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생몰연대는 미상인데 존재가치와 업적이 찬연한 인물들이 더러 있다. 조선 후기 산수화의 대가로서, 기행과 파격과 풍류의 한 획을 긋는 최북(崔北)도 그 중의 하나이다. 대략 1720년(숙종 46)에 출생하여 49살의 나이로 숨진 것으로 알려진다.

최북의 본관은 무주, 초명은 식(埴), 자는 성기(聖器)·유용(有用)·칠칠(七七), 호는 월성(月城)·성재(星齋)·기암(箕庵)·거기재(居基齋) 또는 호생관(毫生館) 등이다.
특히 칠칠(七七) 이라는 자(字)를 즐겨 썼다. 이름 북(北)의 좌우획을 나누면 七七이 된다. 최북은 이렇게 독특한 자와 호를 여럿 지었다. 칠칠의 사전적 의미는 ① 잘 자라서 길차다 ② 나이에 비해 숙성하고 점잖다 ③ 터울이 잦지 않다 ④ 일의 솜씨가 능란하고 빠르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칠칠치 못한 사람을 칠푼이라고 한 데서 '칠칠'의 반어를 살피게 된다.

당대인들은 '칠칠 맞다'는 뜻을 연상시켜서인지 실제로 사용하는 것을 꺼렸다 한다. 우리말에 '칠칠'이라는 말과 '칠칠맞다'라는 말처럼 의미가 크게 엇갈리는 말도 흔치 않다. '칠칠맞다'는 '칠칠잖다' '더럽다' '구질구질하다' '추접스럽다' 등의 부정적 뜻이 담긴다. 최북은 '칠칠'이라는 호를 미천한 신분의 못난 놈임을 반항적으로 표기한 것이다.

최북은 경주 최씨로 아버지는 호조(戶曹)에 근무하는 계사(計仕)였다고 한다. 한양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성씨는 알려진 바 없다. 사대부 집안이 아닌 한미한 집안 출신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던 것 같다.

최북은 젊어서 집안의 돌림자를 거부하고 이름을 북(北)으로 개명하고 자를 칠칠이라고 지은 것부터 범상치 않았다. 그림을 잘 그렸다. 특히 산수화에서는 당대에 따를 사람이 드물었다. 당시의 화가들이 중국의 산수를 즐겨 그린 것을 크게 비판하고 조선화를 그렸다.

최북은 조선 화가가 중국의 화법을 모방하는 데서 벗어나 우리 식의 그림 양식을 개발할 것을 주장하고 실제로 그림도 그렇게 그렸다. <하경산수도>, <추경산수도>, <관폭도> 등이 이에 속한다.

최북의 기이하고 초탈한 행적은 여러 사람의 기록에서 조금씩 나타난다. 남공철은 <금릉집(金陵集)>에서 말한다.

어떤 권세가가 최북의 그림을 얻고자 그의 누옥을 찾아왔다. 이 자는 자신의 권력을 믿고 반강제로 그림을 그리도록 독촉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협박으로 나왔다. 자존심이 강한 화가는 결코 비굴하지 않았다. "남이 나를 손대기 전에 내가 나를 손대야겠다." "사람이 나를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 나를 배반하는구나."고 하여 손가락으로 눈 하나를 찔러 멀게 해버렸다. "밖으로 향할 수 없는 분노가 안으로 되돌려진 것이다." (최기숙, <문 밖을 나서니 갈곳이 없구나>) 이후 그는 외눈박이 화가로 살았다.

그는 사람됨이 원래 기상이 높고 거침이 없어서 조그마한 예절에는 스스로 얽매이지 않았다. 일찍이 어떤 집에서 한 현달한 관리를 만났다. 그 관리는 최북을 가리키면서 주인에게 물었다.

"저기 앉아 있는 사람은 성명이 무엇인가?"
최북은 얼굴을 치켜들고 고관을 보면서 되물었다.
"먼저 묻겠는데, 당신 성명부터 말하시오."(조희룡, <최북전>)


최북은 '조선의 카스트제'로 굳어진 신분사회에서 중인이라는 낮은 신분의 처지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화가로서의 자존과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고관들에게 당당할 수 있었고, 강제로 그림을 요구하는 권세가에게는 자신의 눈을 찔러가면서 스스로를 지켜냈다.

