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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문화예술촌 제4전시관. 창고 문에 농협창고로 쓰이던 당시의 표식이 그대로 남아 있다. ⓒ 성낙선

다 쓰러져가는 양조장 건물이 젊은 연인들이 즐겨찾는 카페로 변하고, 한때 약품창고로 쓰이던 건물이 젊은 작가들을 위한 예술 작품 전시 공간으로 뒤바뀌는 세상을 살고 있다. 재미있는 세상이다. 예전 같으면 일찌감치 허물고, 그 자리에 요즘 세상에 맞는 번듯하고 깔끔한 형태의 새 건물들을 지어 올렸을 것이다.

그런데 낡고 오래된 건물이라고 모두 다 허물고 새로 짓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세상은 돌고 돈다. 사람들이 그 건물들에서 어딘가 예스러운 분위기를 발견했다. 한편으로는 그 생경한 분위기가 색다른 멋으로 다가온다는 걸 감지했다. 고졸하다는 말을 이럴 때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기교를 모르는 소박함이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이 푸근해지는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삼례문화예술촌, 공연장으로 쓰이는 창고와 맹꽁이 조형물. 이곳은 양곡창고가 지어지기 전에는 맹꽁이들이 살던 습지였다고 한다. ⓒ 성낙선
 
여하튼 그곳에 요즘 건물들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투박하고 거친 매력이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거기에 세월이 녹아든 편안함도 있다. 그같은 정경들로 해서, 누군가는 그곳에서 오래된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누군가는 또 새로운 추억을 만드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철거 직전의 옛날 건물들이 이처럼 요즘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삼례(전북 완주군)의 '양곡창고'들도 그런 건물 중에 하나다. 전국에, 양곡창고를 카페나 전시 공간 등으로 개조해서 사용하는 곳이 꽤 있다. 전주나 군산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여기에 전주와 군산에서 가까운 삼례를 빼놓을 수 없다. 그렇다고 삼례를 전주나 군산과 동일시할 수 없다. 삼례는 좀 더 특별한 사례에 속한다. 전주나 군산보다 한 발 더 진일보한 모습이다.
 
삼례문화예술촌 정문. ⓒ 성낙선

양곡창고의 시대를 초월한 쓰임새

삼례는 일제강점기 뼈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일제가 자행한 양곡 수탈의 중심지였다. 이곳의 양곡창고들은 일본인들이 만경평야에서 수확한 쌀을 수탈해 일본으로 반출할 목적으로 만들었다. 일본은 이곳에 대량의 쌀을 보관했다가 그 쌀을 삼례역에서 철도를 이용해 운반해 갔다. 이 창고들이 '일제강점기 쌀 수탈의 역사'를 증언하는 살아 있는 증거물들이다.

비옥한 곡창지대였던 까닭에, 삼례에는 많은 수의 양곡창고가 지어졌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이 된 후에도 상당히 오랜 기간 쓸모를 유지했다. 일제가 물러간 뒤에는 2010년까지 농협 창고로 사용됐다. 일제시대를 포함해 그때까지 양곡을 저장하는 창고로 쓰인 세월이 무려 90년이다. 그사이 얼마나 거친 시간을 보냈을지 감히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 창고들이 지금 문짝까지 그대로 달려 있다. 수없이 보개수를 거친 결과일 것이다. 그래도 세월을 완전히 감출 순 없다. 2010년 이후로는 그저 쓸모를 다한 창고에 불과했다. 그냥 두면 저절로 없어질 건물들이었다. 그런데 그 무렵 뜻밖의 상황이 전개된다. 2013년 지자체에서 이곳 양곡창고들을 되살려 복합 문화예술 공간인 삼례문화예술촌을 조성하기로 하면서,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삼례문화예술촌 제3전시관. 벽에 전시회 포스터가 붙어 있다. ⓒ 성낙선
 
삼례문화예술촌 제3전시관에 전시중인 작품. ⓒ 성낙선

삼례문화예술촌에는 현재 목조 4동, 조적조 2동의 창고가 남아 있다. 이들 창고들이 시대를 초월해, 모두 전시관이나 공연장, 혹은 카페로 탈바꿈했다. 전시관 안으로 들어가 보면, 양곡창고로 쓰일 당시의 목조 구조물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이질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구조물이다. 그런데 그 구조물이 전시 작품들과 잘 어울린다. 묘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이곳 전시관에서는 지금 '한국화시리즈전'과 지역작가 공모전시인 '600℃ moon 최용선 작가전' 등이 열리고 있다.
 
삼례문화예술촌 제1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양곡창고. ⓒ 성낙선
 
삼례문화예술촌 제1전시관 내부. 양곡창고로 쓰이던 당시의 구조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 성낙선

삼례문화예술촌은 담이 매우 낮다. 밖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 그리고 사방으로 문이 열려 있다. 굳이 정문으로 입장할 필요가 없다. 후문이 삼례역 주차장과 상당히 가깝다. 삼례역까지 기차를 타고 오는 사람들은 역사를 빠져나오는 길로 바로 후문을 통해서 예술촌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삼례성당 쪽으로도 언제든지 통행이 가능해, 예술촌을 돌아본 뒤에는 곧장 그곳으로 걸음을 옮길 수도 있다.
 
