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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유리 국립4.19민주묘지
  수유리 국립4.19민주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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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복무를 마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원에 진학하여 민족사학에 관심을 갖고 사서와 씨름하고 있을 즈음 한국 사회는 점점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독재와 부패를 거듭하면서 영구집권을 노렸다. 국민의 신뢰를 잃은 이승만은 1960년 3·15 부정선거를 획책하고, 3인조와 5인조로 불리는 공개투표를 통해 승부를 조작했다.

국민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고등학생들이 먼저 침묵을 깼고, 대학생들이 선두에 나섰다. 마산 시민들의 위대한 저항에 이승만의 검·경은 시위자들의 호주머니에 용공 삐라(전단)를 몰래 넣어 놓은 뒤에 이를 빌미로 이들을 좌경으로 몰았다. 지금 보면 얼토당토않은 일이었으나 이는 이승만 정권이 12년 동안 써먹은 수법이었다.

마침내 1960년 4·19 시민·학생혁명이 일어났다. 강만길의 고향인 마산에서 첫 봉기가 시작되고, 강만길의 모교인 고려대 학생들이 궐기에 앞장을 섰다. 학구에 매진하던 강만길은 현실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다. 기성세대들은 대부분 시국에 분개하면서 직접 행동에는 선뜻 나서지 않았다.

4월 25일, 4월 혁명의 기폭제가 된 교수단 데모가 있었다. 강만길은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음 날 출근해서 보니 계엄군이 출동했지만 민중 데모를 강압할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권좌를 유지한 채 사태를 수습하려는 듯했으나, 25일의 교수 데모가 사태를 전환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동숭동에 있던 서울대학교에 시내 각 대학의 교수들이 모인 후, 노(老) 교수들이 선두에서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종로거리를 행진하는 모습은 정말 감격적이었다.

대학원에 적을 두고 있는 학문 지망생으로서 최고 지성인들의 용기 있는 행동을 보고 느낀 바가 컸다. 고려대학교 교수로는 이종우, 김효록, 이상은, 정재각 등 몇 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당시 성균관대학교 교수 임창순 선생이 쓴 것이었다. 이 기념비적인 플래카드를 지금 어느 사람이 보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마땅히 민주화운동기념관 같은 데 보관되어야 할 것이다. (주석 1)

이때 강만길은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속된 공무원 신분이라 시위의 대열에 뛰어들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건의 진행 과정을 현장에서 똑똑히 지켜보았다. 이때 사학도로서 민중의 힘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한편 중앙청 앞쪽에서도 총소리가 요란해서 급히 달려가 봤더니 현 정부 청사 건물이 선 자리에 있었던 경찰 무기고에 들어가려던 학생들도 총을 맞고 쓰러지는 것이었다. 데모대와 흰 가운을 입은 의과대학생들이 희생자의 시체를 메고 데모를 계속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의 프레스센터 자리에 있던 서울신문사와 반공청년단 건물이 불타기도 했다.

공무원 신분으로 대학생 중심의 데모 대열에 직접 참가하지는 못하고 한 사람의 관찰자가 된 처지였지만, 왠지 이 엄청난 역사 현장의 주체가 아니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역사 공부를 하면서 민중이란 말을 예사로 썼지만, 정말 역사적 의미의 민중의 힘을 절감한 현장이기도 했다. 이 4·19 날의 현장 경험이 이후의 역사 공부에 크게 영향을 미쳤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주석 2)

그는 뒷날 대학에서 현대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4·19의 역사적 현장에 함께하지 못한 것에 심리적 부채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4·19 국립묘지가 있는 수유리에서 40여 년을 살면서 거의 매일 아침 영령들이 안장된 깨끗하고 조용한 묘지에 가서 한 시간 이상 걷는 일이 일과처럼 되었다. 어느 일요일 초등학생 손자를 데리고 4·19 묘지에 산책 갔다가 그 많은 무덤들이 묻히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모셔진 영정들을 보여 주었더니 "할아버지는 그때 무엇을 했습니까"하고 물어서 가슴이 뜨끔하기도 했다.

4·19 때 부상했다가 요사이 작고한 사람들의 새로운 무덤이 조성되는 것을 볼 때마다 치열했던 1960년 4월 19일이 어제 일처럼 떠오르면서 가슴 뜨거워짐을 느끼곤 한다. 4·19가 아직도 역사로서 소화되지 못한 탓인지 모르겠다. (주석 3)

그는 4·19를 혁명으로 명명하는 데 주저한다. 4·19 주체세력이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후 정권을 쥐고 소기의 과업을 달성했다면 당연히 혁명이 될 수 있었겠지만,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기만 하고 정권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혁명에 필수인 지배계급의 교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혁명'이라고 따옴표를 붙여 불렀다. 그러면서도 4·19 후 전개된 민족통일운동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한다.

지금까지 4·19 '혁명'은 혁명이나 의거로 불리면서 그 반독재운동 측면만이 주목되었습니다. 그러나 4·19는 반독재 운동인 동시에 바로 평화적 민족통일운동으로 연결되었음이 중요합니다. (주석 4)


주석
1> 위의 책, 148쪽.
2> 위의 책, 147쪽.
3> 위의 책, 149쪽.
4> 강만길, <4·19 '혁명'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일까요>, <20세기우리 역사>(강만길 저작집 12), 창2018, 36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강만길평전, #강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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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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