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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31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아래 한노보연)가 젠더와노동건강권센터 출범기념 <일하다 아픈 여자들> 북토크가 진행됐다. 나는 온라인으로 참여했는데 온라인으로도 현장에 온 많은 사람의 열기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날 행사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한노보연의 광야를 본 기분'이었다. 물론 SM 엔터테인먼트가 만든 세계관인 '광야'(가상현실 세계관)와는 다르다. 거기선 뒤를 돌아보지 말 것이 규칙이라지만, 한노보연의 광야에서는 누구도 소외되지 않을 것, 내가 걸어온 길도 끊임없이 돌아볼 것이 규칙이다.

이날 이나래 한노보연 상임활동가는 "젠더와노동건강권센터의 출범은 한노보연이 20년간 해온 노동안전보건운동에 대한 성찰"이라고 말했다. 노동안전보건운동이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은밀한 결탁을 뽀족하게 들여다보지 못했다는 반성과 앞으로 노동안전보건을 젠더 관점으로 바라보겠다는 다짐이었다.

이 책을 기획한 한노보연을 잠깐 소개하자면, 2003년 출범한 이후 꾸준히 노동안전과 노동자의 건강권을 위해 활동해온 단체다. 다양한 직무와 성별에 따른 건강 실태조사와 개선 사업을 통해 '건강'과 '안전'의 개념을 확장해왔다. 2020년부터는 여성노동건강권팀을 구성하여 본격적으로 젠더관점의 연구와 활동을 시작했다. 21년 민주노총 여성국의 의뢰로 시작한 '여성 노동자 일터 내 화장실 이용 실태 및 건강영향 연구'는 화장실이 노동자의 건강권과 밀접한 노동조건이라는 사회적 인식을 만들었다.

이나래 활동가가 말하는 이 책을 기획한 계기(이 일화는 <일하다 아픈 여자들> 10장. 노동하는 모든 몸을 위한 제언에 서술되어 있다.)가 재밌었다. 21년 산업재해 데이터의 젠더공백을 지적한 기사에 달린 댓글이 크게 작용했다고 말했다. 당시 "건설업은 위험, 돌봄은 안전? 성별 편견에 가려진 여성 산재"라는 제목의 기사에 '건설현장에서는 수백 명의 남자가 죽는데, 돌봄을 하다 죽거나 중증 장애를 얻는 여자는 몇이나 되나 어째서 돌봄과 건설노동의 위험을 동급으로 만드나 이런게 페미식 남혐이다' 라는 댓글이 달렸다고 한다.

이 활동가는 댓글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치명적인 장애 혹은 사망사고가 발생해야만 일터의 위험이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인식 ▲건설업 사고 재해자에 여성은 없을 것이라는 인식 ▲여성 다수 일터의 위험을 지적하는 것이 '남성혐오'로 취급되는 인식 등을 바꾸기 위해 이 책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글쓴이들은 이 책을 통해 여성이 남성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기 때문에 여성의 산재가 더 많이 승인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산업재해 예방, 보상 제도와 정책 전반, 그것의 근간이 되는 산재 관련 통계가 애초에 모든 노동하는 몸을 담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여성노동을 통해서도 남성의 과로노동이 보인다. 이날 책에 담긴 이야기를 현장에서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오색찬란 아름다운 오로라가 방사선 덩어리?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일하다 아픈 여자들> 북토크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일하다 아픈 여자들> 북토크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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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노동자 유진 씨는 항공사들의 욕심이 승무원을 병들게 한다고 말했다. 수백 명의 승객을 응대하고 무거운 짐은 실어주고 커튼 뒤 좁은 공간에 구석까지 차있는 물품과 식품을 꺼내고 넣고 나르는 일도 고객의 안전을 지키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승무원의 업무다. 밖에선 화려해 보이는 항공 승무원이 사실은 목부터 발목까지 안 아픈 데가 없는 이유다.