삼례문화예술촌 정문 근처, 쉬어가삼[례:]에 가면 완주군의 역사와 함께 삼례 양곡창고의 변천사를 함께 볼 수 있다. ⓒ 성낙선

전시회를 보고 나오면 또 전시회

삼례문화예술촌 정문을 나서면 왼쪽으로 '쉬어가삼[례:]'라는 간판이 붙은 건물이 나온다. 이곳은 그냥 지나쳐 가기 쉬운데, 삼례를 여행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들러볼 만하다. 삼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곳에서 삼례 양곡창고의 변천사를 비롯해, 삼례역의 역사가 고려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과, 1930년대 삼례에서 학생만세운동과 삼례독서회사건 등 항일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삼례책마을 전경. 양곡 창고를 카페, 책방, 전시관으로 만들었다. ⓒ 성낙선
 
삼례책마을 헌책방 2층. 책장 사이로 창고 지붕을 지탱하는 구조물이 보인다. ⓒ 성낙선

삼례문화예술촌에서 읍내 안쪽으로 조금 더 걸어 올라가면 왼쪽으로 '삼례책마을'이 보인다. 이곳에는 3개의 크고 작은 창고가 남아 있다. 가장 큰 창고에는 책마을카페와 삼례헌책방, 고서점 호산방 등이 들어서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들러볼 필요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창고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목조 구조물이 나무로 만든 책장과 역시 나무로 만들었을 헌책들과 한몸이 되어, 서로를 보듬고 있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게 된다. 

나머지 두 개의 창고는 전시관이다. 한 전시관에서는 '만경강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일제강점기 완주-전주-춘포 지역에서 만경강을 젖줄 삼아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사를 보여주는 사진과, 문서, 책 등을 전시하고 있다. 또 다른 건물에서는 '안서와 소월- 시 <못 잊어>는 김억 작품'이라는 제목으로 김억이 쓴 편지 등을 전시중이다. 이 전시회는 소월의 시로 알려진 <못 잊어>가 실제는 안서 김억의 작품임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기획됐다.
 
그림책박물관 외부. 안전관리, 불조심 등의 글자가 보인다. ⓒ 성낙선
 
그림책박물관 내부. ⓒ 성낙선
 
삼례책마을을 나오면, 그때는 삼례에 있는 양곡창고는 죄다 돌아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다른 양곡창고가 더 남아 있을까 싶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책마을을 나와서 몇 걸음 더 걸어 올라가면, 길가에 '그림책박물관'이라는 글자가 적힌 표지석이 보인다. 그 표지석 안쪽으로 창고가 하나 더 있다. 창고 유람도 계속되고, 전시회도 계속된다. 이번엔 그림책이다. 이곳에서는 지금 랜돌프 칼데콧 등 그림책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빅토리아시대 그림책 3대 거장전'이 열리고 있다. 이 박물관은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다.

옛날 창고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

삼례의 양곡창고들은 쓸모를 다한 건물이라고 해서 더 이상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라질 운명에 처했던 건물들을 되살려 보존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말해준다. 낡은 건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이 단순히 그 건물들을 지탱하고 있는 구조물만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해준다. 옛날 창고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

또 하나 우리가 되새겨야 할 것은 양곡창고 하나도, 거기에 가야만 찾아볼 수 있는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양곡창고가 거기가 다 거기 같지만, 실제 가 보면 또 다르다. 무엇을 보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보느냐도 꽤 중요하다. 보는 각도에 따라 느낌도 다르고 감동도 다르다.
 
밤이 찾아온 삼례읍 거리 풍경. 길가에 자리를 잡은 평화의 소녀상. ⓒ 성낙선

그림책박물관을 나와서는 다시 삼례책마을 쪽으로 되돌아간다. 삼례책마을 앞 도로 건너편에 평화의 소녀상이 있기 때문이다. 삼례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 앞을 지나간다. 최근에 소녀상이 시련을 겪는 일을 자주 본다. 하지만 이곳 삼례에서는 적어도 그처럼 볼썽사나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누군가 소녀상에 한 땀 한 땀 뜨개질을 한 모자와 털옷을 입혀 놨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따듯해지는 풍경이다.

삼례의 양곡창고들은 삼례와 같은 작은 도시에서도 문화 향유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그곳에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고유한 문화가 존재한다. 낡은 것은 낡은 것대로, 오래된 것은 오래된 것대로 또 다른 가치를 지닌다. 삼례문화예술촌은 2013년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2017년 '한국관광 100선'으로 선정됐다. 이곳의 창고 건물들은 2013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삼례책마을 헌책방 2층에서 내려다본 카페. ⓒ 성낙선
 
태그:#삼례문화예술촌, #양곡창고, #삼례책마을, #그림책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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