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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술이 좋았다(자료사진)
 한때는 술이 좋았다(자료사진)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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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대의 반은 기억나고 반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만큼 술을 많이 마시고 필름이 자주 끊겼다. 여중, 여고를 아주 조신하게 다녔던 나는 남자 많은 공대에 들어가 제대로 술독에 빠졌다. 술만 마시면 평소에 참았던 말이 터져 나오고 안 추던 춤을 추고 안 부리던 객기를 부렸다. 

술안주로 나온 찌개에서 왼손으론 콩나물을 집어 들고 오른손으론 두부를 집어 들고 절대 만날 수 없는 둘이 찌개 안에서야 겨우 만났다며 슬픈 재회를 시켜주며 혼자 펑펑 울었단다. 그 자리에 있던 친구에게 전해 들은 말이다. 하지만 술만 깨면 다시 조신한 나로 돌아갔고 조신한 내가 답답할 때쯤 난 또 술을 마셨다. 

조신한 여대생과 필름 끊긴 고주망태 사이 

공대에서도 우리 과는 94명 정원에 여학생이 열세 명뿐이었다. 나는 95학번인데, 94학번은 여학생이 네 명이었고, 그 위로는 여자 선배가 두어 명 뿐이었다. 남자 선배들은 여학생 하나를 놓고 서로 자기 동아리에 데려가려고 각축전을 벌였다 

근 20년을 조신하게 살았던 나는 더 이상 조신하고 싶지 않아 입술을 시커멓게 칠하고 10cm 통굽 신발을 신고 노래패에 들어갔고, 극회에 들어갔고 남자들의 술판에 들어갔다. 몇 없는 여자인 덕에 환영해 주는 줄도 모르고 신이 났다. 

대학교 오티 날이었다. 남자에 대한 숫기라곤 전혀 없었으니 공대 학부가 한자리에 모이는 오티에서 너무 많은 남자들을 한꺼번에 보는 일이 부담스러우면서도 꽤나 설렜나 보다. 저녁 술자리 타임이 왔다. 재수를 하는 바람에 같이 재수를 했거나 삼수를 한 동기들끼리 자연스레 같이 둘러앉았다. 

평범한 다수 중의 우리만 특별한 듯 느껴졌고 그때부터 술이 술을 부르는 기적이 일어났다. 소주를 다섯 병쯤 마셨을 때쯤 필름이 끊길랑 말랑했던 내가 '여학생 중에 술로는 내가 제일 잘 나가'를 외치려는데 옆 방에 이미 열 병을 깐 여자 신입생이 있다며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질투보다는 반가움이 일었고, 그 후로 4년 내내 우리는 같은 노래패에서 함께 술을 펐다.

술을 마시면 일단 나는 울었다. 뭐가 그리 서글픈지 눈물부터 흘린 다음에 평소에 못다 한 말을 혀 꼬인 발음으로 쏟아냈다. 선배에게도 동기에게도, 내 딴엔 세게 말한다면서 하고 싶은 말을 많이도 지껄였던 것 같다. 

다음 날 선배들과 동기들은 날 노려보며 씩씩대긴 했지만, 절교를 선언하진 않았다(오히려 측은하게 여기기도 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 채로 나는 오랜 세월 조신함과 필름이 끊겨 아무 소리나 지껄이는 고주망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한 것 같다. 더 이상 술에 취하지 않게 된 건 결혼하고 3~4년 후부터였다. 

소주보다 '김관장', 성토로 시작한 글쓰기 

내가 결혼하기로 선택한 탁구관장 김관장(띄어쓰기상 '김 관장'이 맞지만, 내게는 하나의 특별한 대명사라 띄어 쓰지 않고 '김관장'이라 쓰곤 한다). 

그는 내가 다섯 병의 소주 신화를 말할 때 50병을 마신 일화로 되받아쳤고, 내가 필름이 끊겼을 때 바로 제정신이 돌아올 만큼 꽥 소리를 질렀으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고 술의 힘을 빌려 눈물부터 흘리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내가 에라 모르겠다 맨 정신에 말을 따발총으로 하면 그건 또 누구보다 귀 기울여 잘 들어주었다. 

