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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재활사의 말 이야기'는 15년 넘게 언어재활사로 일하며 경험한 이야기들로, 언어치료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닿길 바라는 마음으로 쓰는 글입니다. [편집자말]
사람들은 같은 일을 오래 하면 타성에 빠지게 되는데, 베르니케 실어증 환자들은 내가 타성에 젖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감사한 존재다.

오랜 시간 이 일을 하면서 매번 만난 베르니케 실어증 환자들은 모두 다 달랐으니 말 다 했지. 그 다름은 나를 머물러 있지 않고 고민하고, 찾게 만든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다.

베르니케 실어증 환자
 
베르니케 실어증 환자는 말로 표현하는 것에 비해 듣고 이해하는 것이 더 어렵다.
 베르니케 실어증 환자는 말로 표현하는 것에 비해 듣고 이해하는 것이 더 어렵다.
ⓒ elements.env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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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가 깨어나는 건 기적에 가깝다고 했다. 아니 기적이라 했다. 그러던 A씨가 깨어났다. 감사하게도... 그러나 그는 이후 실어증이 나타났다. 전형적인 베르니케 실어증이.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베르니케 실어증 환자는 말로 표현하는 것에 비해 듣고 이해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래서 치료는 바르게 듣고 이해 후 올바르게 하는 방향으로 목표를 잡는다.

유독 화를 많이 내는 A씨와의 시간은 버거웠다. 오고 갈 수 없는 우리의 이야기 때문에. 조금만 들어준다면 서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텐데 그럴 수가 없었다. 본인이 잘못 알아들었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려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말만 끊임없이 쏟아낸다.

게다가 A씨가 쏟아내는 말도 실어증이 심한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자곤(jargon speech)이 대부분이다. 자곤은 '무의미한 말'로 말소리를 내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말이 아니라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는 마치 외계어 같은 또는 내가 모르는 어느 나라에서 쓰여지고 있을 것 같은 어찌보면 아기들의 옹알이와 유사한 형태로 보면 된다. 

어떤 면에서는 그림이 아예 그려져 있지 않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는 그려진 걸 지우고, 지우면서 다시 그리는 것이 더 어렵다. 베르니케 실어증 환자들은 자신은 문제가 없고, 얘기도 잘 하는데 주변에서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들어서 대화가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이 상대에게 탓이 있다고 여긴다.

대화는 말을 주고 받아야 하는 것인데 귀를 막고 자기 말만 하고, 표현하는 말 마저 의미를 전달할 수 없는 말이 더 많은 상황. 결국 그들의 입장에서 치료사는 아무 문제 없는 자신을 지적하고 무언가를 바꾸라고 하는 미운 상대일 뿐이다.

자, 치료에 감정을 담지 말자. 마음을 다 잡고 기본부터 시작해 본다. 가장 간단하지만 정확하게 내 말을 전달한다. 내 말을 들으라는 신호를 보낸다.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듣게 하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하지만 다시 간단하지만 정확하게 반복해서 내 말을 전달한다. 긴 문장 표현은 혼란만 일으킨다. 2~3어문의 짧지만 꼭 필요한 단어로 구성된 말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치료 과정에서 환자가 잘 들었다고 이해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가장 쉬운 확인 방법은 내가 말한 사물을 고를 수 있는지 여부로 알 수 있다. 나는 찾아야 할 사물의 이름을 들려주고 카드 중에서 선택하게 한다. 아쉽지만 오답이다.

나는 환자에게 다시 간단하지만 정확하게 말한다. 이 때 함께 사용한 몸짓을 보고 이해한 건지, 내 말이 이해가 된 건지 명확하지 않지만 이번에는 정반응이다. 내가 말한 사물을 찾아내었다.

다음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따라 말하기다. 이제 환자와 따라 말하기를 해 본다. 자곤을 사용하는 A씨는 따라 말하기가 어렵다. 내가 3음절 단어를 들려주고 모방을 유도해 보지만, A씨는 5음절 정도의 말소리 낸다. 내가 한 말과 전혀 다른 말이다. 나는 "바나나"라고 말했지만 A씨가 한 말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상황만 보자, 그게 최선이니까
 
치료시 사용되는 카드와 블록
 치료시 사용되는 카드와 블록
ⓒ 황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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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블록을 꺼냈다. 말소리를 인식시켜 주기 위해서다. 1음절에 블록 한 개씩을 책상에 올려 두며 다시 말을 해 본다. '바'라고 말하면서 블록 1개를 놓고, '나'라고 말하면서 두 번째 블록을, '나'를 말하며 세 번째 블록을 놓는다. A씨가 내가 하는 말의 음절수를 시각적으로 보면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음절 수를 인식시키며 따라 말하기를 유도한다.

나는 "바나나"를 말했는데, A씨는 "바도주다어"라고 알아듣는다. 그러나 그 말속에 '바' 자가 나왔다. 첫 글자라도 그게 어딘가. 그러나 갑자기 틀린 게 속상한지, 자신에게 너무 쉬운 활동을 시킨다고 생각하는지 화를 낸다.

욕설은 왜 착어(paraphasia : 생각과 다르게 나오는 말)도 없이 이렇게 정확하게 나오는지, 듣다가 나도 중심을 잃고 욱! 하는 마음이 나오지만 같이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도와주려고 했던 마음이 교만이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환자에게 감정을 투여하지 말 것. 화내는 이유를 모른다고 답답해 말 것. 상황만 보자.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치료적인 접근을 하자. 그게 최선이니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내 말이, 우리의 말이 전해질 수 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자. 모두 다 다르니까 정답은 없다. 지금 이 환자에게 가장 잘 맞는 방법을 찾아내서 효과를 높이는 게 중요하다. 지금 내게 화를 내는 A씨는 나를 비난하는 게 아니다. 감정을 객관적으로 대하지 않고 휘둘리면 치료 시간 내내 감정의 파도를 타야할지도 모른다. 

그림보다 글씨가 더 나을까? 글자로 접근할까?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A씨에게 가장 잘 맞는, 효과가 좋은 접근 방법을 생각해 본다. 지금 화를 낸다고 치료를 그만둘 수는 없다. 반복하면서 좀 더 접근해 가는 것이 최선일 뿐이다.

오늘 이래서 효과가 없는 게 아니고, 오늘 이랬지만 내일은 또 다를 수도 있으니까. 어제가 오늘과 달랐듯이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 블로그에도 함께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베르니케실어증, #자곤JARGON, #실어증, #타성, #감정에휘둘리지말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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