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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대전 본원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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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조 6천억 원. 전년 대비 올해 삭감된 연구개발(R&D) 예산 액수다. 14.4%라는 사상 초유의 두 자리 수 삭감을 거친 R&D 예산이 현장에 본격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연구현장은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윤석열 정부가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던 신진연구자, 그리고 연구자로서의 꿈을 키우고 있는 학생들의 생계와 미래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KAIST(카이스트) 졸업식에서 울려퍼진 "R&D 예산 복원해주십시오"라는 외침은 이러한 절박함을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이후, 총선을 앞둔 정치권에서는 앞다투어 R&D 관련 정책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정작 미래의 연구현장을 책임져야 할 학생들과 청년 연구자들의 목소리와 요구는 여러 현실적인 벽에 가로막혀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가운데 '카이스트 재학생·졸업생 입틀막 대책위'(아래 대책위)가 출범했다. 졸업식에서 벌어진 소위 '입틀막' 사건의 재발방지, R&D 예산 복원과 R&D 정책의 연구현장 대표성 강화를 위해 모인 KAIST 재학생과 동문들이 만든 단체다. 대책위는 첫 활동으로 R&D 예산 삭감으로 인한 연구현장의 피해사례를 수집했다. 피해사례는 검토를 거쳐 외부에 알리거나, 정책요구에 반영한다는 계획이다.

처음으로 제보를 준 연구자는 KAIST 구성원 메일을 통해 자신을 카이스트 대학원에 재학 중인 석박사통합과정 4년차 대학원생이라고 밝혔다. 관련 내용을 인터뷰 형식으로 정리했다. 

"부족한 연구비 확보 위해 무리한 과제 지시...연구시간 줄어" 
 
2월 16일 대전 유성구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열린 2024년 학위수여식에서 한 졸업생이 윤석열 대통령이 축사를 할 때 R&D 예산과 관련해 자리에서 일어나 대통령을 향해 항의를 하던 중 제지를 당하고 있다.
 2월 16일 대전 유성구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열린 2024년 학위수여식에서 한 졸업생이 윤석열 대통령이 축사를 할 때 R&D 예산과 관련해 자리에서 일어나 대통령을 향해 항의를 하던 중 제지를 당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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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린다. 

"KAIST(한국과학기술원) ○○○학과 석박사통합과정 4년차 대학원생이다." 

- 어떤 분야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지 간단히 설명해달라. 

"실험이 연구 방법의 주가 되는 분야에서 연구하고 있다. 실험 재료와 장비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매번 비싼 실험 재료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달에 한두 번 특정 실험을 위해 백만 원 단위의 재료가 필요하기도 하다. 장비의 경우, 일부는 연구실에서 구매하여 사용하고 있고 일부는 공용 장비를 사용하고 있다. 공용장비를 쓸 때 지불해야 하는 사용료는 연구비 중 시험·분석료 항목에서 지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 R&D 예산이 삭감되기 전후로 느끼는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 

"예산 삭감 이전까지 저희 연구실은 연구비가 어느 정도 확보돼 있는 편이어서 무리하게 과제에 지원하는 일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과제에 무리하게 지원하는 것의 예로는 연구실의 전문 연구 분야가 아닌데도 오로지 연구비를 따기 위해 억지로 끼워맞춘 듯한 연구 과제에 지원하는 것이다. 

R&D 예산 삭감 이후로 저희 연구실은 과제에 지원하는 경우가 체감상 두세 배 많아졌으며 과제 분야 및 주제도 저희 연구실 실정에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최근 제가 지원한 교내 연구비 지원 사업을 보면 다른 연구실의 상황도 비슷할 거라고 유추할 수 있다. 약 1년간 최대 500만 원의 연구비를 지원하는 그리 규모가 크지 않은 연구비 지원 사업이었는데도, R&D 예산 삭감 이전에 비해 경쟁률이 약 세 배 늘어났더라." 

- 연구비가 부족해지면 어떤 문제가 생기나? 정부 R&D 과제에 지원하는 것 외에 연구비를 받을 방법은 없는 건가? 

