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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나에게 군청은 놀이터였다. PC가 막 보급되던 초등학생 시절 군청 2층에 컴퓨터실이 생겼다. 컴퓨터실은 '슬기로운 인터넷 활용'과 같은 공공의 목적으로 지어졌겠지만 우리의 진짜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바로 그곳에 가면 피카츄 배구 게임과 같은 고전 PC 게임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주군청의 뒤뜰 모습
 무주군청의 뒤뜰 모습
ⓒ 이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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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생이 되어서는 군청 뒤뜰을 운동장 삼아 깡통차기(술래잡기와 비슷한 놀이로 깡통을 차면 잡힌 술래가 모두 해방된다)와 다방구(기둥이 기지가 되어 두 개의 팀으로 나누어 술래를 잡는 놀이인데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변놀이'로 불렸다) 놀이를 했다. 각종 장애물과 숨을 수 있는 벽과 나무가 많았다. 어린 시절 우리에겐 이보다 좋은 변놀이와 깡통차기 전용 운동장이 없었다. 술래가 되기도 하고 술래를 따돌리기도 하면서 군청 뒤뜰을 신나게 활보했다. 

동네 친구, 형, 동생들과 돈 없이도 잘 놀았다. 이게 다 군청 덕분이다. 군청 설계자가 의도한 바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우리는 군청을 어른들만의 건물로 두지 않았다. 

도시공학과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공공건축물 기본계획 연구를 수행하는 회사에 입사했다. 기본계획이란 설계 이전에 기획을 하는 단계를 말한다. 건축물의 콘셉트, 도입 시설과 규모 등을 구상한다. 직업병이 이런 걸까. 공공건축물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멀리서 사진도 찍어보고 여유가 되면 건축물 안에 들어가 둘러본다. 어떤 공간이 조성되었는지, 누가 주로 이용하는지도 관찰한다. 

군청, 시청, 동주민센터와 같은 공공건축물은 어떻게 지어야 잘 지었다고 할 수 있을까? 공공청사는 공공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청사다. 본래 청사의 용도와 목적에 맞게 기능해야만 한다. 당연하게도 공공 서비스 업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짓는 것이 공공건축의 핵심이다. 공공 서비스 기능 말고도 중요한 게 있을까. 

어린이가 전주시청에 무슨 일로 모였을까

친구 결혼식 때문에 전주시에 방문했다가 우연히 전주시청을 발견했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첫인상이 중요하다. 전주시청은 한옥이라는 도시 이미지를 잘 연상하게끔 건축되었다. 건축적 지식이 없는 누구라도 시청을 보면 전주시의 상징과도 같은 풍남문을 떠올릴 법하고 전면부에는 한옥 처마가 보이기도 한다.
 
전주시 청사의 모습
 전주시 청사의 모습
ⓒ 이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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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송광장에 있는 사람들 중 절반이 어린이였다. 어린이와 함께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건 조형물이었다. 바로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놀이터다. 목재를 재료로 한 징검다리, 통나무 터널 등이 보인다. 한편에는 어린이들이 줄 서있다. 바로 짚라인 놀이터다.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고 미끄러지듯 반대편을 향해 짚라인이 이동하자 어린이는 자연스레 소리를 지른다. 
 
전주시청 노송광장에 조성된 짚라인
 전주시청 노송광장에 조성된 짚라인
ⓒ 이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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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 입구 가까운 곳에는 고목이 눕혀져 있다. 큰 고목을 눕혀놓기만 한 것처럼 보이는 이 시설물도 인기가 좋다. 어린이들이 고목 위아래를 이리저리 오가며 자유롭게 뛰논다. 중대한 모험을 하듯 신중히 움직이는 어린이도 보인다. 그 옆으로는 흙밭이 있다. 값비싼 플라스틱 장난감이 아니라 다양한 모양의 나무토막이 흩어져 있다. 글씨를 쓰는 어린이도 있고 나무토막을 쌓아 무언가를 만드는 어린이도 있다.   

VR체험기구나 그래픽 좋은 PC게임에 비하면 시시해 보일 수도 있는데 왜 이렇게 어린이들이 열광할까? 친구와 '놀이 규칙'에 관해 대화한 적이 있다. 놀이 규칙은 또래 친구 사이에서 사회성을 함양할 수 있게 하지만, 놀이 규칙의 빈틈이 없을수록 창의성은 제한된다는 이야기였다. 동의하는 바고 이는 경험적으로도 알 수 있다. 놀이 규칙을 만들어가거나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서 놀이를 할 때 창의적인 사고와 행동이 나온다. 

