 아빠 알았어. 하나! 둘! 셋! 넷!"


아들과 함께 몸을 풀고 의자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려는데 아들이 말했다.

"아빠, 나 그냥 차에서 먹을게. 아빠는 빨리 운전해."
"그럴까? 그럼, 태풍이 혼자 먹어. 아빠는 안 먹어도 돼."


우리 부자는 다시 흰둥이(자동차 이름)와 함께 눈이 흩날리는 우랄산맥으로 들어갔다.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여행 기간 내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새로 작성하였으나, 사건 등 일부 내용은 기자의 저서<돼지 아빠와 원숭이 아들의 흰둥이랑 지구 한 바퀴>에 수록되어 있음을 밝힙니다.


태그:#러시아, #유라시아횡단, #바이칼, #우랄산맥, #시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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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세계 여행을 다니며 글을 쓰고 강연 합니다. 지금까지 6대륙 50개국(아들과 함께 42개국), 앞으로 100개국 여행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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