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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공유공간 '너머'의 공동체은행 밴드에 올라온 글.
 순천 공유공간 '너머'의 공동체은행 밴드에 올라온 글.
ⓒ 임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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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이유 없이 제 이야기만을 가지고 저를 믿고 예치를 해주셨던 분과 제 내용에 공감하며, 응원해 주시고 조건 없이 대출을 허락해 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전남 순천시 공유공간 '너머'(아래 '너머')의 공동체은행에서 100만 원 빌려 간 김아무개씨가 돈을 모두 갚으면서 남긴 글이다.

김아무개씨는 '너머'의 네이버 밴드(커뮤니티 플랫폼)에 "시중에 있는 은행처럼 이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 상환해야 하는지 날짜도 정해지지 않은 은행이 있다는 것이 저는 아직도 신기합니다"라며 "오히려 더 책임감을 가지고 상환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주었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조건 없이 도움을 받았다면 그 도움에 대한 노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행동하게 된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대출 이자도 없고, 상환 날짜도 없다니? 아무리 '공동체은행'이라고 해도 대체 어떤 구조로 대출이 이뤄지는 걸까? 아무리 선의로 이뤄진 곳이라고 해도 누군가가 마음 먹고 돈을 빌려가서 갚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닐까? 

오히려 은행 잔금이 늘어난다고? 
 
순천 공유공간 '너머'의 공동체은행의 통장 내역.
 순천 공유공간 '너머'의 공동체은행의 통장 내역.
ⓒ 임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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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의 공동체은행 대출 조건은 하나다. '너머' 네이버 밴드에 가입해 대출이 필요한 사연과 금액, 상환 계획 등을 올리고, 하루가 지난 뒤에도 다른 밴드 구성원들이 반대 의사를 내지 않으면 그것으로 대출이 통과된다. 4일 현재, 밴드에는 40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있다. 

사연과 금액은 실로 다양하다. 휴대폰 요금으로 10만 원, 식비나 교통비로 20만 원, 긴급 생활비로 100만 원, 전세 계약금 부족으로 300만 원. 여기에 며칠까지 상환하겠다는 다짐을 올려두면 밴드 구성원들은 동의한다는 취지로 "좋아요" 이모티콘을 남긴다. 그렇게 글마다 대략 스무 개의 "좋아요"가 달린다. 

이런 절차를 통해 2022년 5월 60만 원 대출로 공동체은행이 시작됐고, 2024년 2월까지 1년 10개월 동안 총 13건 대출이 이뤄졌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돈을 빌려 간 사람들은 상환 계획에 맞춰 돈을 갚았다. 

'너머'의 제안자 임경환(46)씨는 지난 2022년 5월 보증금 30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이던 '너머'의 거처(순천시 주택)가 전세로 전환한 걸 계기로 공동체은행을 시작했다. 갑자기 큰 돈이 필요해진 임씨는 공유공간을 나눠 쓰는 시민들에게 돈을 십시일반 모았다. 

임씨는 그렇게 전세금 명목으로 모인 돈 가운데 남은 269만 원을 어떻게 쓸지 의논하다가 필요한 이들에게 무이자로 빌려주자는 의견을 냈다. 임씨는 4일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당시 제안 배경을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은행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이야기하다가 사람들이 은행에 돈을 맡기기도 하지만, 필요할 때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 위해 은행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현재는 정작 돈이 필요해서 은행에서 돈을 빌려야 할 사람들이 신용도가 낮아서 돈을 못 빌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순천 공유공간 '너머'의 공동체은행에 돈을 예치하고 싶다고 문의해온 사례. 이자 한 푼 주지 않는 은행이지만 이렇게 돈을 넣겠다는 사람이 나타난다.
 순천 공유공간 '너머'의 공동체은행에 돈을 예치하고 싶다고 문의해온 사례. 이자 한 푼 주지 않는 은행이지만 이렇게 돈을 넣겠다는 사람이 나타난다.
ⓒ 임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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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를 아끼는 이들은 이자도 주지 않는 이 공동체은행에 선뜻 돈을 맡긴다. 지난 2월 28일에도 한 시민이 "많지 않은 금액이지만 급히 대출이 필요한 분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서 보탭니다. 잔고가 많으면 좀 더 마음 편하게 빌려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며 공동체은행에 100만 원을 맡겼다. 

그런 이유로 은행의 잔금은 계속 늘고 있다. 처음에는 269만 원으로 시작했지만, 공동체은행을 통해 대출된 금액까지 포함하면 500만 원이 넘는다. 최근 임씨는 늘어난 금액만큼 공동체은행의 돈을 관리하고 논의하기 위해 오픈채팅방을 만들었다. 한 사람이 은행 잔고를 다 빌려 가면 그 뒤에 필요한 사람에게 기회가 없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를 오픈채팅방에서 논의해보고자 한다.

임씨는 "소꿉장난처럼 시작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공동체은행에서 돈을 빌린 사람들은 모두 계획대로 갚았다"라면서 "만일 누군가가 공동체은행의 잔액을 남김없이 빌려 가놓고 갚지 않으면 실험은 끝나겠지만, 일단 최대한 믿어보자는 마음"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세상에는 10만 원이 없어서 동동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정말 급할 때 돈을 빌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 자체가 안심이 되지 않을까"라며 "돈을 빌려갔다가 갚으면서 감사 인사를 남길 때면 계속 안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보람 있다"라고 전했다. 
 