전주시청의 잔디광장 놀이터는 그야말로 창의력이 샘솟는 놀이터다. 물론 몸을 움직이며 한껏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기도 하다. 청사 출입문 바로 앞에는 사방치기를 할 수 있도록 바닥에 그림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청사 출입구 기준으로 우측에는 그늘막과 의자가 설치되어 있어서 어린이와 함께 온 보호자가 뛰어노는 어린이를 지켜보며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고목 위아래를 오가며 뛰노는 아이들
 고목 위아래를 오가며 뛰노는 아이들
ⓒ 이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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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청사의 자연친화적이면서 자유분방한 놀이터는 주목할 만하다. '공장형 놀이터'가 필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다양한 놀이터로 어린이의 창의성을 증진하는 놀이 공간이 필요하다. 국내는 이미 공장형 놀이터가 즐비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놀이터에 가면 미끄럼틀과 그네 같은 시설물이 거의 전부다. 안전성과 비용을 이유로 공장식 놀이시설물이 전국에 설치된 실태가 매우 안타깝다. 부디 공장형 놀이터가 어린이들의 놀이의 즐거움을 획일적으로 통일하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 이는 창의적 사고와도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외부 공간뿐만 아니라 내부 공간도 눈에 띄었다. 청사에 들어가자 책 세계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었다. 로비를 도서관 겸 카페로 조성했다. 이름은 '책기둥도서관'. 그저 다른 청사가 하는 도서관 만들기를 따라한 모양새가 아니다. 2층 높이로 천장이 뻥 뚫려 있다. 시각적 개방감을 준다. 앉아만 있어도 지식이 충전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장소다. 건물 기둥을 활용해 서가로 만들었는데 인터스텔라가 연상되는 인테리어다. 복층으로 구성하여 공간적인 재미도 있다. '책의 도시' 전주에 걸맞은 청사 내부 공간이다. 
   
전주시 청사 1층 '책기둥도서관'의 모습
 전주시 청사 1층 '책기둥도서관'의 모습
ⓒ 이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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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자유로운 출입을 넘어 커뮤니티와 문화 활동 거점시설로 활용할 수 있는지가 중요해졌다. 과거 공공청사는 권위를 상징했다. 반면, 오늘날 공공청사는 탈권위를 지향하며 시민에게 친근할 뿐만 아니라 시민이 주체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노력한다. 

전주시청은 어린이 관점에서 참 잘 지은 공공청사다. 어린이들이 에너지를 발산하고 신체적 능력을 함양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어린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청사 내외부에 노송광장과 책기둥도서관이라는 무대를 내어준 것이다.

어린이도 이용하는 '제3의 장소'로서 공공청사

청사 광장과 도서관을 어린이들이 이용하면 어린이들에게만 좋을까? 어린이를 위한 청사는 사회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당연히 보호자들에게 좋다. 가정에 어린이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일반 시민들은 민원업무나 도서관에 들르게 되면, 다양한 세대가 자연스럽게 섞이게 된다. 소셜 믹스 처방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린이가 이용할 수 있는 청사는 '제3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제3의 장소는 미국 도시사회학자이자 웨스트플로리다 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레이 올든버그가 처음 제창한 개념이다. 첫 번째 장소는 집이며, 두 번째 장소는 일터이며, 바로 세 번째 장소는 목적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리는 장소를 뜻한다. 올든버그는 도서관과 공원을 비롯한 공공시설과 교회, 시장을 예로 들었고 카페, 식당, 이발소, 서점 등과 같은 상업 시설도 제3의 장소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제3의 장소가 중요한 이유는 사회적 인프라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사회적 인프라에서는 모르는 제삼자와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고 관계가 형성되지 않더라도 사회성을 습득할 수 있다. 

전주시청은 제3의 장소로서 사회적 인프라로서 기능을 극대화하고 있다. 전주시에서 이런 효과를 미리 예상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큰 시설물이나 최첨단 기술을 적용하지 않고도 도시 혁신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전주시는 호화청사를 만들거나 값비싼 고급의 놀이시설물을 도입하여 전면적인 변화를 꾀하지 않았다. <도시침술>이라는 이름의 책이 있다. 전주시청이 이 책의 이름처럼 정성껏 도시 침을 놓아 청사 앞 광장에 친환경적이고 흥미로운 시설물로 어린이들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고목을 활용한 터널
 고목을 활용한 터널
ⓒ 이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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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는 감소하고 지자체의 예산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도시 침을 놓으려면 어디가 아픈지, 어디를 고쳐야 할지 정확히 진단하는 게 필요하다. 도시설계가뿐만 아니라 청사의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지자체는 전주시에 방문하여 제대로 놓은 도시 침이 어떻게 청사를 변화시키는지 공부하는 것도 좋겠다. 

전주시청은 전주한옥마을 근처에 있다. 전주 여행 계획을 갖고 있는 이들이 방문해 봐도 좋다. 혹시 가정에 어린이가 있다면, 넘치는 힘을 청사에서 발산한 후에 여행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다. 어린이도, 보호자도 활짝 웃는 여행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 계정(@rulerstic)에도 실립니다.


태그:#전주시청, #잘지은공공청사, #공공청사, #고목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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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에게 덜 폐 끼치는 동물이 되고자 합니다. 그 마음으로 세상을 읽고 보고 느낀 것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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