"연구비가 부족해지면 연구의 모든 방면에서 문제가 생긴다. 실험에 필요한 재료를 구매할 수 없고, 공용 장비를 사용할 수 없으며, 연구자가 인건비를 제대로 지급받을 수 없게 된다. 인건비가 부족해지면 대학원생 신입생, 박사 후 연구원 등 새로운 연구자를 연구실에 들이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정부 R&D 과제 외에는 기업 과제로부터 연구비를 받을 수 있다. 또한 소액이지만 교내 과제로부터 연구비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 R&D 과제 지원이 줄어들면, 많은 연구실의 재정난으로 인해 기업 과제와 교내 과제의 경쟁률이 전보다 높아질 것이고, 모든 실험실이 기업 과제 또는 교내 과제로 연구비를 충당할 수는 없게된다. 특히 기업 과제의 경우, 해당 기업에서 원하는 과제 분야가 정해져 있고, 단기간 내에 성과를 낼 수 있을 만한 과제만 선정될 수 있다. 따라서, 특히 기초과학을 하는 연구실에서는 정부 과제를 대신해 기업 과제를 통해 연구비를 얻기가 어렵다."

- 학생들이 연구와 학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지원서 작성과 같은 행정업무도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된 분들도 많을 것 같다. 예산 삭감 이후에 그와 관련된 문제는 없나?

"연구실마다 천차만별이기는 하겠지만 많은 연구실의 경우, 교수님의 부탁을 받아 학생들이 직접 과제 지원서를 작성하거나 발표 자료를 만드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말 그대로, 과제 지원을 위한 이론적인 배경, 해당 연구실에서 해온 선행 연구, 과제 수행 시 기대되는 효과 등에 대해 글을 쓰거나 사진, 그림 등을 다듬는 거다.

다수의 과제 지원서를 작성하느라 과도한 시간을 할애해서 지도교수님의 지도 시간과 대학원생의 연구 시간 모두 빼앗기는 경우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저는 이번 달에만 연구과제 제안서 두 건을 작성하는 데에 동원돼 실연구시간에 큰 타격을 입었고 휴식시간도 대폭 줄었다." 

'연구비 절감 압박·단기적 성과 압박·연구실 내 스트레스' 삼중고
 
학위수여식 졸업생 강제퇴장 사건이 일어난 KAIST 스포츠컴플렉스 옆에 설치된 연대 메시지 공간.
▲ "입틀막" 피해 졸업생에게 연대한다는 의미로 KAIST 캠퍼스 내에 걸려 있는 리본 학위수여식 졸업생 강제퇴장 사건이 일어난 KAIST 스포츠컴플렉스 옆에 설치된 연대 메시지 공간.
ⓒ 신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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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실에서 느끼는 다른 문제는 어떤 것들이 있나? 

"기초과학 연구를 포함한 많은 연구는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연구비를 꾸준히 투자해야 하는 분야다. 그러나 R&D 예산 삭감으로 인해 기존에 받고 있던 연구비 지원이 중단됨은 물론이고, 당장의 성과가 안 보이는 분야는  앞으로 연구비를 지원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전보다 매우 커졌다. 이로 인해 연구실의 분위기가 날이 서 있다. 특히, 지도교수님께서 눈에 띄게 불안해 하고 계신다. 

연구실의 책임자이신 지도교수님의 불안이 증가하면 그 피해는 대학원생이 고스란히 입을 수밖에 없다. 지도교수님의 불안은 연구비 사용에 대한 부담 전가, 연구 성과에 대한 압박, 이유 모를 긴장감 조성 등으로 대학원생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교수님이 연구비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기존에 문제없이 진행해 오던 연구에 대해서도 연구비를 더 적게 쓸 방법은 없는지, 꼭 필요한 연구인지 의심을 하게 된다. 이미 최소한의 필수적인 비용으로 해오던 연구에 대해서 이런 의심을 받고 연구비 사용을 줄이라는 압박을 받게 되면, 연구를 정상적으로 진행할 수 없다.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그러면 연구자가 원하는 만큼의 실험 설계와 조건 최적화를 하기 어려워진다." 