공유공간 '너머'의 풍경
 공유공간 '너머'의 풍경
ⓒ 임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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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씨는 100여 개의 가구가 공유 경제를 직접 실행에 옮기는 일본 미에현의 에즈원 커뮤니티에 다녀온 뒤 2016년부터 전남 순천시에 '너머'를 만들고 '공동체은행'과 같은 공동체 실험을 지속하고 있다. 에즈원 커뮤니티는 돈을 내지 않고 커뮤니티의 물건을 집으로 가져가서 쓸 수 있고, 스스로 시간을 정해 원할 때 노동하는 대안적 공간이다.

"좋은 일 하기 참 쉽지 않나요? 저는 100만 원만 있으면 각자의 동네에서 공동체은행을 할 수 있다고 말해요.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이익에 따라서만 움직인다고 생각하는데, 누군가는 이자도 없이 돈을 공동체은행에 맡겨두기도 해요.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도 있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소중하잖아요. 

저는 공동체은행을 통해 절대적인 신뢰를 실험하는 중이에요. 누군가를 절대적으로 믿으면, 그 누군가가 그것에 맞게 응답해 줄까? 공동체은행의 실험을 통해 돈이 오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연 '모든 사람을 믿을 수 있는가?'라는 실험을 해보고 싶습니다."
 


<공동체은행 활동 내역>(2024년 3월 1일 기준)
시작 : 2022년 5월 18일
시작 금액 : 2,695,100원

- 첫번째 대출
날짜 : 2022년 5월 20일
금액 : 600,000원
사유 : 골반교정 치료비
상환계획 : 6월 10일 일시납
최종 상환일 : 6월 9일

- 두번째 대출
날짜 : 2022년 5월 25일
금액 : 1,000,000원
사유 : 긴급 생활비
상환계획 : 7월 5일부터 20만원 월납
최종 상환일 : 11월 4일
특이사항 : 이 사연을 읽고 누군가가 100만원 예치, 이 분에게 다시 돈을 돌려 드림

- 세번째 대출
날짜 : 2022년 6월 7일
금액 : 1,000,000원
사유 : 공유공간 에어컨구입
상환계획 : 7개월 후 일시납
특이사항 : 이 사연을 읽고 누군가가 10만원 예치, 이 분에게 다시 돈 돌려드림
최종 상환일 : 2023년 2월 28일

- 네번째 대출
날짜 : 2023년 2월 28일
금액 : 3,000,000원
사유 : 전세 계약금 일부 부족
상환계획 : 2023년 4월부터 월 30만원씩
최종상환일 : 2024년 1월 22일

- 다섯번째 대출
날짜: 2023년 5월 11일
금액 : 1,000,000원
사유 : 생활비
상환 계획 : 6개월 이내
특이 사항 : 너머 통장에 잔고가 부족하다는 글을 올리니 부족분을 내고 싶다는 사람이 생겨남
최종상환일 : 2023년 9월 22일

- 여섯번째 대출
날짜: 2023년 5월 23일
금액 : 200,000원
사유 : 군휴가중 식비와 교통비
상환계획 : 근로장려금이 나오는 9월
특이 사항 : 이 사연을 읽고 어떤 분이 10만원을 보내주심. 최종 상환 후 그분에게 다시 돈을 돌려드림
최종상환일 : 2023년 8월 30일

- 일곱번째 대출
날짜 : 2023년 5월 27일
금액 : 250,000원
사유 : 급한 생활비
상환계획 : 3달 간 10, 10, 5만원
최종상환일 : 2023년 7월 28일

- 여덟번째 대출
날짜 : 2023년 6월 25일
금액 : 100,000원
사유 : 휴대폰 요금과 창고 월세
상환계획 : 근로장려금이 나오는 9월
최종상환일 : 2023년 8월 30일

- 아홉번째 대출
날짜 : 2023년 7월 31일
금액 : 600,000원
사유 : 자기를 도와주신 분에게 빌려드리고 싶어서
상환계획 : 매달 21일 10만원씩 6개월
촤종상환일 : 2024년 2월 2일

- 열번째 대출
날짜: 2023년 9월 25일
금액 : 200,000원
사유 : 군휴가중 식비와 교통비
상환계획 : 11월 10일
최종상환일 : 2023년 12월 9일

- 열한번째 대출
날짜: 2023년 12월 24일
금액 : 1,000,000원
사유 : 집 보증금
상환계획 : 2024년 4월부터 매월 20만원씩

- 열두번째 대출
날짜: 2024년 2월 12일
금액 : 1,000,000원
사유 : 시부모님 대출금 상환
상환계획 : 6개월 후 일시상환

- 열세번째 대출
날짜: 2024년 2월 27일
금액 : 1,200,000원
사유: 대출금 상환
상환계획 : 매달 12만원씩 10개월 동안
특이 사항 : 이 글을 읽고 100만원을 예치해 준 분이 계심

현재 잔액 : 2,408,194원  

태그:#공동체은행, #공유공간너머, #에즈원커뮤니티, #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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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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