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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9일 저녁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9주년 기념 특별 강연회에서 '국민의 정부'의 업적과 역사적 성격에 대해 특강하고 있다.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9일 저녁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9주년 기념 특별 강연회에서 '국민의 정부'의 업적과 역사적 성격에 대해 특강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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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 살이 된 강만길은 1961년 1월에 장성애(張星愛)와 결혼하고 안암동 고려대학교 근처 셋방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한국 사회는 물론 그에게도 향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합법 정부를 타도하고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군부는 정통성을 획득하고자 여러 가지 방책을 내걸었다.

공공기관에서 군 기피자를 색출하는 것도 그중의 하나였다. 문교부 소속 기관이었던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군대를 기피했던 직원들이 사표를 내고 국토개발단에 끌려가 교육을 받아야 했다. 직원 중에 군대를 갔다 온 사람은 강만길뿐이었다. 이승만 정권 시대에는 병역 문제가 부패의 온상이었다. 쌀 몇 가마에 입대가 면제되기도 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군 기피자 색출로 쑥대밭이 되었다. 윗자리를 채울 직원이 없을 지경이었다. 강만길은 촉탁 직원으로 입사한 지 2년여 만에 편사 주사와 사무관급인 편사 관보를 거쳐 서기관급인 부편사관으로 고속 승진하는 행운을 누렸다. 학도의용군에 다녀왔다는 사실로 병역 면제를 받았다면 역사학자 강만길은 탄생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군사정권은 공무원 교육원을 설치하고 서기관급 이상의 고급반 교육을 실시했다. 이른바 '혁명정신'을 공직자들에게 주입한다는 명분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그가 1기생으로 차출되어 교육을 받았다. 군부 세력의 쿠데타가 안착되면서 정부의 각 기관이 군정 체제로 바뀌었다. 국사편찬위원회도 이에 따랐다.

연구기관 같던 국편도 군사정권 시기가 되면서 분위기가 많이 바뀌고 업무도 많아져 갔다. 연구기관의 성격이 점점 약해지고 관청적 분위기가 짙어져 갔다. 그런 한편 군사 쿠데타로 성립된 박정희 정권은 해방 후 처음 성립된 이승만 정권도, 4·19 '혁명'으로 성립된 장면 정권도 하지 않은 독립유공자 표창을 하기로 했고, 그 조사 실무가 국편에 주어지기도 했다. (주석 1)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데다, 대통령 박정희는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기 때문에 군사정권은 권력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이승만과 장면 정권에서 해야 할 과제였는데 이를 회피해 온 것을 박정희가 서두른 것은 다소 뜬금없는 일이었으나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환영했다.

그런데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에 사학자 이병도가 참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이병도가 어떤 사람인가. 먼저 그의 주요 친일 행적을 간단히 살펴보자.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활동하면서 아마니시(今西龍)와 함께 <조선사> 제1편 <신라통일 이전>, 제2편 <신라통일시대>, 제3편 <고려시대>의 편찬을 담당했다. 수사관보로 재직하던 1926년 1월 조선사편수회 소속 학자들의 공동 연구기관인 조선사학동고회의 편찬원을 맡았다.

1930년 8월부터 1939년 10월까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와 조선총독부·조선사편수회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청구학회 위원을 지냈다. 청구학회는 조선과 만주를 중심으로 한 극동문화 연구를 표방하여 조직한 학술연구 단체로 최남선·이능화·신석호 등이 참여했으며, <청구학총>을 발간했다. (주석 2)

군사정부가 표창하기 위한 독립유공자 선정의 실무작업을 하면서 심사위원에 친일 행위자들이 참여하게 되는 역사의 모순에 가슴 아팠던 강만길은 뒷날 노무현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한다.

그는 학구파에 속한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하면서도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해 고려대 대학원에서 <조선왕조 전기의 공장(工匠) 연구>로 문학석사 학위를 받고, 한국사학회 연구지 <사학연구>(제12호)에 이를 발표했다. <사학연구>는 신석호를 중심으로 구성된 한국사학회가 1958년부터 간행한 학술지였다. 강만길은 소장학자로서 이 간행물의 편집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사학연구>는 비록 국편이라는 기관을 배경으로 하여 간행되는 학술지이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해방 직후에 대학에 들어가서 대개 6·25 전쟁 전후에 졸업한, 해방 후 제2세대라 할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역사 연구지라 할 수도 있다. 앞으로 우리 현대사학사가 좀 더 상세히 정리되면 이들 두 세대 연구자들 사이의 학문 경향의 차이점과 발족 당시의 <역사학보>와 <사학연구>의 차이점이 어느 정도나마 논의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주석 3)

1964년,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새로운 동아시아 전략의 일환으로 한일 간의 국교정상화를 추진하라는 압력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른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야당을 비롯해 학생들의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었고, 이는 종교계와 문화계를 포함한 사회 각계로 파급되었다. 이 사안은 특히 사학과 교수들에게는 뜨거운 현안이었다. 그동안 강만길이 속해 있던 국사편찬위원회는 신석호가 사무국장을 내놓고 편찬과장이던 김성균 교수가 후임으로 일하고 있었다. 김성균은 한국사학회 이사장도 맡았다.

마침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 체결이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되어 갔고 역사학회 등 학술단체들이 한일협정 반대성명을 냈다. 한국사학회도 편집위원들을 소집해서 반대성명을 내기로 결정했는데 다음 날 김성균 이사장이 독단적으로 반대성명을 내는 것을 취소했다.

이에 편집위원들이 모여 김성균 이사장의 독단적 행동을 규탄했는데, 특히 편집위원장 김성준 교수의 항의가 거셌다. 결국 이사장을 제외한 편집위원들이 다시 모여 반대성명을 내고 모두 편집위원직을 사퇴했다. 김성진 편집위원장은 이 일 때문에 결국 이화여자대학 교수직을 물러나야 했지만, 생각을 굽히지 않았고 지방대학을 전전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한 교수들은 이후 상당 기간 외국 나들이가 금지되기도 했다. (주석 4)

강만길도 이때 <사학연구>의 편집위원에서 물러났다.


주석
1> <역사가의 시간>, 158쪽.
2> <이병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 2>, 민족문제연구소, 2009, 876쪽.
3> <역사가의 시간>, 165쪽.
4> 위의 책, 168~16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강만길평전, #강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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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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