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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줄 왼쪽 첫 번째가 이윤재의 사위 김병제, 네 번째가 조선어학회 간사장인 이극로, 다섯번째가 이희승, 여섯번째가 정인승)
▲ 1945년 11월 조선어학회 재건때의 모습 (앞줄 왼쪽 첫 번째가 이윤재의 사위 김병제, 네 번째가 조선어학회 간사장인 이극로, 다섯번째가 이희승, 여섯번째가 정인승)
ⓒ 조선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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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전통문화에서 되살리고 싶은 덕목으로 선비정신을 꼽는다면 이의를 달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다만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선비(정신)를 말한다. 동양의 오랜 도덕적 가치로 정치인(지도층)의 기본을 수(修) 제(齊) 치(治) 평(平) 네 자로 함축하였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일컫는다.

오래 전부터 '남산골 딸깍발이'란 말이 전해왔다. 가난한 선비를 농으로 부르는 말이다. 옛날 서울 남산 밑에는 가난한 선비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며 맑은 날에는 늘 딸깍딸깍하는 나막신을 신고 다녔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참 선비는 굶어죽어도 빌어먹지 않고 얼어죽어도 겻불을 쬐지 않는다는 말도 전한다. 이를 두고 비실용주의라고 비판하는 시각이 없지 않지만, 곧은 선비의 처신과 결기를 상징한다. 참 선비는 결코 권세나 재물에 위축되거나 뜻을 바꾸지 않는다. 

선비는 때를 만나면 세상에 나아가 뜻을 펴고, 그렇지 못하면 초야에서 자기 몸을 깨끗이 하고 올곧게 산다. 결코 권부에 연연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비린내 나는 무리에 섞이지 않는다. 시문을 하되 음풍농월에 빠지지 않고 불의에는 결단코 침묵하지 않았다.

강폭한 대륙세력과 사악한 해양세력의 틈새에서 4천년 동안 자존이 강한 민족성을 영위해온 데는 선비정신이 큰 몫을 하였다. 조선왕조에서도 삼학사·사육신·생육신·사림파·의병 등 그때그때 이름을 달리하면서 일관한 선비정신이 발현되었다. 조정은 외세에 굴복했으나 재야는 끝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고 치열하게 싸웠다. 그 동력이 바로 선비정신이었다. 

개항과 이민족의 지배, 긴 독재정권의 시달림, 산업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전통적인 선비정신은 크게 설 자리를 잃었다. 효율성과 능률이 가치관이 되고 물신주의와 권력지배가 일상으로 자리잡으면서 기회주의자가 득세하고, 선비(정신)를 마치 구닥다리처럼 인식하는 세태가  되었다. 

'딸깍발이 선비'의 별칭으로 통하는 이희승 선생은 '딸깍발이의 성격'은 "앙큼한 자존심, 꼬장꼬장한 고지식,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는 지조, 이 몇 가지가 그들의 생활신조였다."고 쓴 바 있거니와, 자신이 바로 그 당사자였다. 

일석(一石) 이희승(李熙昇) 선생, 흔히 '마지막 선비'로 불린다. 한민족이 임진·병자 양란 이래 가장 어려웠던 왕조 말기에 태어나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해방정국, 6.25전쟁, 이승만 독재, 그리고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겪으면서 "비리(非理)를 말하지 않고, 불법(不法)을 보지 않으며, 사언(邪言)을 듣지 않는 삼불(三不), 즉 말하는 벙어리, 보는 장님, 듣는 먹추(귀머거리)로 90을 넘겨 살아왔노라." 

일생의 긴 행로에서 그리고 거칠은 시국의 굴곡으로 백로를 자처하던 자들이 까마귀로 변해도 그는 아호인 일석(一石) 그대로, 한 개 돌멩이로 자처하면서 선비의 길을 걸었다. 학문 특히 국어학과 어문학에 열정을 쏟으며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사건으로 3년 옥고를 치렀다. 평생 학자로 살면서 잠시 본인이 '외도'라 칭한 신문사 사장을 지냈다. 하지만 그의 본령은 학자이고 바탕은 선비였다.

그는 '선비정신'을 우리 민족의 불사조라 인식하였다. 끝없는 분란 속에서도 독특한 민족의 생명이 단절되지 않고 계속되었다는 것은 세계사를 통해서 보더라도 손꼽을 만합니다. 보세요. 만주족은 중국 전 영토를 점령하고 천하를 호령했지만 중국문화에 도취되어 녹아버렸어요. 심지어는 만주어도 없어졌습니다. 언어란 것은 단일민족의 강력한 심벌인데 만주족은 그들의 언어, 풍속, 전통까지 중국이라는 커다란 도가니 속에서 녹아버린 겁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 민족을 불사조로 만들었느냐 하는 건데, 그것은 우리 민족성이랄까. 민족의 예지랄까 좌우간 어떤 정신이 꽉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에요.(김광희, <'선비정신' 살아있는 한 우리 민족은 불사조>)

이희승은 우리 민족의 불사조의 원형을 선비정신에서 찾았다. 

이희승 선생은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일제와 싸우고, 이승만의 폭정에 저항하여 대학교수단 시국선언문을 쓰고, 박정희 유신독재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주도하는 등 불의와 싸웠다. 그러면서도 우리말(글)의 연구와 발전을 멈추지 않고 실제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소설가 최일남씨의 평가이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정갈해진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헛된 욕심이 사라진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우리 시대 마지막 선비상이 떠오른다. 그리고 각성한다. '노추'가 득실거리는 세상의 변방을 헤매면서, 이만한 거인의 훈김을 잠시나마 쐰 홍복(洪福)이 얼마나 아름다운 기억인가 깨닫는다.

'선비정신'으로 무장한 지식인이 아니라 출세주의·권력지향의 사이비 지식인들이 득세하는 시대에 '참선비' 이희승 선생의 행로를 찾아 떠나고자 한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이희승, #이희승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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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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