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25 12:19최종 업데이트 24.03.25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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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국회의원선거 후보자 등록이 시작된 21일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 건물 벽면에 선거일을 안내하는 대형홍보물이 걸려 있다. ⓒ 이정민


정치는 우리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유독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이 평소보다 더 높아지는 때가 있다. 바로 선거철이다. 향후 몇 년 동안 우리를 대표하여 정치를 이끌 사람을 뽑는 시기, 즉 정치 지형에 변화가 발생하는 기간이다. 특히 법률을 만드는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는 여타의 다른 선거에 비해 사람들의 관심도가 높은 편에 속한다.

새로운 변화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 자연히 기대도 실망도 늘어난다. 전자의 경우는 괜찮은데 문제는 후자이다. 후보로 등장한 정치인들의 면면이 실망스러우면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기대를 접는 사람들이 생긴다. 말하자면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등을 돌리는 사람들도 유독 선거철이 되면 늘어나곤 한다. 이는 투표율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2024년 국회의원 선거가 성큼 다가온 지금, 솔직히 말하면 나는 환멸을 느끼는 쪽에 더 가깝다. 느꼈다기보다 몰렸다는 말이 더 맞을지 모르겠다. 선거는 경쟁이고 세력 간의 대결과 승패의 구도로 해석되기 용이한 사건인 건 맞다. 하지만 이번 총선만큼 의제가 실종된 선거가 있었을까. 특히나 거대 양당은 자신들이 선거에서 이겨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면 무엇을 할지 왜 그래야 하는지 제대로 설명하는 모습을 찾기는 어려웠다.

여기에 성평등이나 소수자의 인권과 관련하여 힘을 실어줄 후보를 찾는 건 더욱 힘이 든다. 오히려 그런 가치를 기준으로 볼 때 부적절한 인물이 출마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러니 일찌감치 기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그런 사람이 나만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한동안은 국내 뉴스에 관심이 잘 가지 않았다. 도피하듯 주로 외신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우연히 부고 기사를 하나 발견했다. 자주 보는 뉴스 페이지 상단에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는데 어지간한 인물이 사망한 게 아니면 그러지 않겠다 싶었다.

고인의 이름은 데이비드 믹스너(David Mixner). 지난 11일에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믹스너는 경력이 걸출한 미국의 시민운동가이자 정치 자문가였다. 사망하기 전까지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재선을 돕기 위해 분주히 활동했다고 하니 평생을 그 분야에 매진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자문가로서 이 사람의 가장 화려한 업적은 바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당선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다.

매우 놀라운 인물의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

여기까지 읽으면 미국의 노장 정치인 중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이 있다. 데이비드 믹스너는 활발히 활동하던 당시에도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였다.

믹스너가 주로 활동했던 과거가 지금보다 더 보수적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성소수자에 대해선 더 말할 것도 없다. 커다란 약점을 가진 상태에서 출발선에 섰지만 기라성 같은 경력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믹스너는 매우 놀라운 인물이었다.

이 사람의 경력 중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은 바로 믹스너가 빌 클린턴과 맞선 순간이었다. 믹스너가 빌 클린턴 당선에 지대한 공헌을 하지 않았느냐고? 맞다. 빌 클린턴 대선 캠페인 의장인 미키 캔터가 믹스너에게 선거 캠프 자리를 공식적으로 제안했고 믹스너는 이를 수락했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영입인재였던 셈이다.

믹스너가 캠프에 합류한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믹스너는 게이 커뮤니티를 휩쓴 에이즈 위기와 동성애자 군인이 군대에서 쫓겨나는 문제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믹스너의 오랜 친구인 빌 클린턴은 에이즈 치료제 개발을 위한 대규모 지원과 군대 내 동성애자 복무 금지 정책 철폐를 약속했다.

문제는 클린턴이 약속을 어겼다는 점이다. 그는 동성애자도 평등하게 군 복무를 할 수 있게 하는 대신 군인에게 성적 지향을 묻지 말고 본인도 동성애자임을 말하지 말라는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 정책을 도입했다. 이렇게 되면 동성애자 군인을 색출해서 쫓아내는 건 못하지만 역으로 당사자가 동성애자임을 드러내면 군에서 강제로 전역당하게 된다. 즉 그림자 속에 숨어 살아야 하는 현실은 바뀌지 않는 것이다.

믹스너는 빌 클린턴 정부의 인수위원회에서도 활약할 만큼 정권의 근거리에 있었다. 또한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클린턴의 취임식 무도회 행사에서도, ABC의 유명 프로그램인 <나이트 라인>에 출연해서도 이 정책을 비판했다. 이에 백악관은 분노했고 믹스너와 클린턴 정부의 관계가 끊어졌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백악관이 믹스너의 전화에 더 이상 응답하지 않았다'고 하니 사실 내쳐진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믹스너는 멈출 생각이 없었고 결국 100여 명의 활동가들을 모아 백악관 앞에서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 정책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까지 했다. 그리고 이 시위를 이유로 믹스너는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정치에서 등을 돌려선 안 될 이유
 

2002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게이&레즈비언 빅토리 펀드(현 LGBTQ+ 빅토리 펀드)의 오츠-슈럼 리더십 어워드에 참석한 데이비드 믹스너. LGBTQ+ 빅토리 펀드의 회장인 애니즈 파커는 믹스너가 지난 11일 뉴욕의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밝혔다. 향년 77세. ⓒ 연합뉴스


흥미로운 것은 이후의 이야기다. 정치에 환멸을 느끼는 게 당연해 보이지만 믹스너는 자신의 일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시민운동가로서도 정치 자문가로서도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믹스너는 2007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버락 오바마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얄궂게도 당시 오바마의 경쟁자는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이후 오바마 행정부와 의회는 문제의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 정책을 폐기했다. 그 정책이 만들어진 지 17년 만의 말이다. 믹스너는 자신이 도운 대통령에게 배신당했지만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켰고 결국 그가 남긴 과오를 바로 잡는 데도 성공했다.

무엇이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을까. 클린턴과 등을 진 이후 <워싱턴 포스트>와 한 인터뷰에서 믹스너는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옳은 일을 해야 합니다. 타협하기에 저는 너무 많은 친구들을 땅에 묻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제 파트너도 그런 사람 중 하나입니다. 죽은 이들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대신해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일의 전부입니다."

믹스너에게는 정치를 떠날 수 없는 아주 명확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어쨌거나 그는 자신의 자리에 남았다. 비록 긴 세월과 우여곡절이 사이에 있었지만 원하던 목표도 이루었다. 믹스너는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로서는 최초로 대선 캠페인에서 공식적으로 직을 맡고 대통령을 만드는데 역할을 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 그는 배신과 실망으로 경력이 얼룩지는 와중에도 그 모든 걸 버텨낸 사람으로 더욱 다가온다.

어쩌면 데이비드 믹스너의 삶이 남긴 교훈은 이런 것일지 모르겠다. 우리가 원하는 변화, 원하는 정치인이 언젠 나타날지 알 수 없다. 미래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당장의 환멸에 정치에서 등을 돌린다면 희망하던 것에서 우리는 더욱 멀어질지 모른다. 믹스너는 끝까지 떠나지 않음으로써 이를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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