- 연구비 절감 압박으로 인해 생긴 구체적인 문제 사례를 들자면 어떤 것이 있을까.

"저도 꼭 필요하다고 판단해 연구비를 지출하며 유지해 오던 백업 시스템이 있었는데, 지도교수님께서 연구비 사용에 대한 부담을 대학원생들에게 일부 전가하시는 바람에 그 백업 시스템을 포기하게 됐다. 운 좋게도 백업 시스템이 필요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만약 백업 시스템이 필요한 상황이 벌어졌더라면 더 큰 연구비 지출 혹은 연구 데이터 손실 등으로 이어졌을 거다. 주변에서는 대학원생 인건비 삭감, 구매하기로 했던 연구장비 구매 취소, 연구에 꼭 필요한 일회용 물품 과도하게 아껴 쓰기 등 예산 삭감으로 인해 연구를 원활하게 할 수 없게 된 연구실도 많다." 

- 연구 성과에 대한 압박과 긴장감 조성도 언급을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가. 

"연구 성과에 대한 압박과 이유 모를 긴장감은 당연히 대학원생의 생활에 큰 타격을 입힌다. 교수님의 감정 상태 혹은 비언어적 요소에 영향을 많이 받는 입장에서 매주 연구 성과에 대해 교수님의 눈치를 더 많이 보게 된다. 

마음을 조급하게 먹는다고 연구 성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조금 여유를 가지고 연구에 대한 생각과 계획을 깊게, 오래 하는 것이 연구 성과에 훨씬 도움이 된다. 단기간에 보여주기식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해 무리하다 보면 실험 설계를 비효율적으로 하거나 실수를 하는 등의 일이 벌어지고 만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는 명백하게 연구 성과에 방해가 되는 일이다." 

연구 포기하는 KAIST 학생들
 
윤석열 대통령이 2월 16일 대전 유성구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열린 2024년 학위수여식에 참석해 졸업생, 학부모 등 행사 참석자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이날 한 졸업생이 윤 대통령이 축사를 할 때 자리에서 일어나 "R&D 예산 복원해주십시오"라고 외치려다 대통령 경호원에 '입틀막' 당했다.2024.2.16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2월 16일 대전 유성구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열린 2024년 학위수여식에 참석해 졸업생, 학부모 등 행사 참석자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이날 한 졸업생이 윤 대통령이 축사를 할 때 자리에서 일어나 "R&D 예산 복원해주십시오"라고 외치려다 대통령 경호원에 '입틀막' 당했다.2024.2.16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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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D 예산 삭감에 대한 주변 학생들 반응은 어떤가. 

"R&D 예산 삭감 및 연구 환경 악화로 인해 국내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해외 대학원 진학 혹은 산업계 취직을 선택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있다. 국내 대학원과 해외 대학원 중 고민이 많던 주변의 한 학부생은 국내 R&D 예산이 복구되지 않거나 상황이 더욱 악화돼 예산이 더 삭감될 경우, 국내에서 연구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더라. 국내 연구는 예산 삭감으로 인한 연구 성과 악화, 이로 인한 예산 삭감의 악순환에 빠지고 말 것이라며 연구를 포기하고 산업계로 가는 것이 살길이라는 학생도 있다." 

- 문제 해결을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는 뭐라고 생각하나. 

"R&D 예산은 우리나라 과학과 공학의 기초를 다지는 데에 꼭 필요한 일이다. 국가예산이 부족하다면 꼭 필요한 예산을 삭감하지 말고, 불필요하고 기만적인 감세를 철회하기 바란다. R&D 예산이 꼭 복구되길 희망한다." 

덧붙이는 글 | - 카이스트 재학생·졸업생 입틀막 대책위는 R&D 예산 삭감으로 인해 타격을 본 분들의 제보를 받고 있습니다. 글쓴이는 카이스트 재학생·졸업생 입틀막 대책위 공동대표입니다.


태그:#연구개발, #연구비삭감, #카이스트, #입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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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 학위수여식에서 R&D 예산 삭감 항의 1인시위를 진행했습니다. mingi.shin@alumni.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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