좌석 수를 몇 개만 줄여도 승무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서비스 질이 개선되겠지만 이윤 추구가 제 1순위인 자본주의는 그럴 이유가 없다. 그렇게 일이 고단하고 힘들어도 고객의 인사 한마디에 미소가 나오고 자부심도 느낀다는 유진씨는 자신에게 승무원은 천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노동조합 활동을 하며 작업환경이 조금씩 개선될 때마다 내가 일터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위로받기도 했다고 한다.

자기 산재경험도 덤덤하게 얘기하던 유진씨가 눈물을 흘린 건 동료의 이야기를 꺼낼 때였다. 과거 유진씨와 같은 팀이었던 A씨가 위암 진단을 받았다고. A씨는 95년부터 21년까지 연평균 1022시간을 비행했다. 절반가량은 미주⋅유럽으로 장시간 비행이었는데 미주⋅유럽 노선은 북극항로를 지나간다. 그런데 북극항로를 지날 때마다 승무원들이 감탄을 자아내며 바라본 오로라가 사실은 우주방사선 덩어리였다는 설명이었다.

결국 A씨는 우주방사선 노출로 인한 산업재해를 처음으로 인정받게 되었지만, 이미 그는 위암으로 사망한 이후였다 한다. 유진씨는 동료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함을 표현했다. A씨의 산재신청 이후 '암도 산재다'라는 직업성⋅환경성 암환자 찾기 캠페인을 통해 유진씨도 22년 유방암을 진단받았다.

성냥팔이 소녀는 산업재해 피해자

안데르센 동화 '성냥팔이 소녀'에서 소녀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가정폭력과 추위만이 아니었다. 19세기 성냥공장들은 저임금으로 아동 노동자들을 고용해 유해 물질인 '백린'으로 성냥을 만들게 했다. 백린중독으로 인해 아동들 몸이 망가지면 성냥 몇 갑을 주고 내쫒았다고 알려져있다. 성냥팔이 소녀는 산업재해 피해자이기도 했던 셈이다.

20세기에는 마리 퀴리가 발견한 '라듐'이 큰 인기를 끌면서 식품을 비롯한 생필품 전반에 사용되었다. 라듐의 위험성을 알린 건 시계공장에서 일하던 여성노동자들이었다. 라듐걸스라 불리던 소녀들은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산업재해를 인정받았고 미국 내 노동안전보건운동의 발판이 되었다.

성냥팔이 소녀와 라듐걸스, 그리고 책 <일하다 아픈 여자들>은 일터에서 위험에 노출되는 건 노동시장에서 취약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취약한 노동자에겐 위험을 정의할 권력이 없다고 말한다. 생명보다 이윤이 우선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터의 위험은 노동자의 건강뿐 아니라 인간관계, 삶 전체를 망가트린다.

한노보연의 노동안전보건운동의 'Next Level', 다음 단계는 젠더이다. 생물학적 여성의 성별 안에서도 연령, 계급, 장애, 지역, 성적지향 및 성별 정체성 등의 교차점을 들여다본다. 이 책에 많이 담기지 못한 성소수자 노동자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성소수자 노동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인정받는 일터가 모두에게 안전하고 평등한 일터가 될 수 있다. 산재의 기준이 비장애인성인남성의 몸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듯이 고용과정 전반이 그러하다.

남녀고용평등법은 근로기준법이 여성노동자의 권리까지 담지 못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세계 여성노동자의 날을 따로 기념하는 이유는 남성가장모델을 노동자의 기준으로 삼은 자본과 서구 남성노동자들에 의해 차별 받은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 제도와 정책이 담지 못하는 노동자가 누구인지 찾는 것, 일터에서 취약한 노동자가 겪는 위험과 차별을 드러내 바꾸는 것이 우리의 다음 지향점이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기획, <일하다 아픈 여자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기획, <일하다 아픈 여자들>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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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공공운수노조 이민진 여성국장이 작성하였습니다.


일하다 아픈 여자들 - 왜 여성의 산재는 잘 드러나지 않는가?

이나래, 조건희, 류한소, 송윤정, 이영희, 정지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지은이), 빨간소금(2023)


태그:#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여성노동자건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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