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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와서 두 번째 맞는 겨울이지만, 그리 야무지게 지내지는 못합니다. 벽난로 주변은 장작 부스러기로 늘 지저분하고, 가끔씩 재와 그을음 청소가 귀찮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기름 난로를 하나 샀습니다. 냄새가 심해서 다시 설명서를 읽어 보니 '반드시 실내용 등유를 사용하세요'라고 쓰여있네요. 에구, 보일러용 등유를 쓰면 안 되는 모양입니다.

옥상의 빗물 배관이 막혔습니다. 옆으로 새나와 흐른 물은 그대로 벽에 얼어붙었습니다. 뜨거운 물을 부어서 뚫어보려 했지만 어림없습니다. 날이 풀려 구부러진 홈통 끝부분을 떼어내니 어른 팔뚝만 한 얼음 기둥이 쏟아졌습니다. 속은 후련했지만, 미리 낙엽 청소를 하지 못한 자신을 나무랍니다. 작년에도 그랬거든요.

언젠가부터 냉장고가 굉음을 내고 있습니다. 수평이 맞지 않아서 그런가 하고 여러 번 조정해 봤지만, 그칠 듯 그치지 않는 굉음 소리에 결국은 주방문을 닫아버렸습니다. 그런 바람에 끼니 때를 놓쳐 라면에 식은 밥을 말아서 먹었습니다.  

심야보일러 순환펌프에서 물이 새더니 급기야 누전차단기가 떨어졌습니다. 직접 사서 교체하려다가 눈도 오고 배송받아 고치려면 며칠 걸리기에 수리점에 전화했습니다. 옆에서 도우며 지켜보니 아주 간단한 교체라서 마음을 놓았습니다. 하지만 어이없는 시골 인심, 출장비 바가지를 썼습니다. 다음엔 직접 해보리라 다짐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나쁜 것 빼고는 대체로 좋은 겨울 
 
눈 내린 정원에 꽃 핀 개나리
 눈 내린 정원에 꽃 핀 개나리
ⓒ 김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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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들을 빼면 이 겨울은 대체로 좋습니다. 떠나온 도시에 하나, 살아가는 시골에 하나, 이렇게 고작 두 개의 겨울을 알고 있을 뿐인데도 은연중에 나는 둘을 비교하며 투덜대고 있네요. 시골이어서 불편한 것이 아니라 해보지 않은 것, 써보지 않은 것이라서 느낀 불편이 대부분입니다.

더 매끈한 삶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글거리는 불등걸의 빛깔은 아름답고, 가끔은 라면 냄새가 반가우며, 불편한 것들은 내 손길에 닿아 고쳐질 것입니다. 조만간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날이 오겠지요. 

'자르댕 스크레(Jardin secret)'는 프랑스 출신 피아니스트 리차드 클레이더만(Richard Clayderman)의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곡입니다. '비밀 정원'이란 말이지만 중의적 표현으로 프랑스어 사전엔 '(사람의) 예민한 부분, 내밀한 감정'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자신만의 취향, 깊은 내면의 생각으로 표현할 만큼 정원은 그들에게 소중한 장소인 것이죠.

이 겨울에 개나리가 눈 속에 피어있고 철쭉은 눈꽃을 피웠습니다. 새하얀 잔디밭에 또박또박 몰래 난 고라니 발자국, 바늘잎나무가 힘겹게 이고 있다가 툭하고 내치는 눈 뭉치, 햇볕에 녹아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고드름, 이슥한 저녁이면 오래된 뜰에 하나둘 들어오는 노란 정원등... 나의 비밀 정원은 지금 글을 쓰는 이 문밖에 있습니다.

집에서 느끼는 불편쯤이야 아무래도 좋습니다. 쓸쓸한 겨울 풍경이어야 더 비밀스럽습니다. 적적한 시골 정원의 눈밭은 시 한 수 놓인 화선지가 됩니다.

'새 한 마리만 그려 넣으면 / 남은 여백 모두가 하늘이어라' <화선지, 이외수>

이슥한 밤에도 마당을 하얗게 밝혔던 눈이 한낮의 곁불 같은 햇볕에 거짓말처럼 녹았습니다. 하얗던 수만 개의 씨앗이 숨겨진 땅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 같습니다. 여태 푸르른 치자와 목서, 라벤더는 한숨 돌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주저 없이 소중한 비밀정원의 비밀을, 애틋한 기억의 맨 앞줄에 가져다 놓습니다. 

태그:#정원, #비밀정원, #JARDINSECRET, #시크릿가든, #자르댕스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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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초보 뜨락생활자. 시골 뜨락에 들어앉아 꽃과 나무를 가꾸며 혼자인 시간을 즐기면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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