물어보니, 내가 결코 못 들어줄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별 타격감도 없었으며 들으면 꽤 자기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얘기였단다. 그래서인지 나는 술에 취할 필요가 점점 없어졌다.

더 이상 필름이 끊기지 않고 1년을 맨정신으로만 보낸 어느 날, 1년이 이렇게 길고 알찬 적이 없었단 생각이 들었다. 말하고 싶을 때 말을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난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술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그래서 술을 마시느라 필름이 끊기느라 다음 날 또 숙취로 고생하느라 1년의 반은 헤롱거리는 정신으로 인생을 낭비하고 있었다.

맨정신으로 하던 말들이 또 성에 차지 않게 되던 3년 전부터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김관장에 대한 성토가 글로 쏟아져나왔다. 운동선수 김관장과 글밖에 모르는 편집자 사이에 얼마나 싸울 일이 많았겠는가. 글로 김관장 욕을 하다하다 거의 해소가 될 때쯤 마음의 여유가 좀 생겼는지 달리 쓸 글은 없을까 궁금해졌다.  
 
쓰는 사람 스무 명 남짓이 모여 글쓰기를 함께 하고 서로 다정한 피드백을 남기는 소모임 포스터. 다정함 덕분에 계속 쓰는 원동력이 된다.
▲ ‘같이써요,책’ 챌린지 포스터  쓰는 사람 스무 명 남짓이 모여 글쓰기를 함께 하고 서로 다정한 피드백을 남기는 소모임 포스터. 다정함 덕분에 계속 쓰는 원동력이 된다.
ⓒ 오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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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쓰는 사람들끼리 아예 모임을 만들어서 함께 쓰고, 계속 쓰는 중이다. 함께 쓰니 서로의 글을 기다리고, 다정한 댓글을 달아주고, 내 글에 달릴 댓글을 또 기다리고, 기분 좋으면 대댓글도 달면서 하루를 다정함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렇게 내가 진짜 나이고 싶은 이야기를 통해 사람을 깊이 알아가는 일이 나는 그렇게 좋다.

아니 실은 사람을 너무 좋아하지만 사람에 치이고 사람 때문에 가장 힘들었던 사람들이 글쓰기 소모임에 찾아드는 것도 같다. 함께 쓰는 이들 대부분이 쓰는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편안해지고 속이 시원해지는 경험을 한다. 나처럼 술을 툭 끊기도 하고, 우울증이 걷히기도 하고, 하루종일 실실 웃기도 한다. 혼자 쓰기에는 절대 없는 일,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내게는 필요했던 건가 보다.  

쓰다 보니 편집자 이야기, 육아 이야기, 반려견 이야기 등등 내 안에 글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자꾸만 느낀다. 나는 사실 태어날 때부터 수다쟁이였던 것 같다.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느껴지는 것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수줍은 아이로, 내향적인 아이로, 또 느린 아이로 태어난 데다 사춘기에 아빠 사업이 폭삭 망해 내 욕구를 내비치면 안 되는 말을 듣고, 말 잘 듣는 딸이 되어야 했기에 내 입은 점점 닫혀갔나 싶다.

그런 수다쟁이가 드디어 말을 하고 글을 쓰면서 이제야 하고 싶은 말을 실컷 하게 되기까지, 그간 마신 술값만 해도 얼마일지. 술이 좋았던 게 아니라 술을 마시고 취해야만 세상 눈치 안 보고 맘껏 말할 수 있었던 나를 이제는 고이 접어 날려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나에게 글이 있으니까. 글 덕분에 말할 수 있는 용기까지 생겼으니까. 그러니 나는 오늘도 쓰고 계속 쓴다.

태그:#인생첫책, #술마시는이유, #글쓰기의힘, #김관장, #같이써요책챌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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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호기심 많은, 책 만드는 편집자입니다. 소심한 편집자로 평생 사는가 싶었는데, 탁구를 사랑해 탁구 선수와 결혼했다가 탁구로 세상을 새로 배우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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