그런 속에서도 연마를 거듭하여 그의 그림은 화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각계의 명사들과 두루 교유하였다. 당연히 그림을 찾는 사람이 많았으나 함부로, 아무 때나 붓을 들지는 않았다.

조선후기의 명군으로 알려진 정조의 어록을 모은 <일득록(日得綠)>에는 군주의 언어라고 하기 어려운 대목이 적지 않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사대부(士大夫)들의 처신에 대한 따거거운 발언이다. 사대부는 오늘의 지식계층을 일컫고 최북의 존재를 보여준다.

세속적인 욕망을 초탈하여 그것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외물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진정으로 정신적 자유를 누리게 된다. 진리와 의리를 굽혀 세속의 헛된 명리를 탐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를 가든 명리에 구속받게 되리니, 어찌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세상을 살 수 있으랴!

사대부는 모름지기 세속을 초탈하고 의물의 구속을 벗어난 뒤라야만, 비로소 볼 만한 점이 있다. 한 번이라도 남을 따르려는 뜻이 있다가는, 가는 곳마다 구속되고 얽매이는 것을 면치 못하여, 곧 머리를 들고 일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최북은 자의식이 강한 문인·예술인·풍류객으로 범상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도도하고 오만하고 거칠 것이 없었다. 남들에게는 흠집 투성이의 모자란 인간으로 보였다. 그에게는 어떤 권세도 권위도 '개뿔'로 보였을 뿐이다. 그 대신 예술이 있었고 술과 자연의 산수가 진정한 벗이고 스승이었다.

그는 그림이 팔려서 돈이 생기면 하루에 대여섯 되씩 술을 마셨다. 돈이 없으면 집안에 있는 책을 팔아서 술값을 치렀다. 살림살이가 궁했지만 별로 내색하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그림 가치가 널리 알려져 값이 쏠쏠하였다. 술이 떨어지면 발길 닿는 데로 걸으면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고, 괴나리 봇짐에서 필묵을 꺼내어 그림을 그려 주었다. 치부를 몰랐기에 술값도 남아 있지 않았다.

최북은 자긍심도 대단하여 문장·글씨·그림이 기이하다고 자부하며 삼기재(三奇齎)라는 호를 쓰기도 했다. 서화 수집가인 김광국(金光國, 1727~1797)이 최북의 <운산촌사도(雲山村舍圖)>에 부친 발문이다.

최북은 자가 칠칠이다. 호가 삼기제(三奇齋)인데 문장 글씨 그림 모두 기이하다고 자부하여 쓴 호다. 만년에 사는 집에 호생(毫生)이란 이름을 붙였다. 무슨 뜻이냐고 묻는 자가 있으면 곧잘 속여서 "내가 붓끝으로 생애를 꾸리기 때문이오!"라고 대꾸하였다. 최북이 붓을 빨며 지낸 지 거의 칠십 년인데 화법이 제법 넉넉하고 풍성하다. 그러나 끝내 북종화(北宗畵)의 습기를 벗어던지지 못했으니 안타깝다. 석농(石農) 원빈(元賓)이 쓰다.

최북의 예술혼과 자유정신, 풍류의 생애를 정약용은 다음과 같이 평한다.

최북은 자가 칠칠로 근세의 이름난 화가다. 만년에 한 눈이 멀었다. 드디어 옛날에 끼던 안경을 가져와 착용할 때에는 알 하나를 없앴다. 여기서 그의 성정을 얼추 엿볼 수 있다.

그는 한 쪽 눈을 스스로 버렸지만 그보다 밝고 맑은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을 얻어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술을 마시고 유랑을 하면서 분방한 삶을 여항인으로 살았다.

최북은 출몰연대 미상이지만 대략 1786년 경 74살의 정도에서 '칠칠하게' 또는 '칠칠맞게' 살다 갔다.

최북은 서울에서 그림을 파는 화가
살림살이는 벽만 덩그렇게 선 초가가 전부라네.
문 닫고 자리에 앉아 온종일 산수를 그리는데
유리 안경을 끼고 나무 필통 하나만을 가졌다.
아침에 한 폭 팔아 아침밥을 먹고
저녁에 한 폭 팔아 저녁밥을 먹는다.
추운 날 찾아온 손님을 낡은 담요 위에 앉히니
문 앞 작은 다리엔 눈이 세 치나 쌓였다.(설흔, <조희룡과 골목길 친구들>)

 

태그:#겨레의인물100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