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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완도읍 정도리 마을에는 천년 세월을 지켜온 마을 숲이 있다. 구계등(九階嶝) 뒤편의 울창한 정도마을 당(堂)숲이자 방풍림이다.

기록에 의하면 구계등은 신라시대부터 왕실의 녹원지(錄園地)로 지정돼 보호됐으며, 400여년 전 나씨와 강씨에 의해 마을이 형성되면서부터는 마을의 당숲이자 방풍림으로 주민들로부터 보호를 받아왔다고 한다.

이 숲은 후박나무를 비롯한 동백, 생달나무 등 상록활엽수와 느티나무, 갈참나무 등 낙엽송이 혼재돼 있는데 가장 큰 특징은 대부분의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서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숲은 크게 8개 군락으로 나눠지는데 그 군락은 느티나무, 생달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예덕나무, 개서어나무, 참나무, 소사나무 군락지이다. 가장 큰 군락지는 개서어나무 군락지이고 느티나무와 소사나무, 갈참나무 군락지는 다른 종에 비해 면적이 좁은 군락지이다.    

또한 국립공원관리공단 정도리사무소가 최근 20년간 숲의 변화에 대한 모니터링 결과 최근 들어 낙엽송이나 잡목이 조금씩 사라지고 그 자리에 후박나무, 동백나무, 생달나무를 비롯한 상록활엽수가 번성하고 있어 앞으로는 상록활엽수가 숲의 주종을 이룰 것으로 보여진다.    

방품림이자 마을의 당숲

완도의 경우 바닷가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돼 어느 마을을 가더라도 방풍림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정도리 마을 역시 강한 바닷바람과 염분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고 쾌적한 생활을 위해 마을의 남쪽에 자생되고 있는 방풍림을 보호해 온 것이다.

정도 마을 방풍림은 방풍림 역할도 했지만 마을의 당숲으로서 역할도 커서 잘 보전됐는데 정도마을에서는 1980년대 초반까지도 산감(山監 일정부분의 산을 지키고 감시하는 사람)을 두고 숲을 지켰다고 한다, 산감(山監)에 대한 수고비는 마을기금에서 각출해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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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매년 겨울이면 마을의 전 주민이 울력으로 고사목을 정리하고 낙엽을 긁어모아 마을 회관에서 주민만이 참여한 가운데 경매에 부쳐져 땔감으로 사용됐고 이익금은 산감의 인건비 및 마을기금으로 충당했다고 한다.   

숲을 이야기 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구계등 짝지(자갈로 이루어진 해변)이다. 구계등은 돌로 이루어진 구릉이 아홉 개로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명승 제3호로 다섯 종류의 돌무더기가 바닷속부터 형성됐다고 하나 현실적으로 눈으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길이는 800m로 동쪽 해안은 청환석(靑丸石)이 매우 크고 굵다. 당앞기미(할머니 당이 있는 곳으로 구계등의 서쪽 끝)쪽으로 갈수록 돌이 점점 작아져 서쪽 끝에 이르면 콩돌처럼 둥글다. 

이 곳의 돌들은 억겁의 세월동안 거친 파도에 씻기고 깎인 탓에 표면이 아주 매끄러울 뿐만 아니라 모양이 아주 동글동글하다. 파도가 밀려왔다 나갈 때마다 갯돌들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해조음은 감탄을 자아내는데 동쪽의 큰 돌들은 바리톤처럼 두두둑~ 묵직한 저음을 내고 서쪽의 콩돌들은 맑고 고운 소프라노처럼 자르락~ 자르락~ 긴 소리를 연신 쏟아낸다. 

구계등 짝지는 파도가 유명한데 동지나해에서 밀려온 파도가 짝지에 부딪쳐 일으키는 물보라 구계비빈비말(九階泌濱飛沫)은 완도 팔경의 하나이다.   

겨울철이면 수평선으로 청산도, 소모도, 대모도, 불근도가 어둠속에 몸을 감추고 그 사이로 솟아오르는 장엄한 일출과 함께 멀리 제주도를 바라볼 수 있다. 차가운 겨울바다에 하루 종일 온기를 불어넣은 해는 붉은 빛을 토하며 다시 수평선으로 사라지는데 일몰은 형용하기가 어려워 많은 사진작가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주민들이 애정으로 가꿔온 숲

평생 마을 숲을 가꾸고 보호해 왔다는 최수웅(84. 완도읍 정도리 거주)씨와 만나려고 했으나 서울에 출타 중이어서 전화로 인터뷰를 했다. 최수웅씨는 정도리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평생을 살아왔다고 한다. 마을 숲의 산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애정을 갖고 숲을 지켰다고 한다.

″저 숲이 옛날에는 완도에서 학교다니는 모든 애기들이 소풍을 오는 명소 중에 명소여. 또 우리 마을 청년들에게는 추억이 엄청나게 많은 곳인디 지금은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못 들어가게 숲을 막어부렀어. 거그가 우리 마을 할머니당이 있거든. 그래서 옛날부터 신성시 했고 숲을 보호했어.

그때는(관리공단 입주 전) 마을 주민들이 맘대로 숲속에 들어갈 수 있었어. 숲은 절대 손대지 않았지만 큰 나무 밑에는 공터가 있어. 그라먼 거그서 마을 청년들 단합대회나 외부에서 손님이 오면 숲속에다 챌(차일)을 치고 먹고 마시고 모든 일이 저 숲에서 이루어졌어. 그란디 국립공원이 들어오듬마 숲을 딱 막어부러.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 왔는디 주객이 전도되붓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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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에는 마을이 난리가 났다고 한다. 

"그때가 민선 1기 때 것이여, 우리가 지키고 보호해온 숲이 개인 것이라는 것이여. 그래서 마을에서 난리가 나갔고 알어본께 목포사람 것이라고 하듬마. 세무공무원이었는디 박정희가 5.16일으키고 나라에 돈이 없응께 국유지를 헐값에 막 팔아버린 것이여. 그래갔고 그 사람이 공무원 퇴직하고 나서 자기 땅이라고 주장을 해서 그때 복잡했구만,"

그런데 그 땅을 되찾았다고 한다.

″인자 명승지가 개인 땅이라고 한께 군청에서도 나서고 마을에서 땅찾기 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청와대에 탄원을 넣고 복잡했는디 어찌어찌해서 땅을 찾었어.″

마을 숲은 그 유명한 사라호 태풍때도 마을을 보호해 주었다고 한다.    

″옛날에 내가 한 스무살 때 사라호 태풍이 말도 못하게 피해를 줬는디 우리 마을은 저 방풍림이 있어 그나마 피해가 적었어. 따른 마을은 아조 난리가 아니었어. 그란디 우리마을은 농작물 피해도 적고 논농사도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제만 곡식을 해먹었다니까.″

서울에 계시다는 최씨의 힘주어 말하는 모습 속에서 정도리 숲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강한지 느꼈다.

유영인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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