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포스터

▲ 명량 포스터 ⓒ CJ ENM

 
479년 전 오늘인 1545년 4월 28일, 이순신이 이 땅에 났다. 지금의 인현동 자리인 서울 건천동에서 하급 관료이던 이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것이다. 두 차례 왜침에서 조선을 구하고 오늘날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영웅으로 추앙하는 그의 탄생이었다.
 
부모를 따라 어려서 충청남도 아산 땅으로 옮겨간 그는 나이 서른둘이 되어 무과에 급제한다. 병과 4등으로, 갑과와 을과엔 들지 못하고 중간보다는 조금 나은 성적이었다. 그해 무과 합격자 33명 중 12위, 병과급제자이니 만큼 하급군관부터 관직을 시작해야 했던 이순신이다.
 
그의 관직생활은 그야말로 험난했다. 고지식한 성향 탓에 상관의 그릇된 행태를 지적하거나 관행이던 일에 저항하기 일쑤였다. 인사를 담당하는 훈련원 봉사시절엔 병조정랑 서익이 지인을 참군으로 특진시키려 하자 반대하다가 좌천되었다. 이때 서익이 이순신을 뜰아래 세워두고 힐책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제 뜻을 꺾지 않았다.
 
이후 발포 만호로 승진해 있을 때는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영내 오동나무를 베어가려 하였다. 이때도 이순신은 나라의 물건을 사사로이 쓸 수 없다 하며 성박이 보낸 심부름꾼들의 앞을 막아섰다. 성박의 후임으로 온 신임 좌수사 이용도 이 이야기를 듣고 이순신을 해하려 들었으나 주변의 만류로 마침내 이순신을 다시 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우리는 이순신을 어디까지 아는가
 
명량 스틸컷

▲ 명량 스틸컷 ⓒ CJ ENM

 
이순신의 이 같은 태도는 못난 상급자들에게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던 듯하다. 앞에 언급한 서익이 훗날 이순신을 음해하여 그는 다시 만호직에서 봉사직으로 강등을 겪는다. 7년 뒤엔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분전했음에도 상관이던 함경북병사 이일의 왜곡된 장계로 백의종군의 치욕을 당한다. 거듭 상관과의 분란을 겪던 이순신은 왜침이 눈앞에 다가온 1590년 이후가 되어서야 선조의 발탁에 의해 해군 중추로 급속 승진한다. 마침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평균적인 한국 국민이 이순신에 대해 아는 것은 여기부터다. 1591년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이순신이 이듬해 임진년 왜침을 맞이하여 대활약하는 이야기 말이다. 판옥선을 확충하고 거북선을 개발했으며 엄정한 수군 훈련과 군비확충을 통하여 1년 만에 전라좌수군을 정예화한 그다. 마침내 왜침이 이뤄지고 이순신은 저의 수군을 몰고 나가 연전연승의 쾌거를 올린다. 그의 활약 덕분에 조선은 제해권을 확보하고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 병참에 반드시 필요한 서해를 확보하지 못하고 몽진한 선조도 붙잡지 못한 왜군은 더 이상의 진군을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역사는 이순신의 이야기를 그저 찬란하게만 빚지 않았다. 조정의 갈라진 파벌은 이순신에게 가혹했다. 의심 많고 어두운 군주 또한 구국의 영웅을 용납지 않았다. 왜 육군의 진군을 막고 왜 수군을 부산에 가둔 채 한산도에 또아리를 틀고 기회를 엿보던 조선 함대를 향하여 어째서 나아가 싸우지 않느냐는 질책이 잇따랐다. 마침내 이순신은 소환돼 고문을 겪고 원균의 대패 뒤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는 것이다.
 
왕은 수군을 폐하라 했지마는
 
명량 스틸컷

▲ 명량 스틸컷 ⓒ CJ ENM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은 바로 이 지점에서 첫 작품의 막을 올린다. 17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아 역대 한국영화 흥행순위 1위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명량>이 바로 그 영화다. <명량>은 백의종군 뒤 삼도수군통제사의 직책을 받아든 이순신의 이야기다. 임진년 대승 뒤 부산 공략을 위하여 애써 모은 300척의 대함대가 모조리 수장된 뒤다. 어디 함대뿐이었으랴. 그가 길러낸 장수며 정예 병사가 대부분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 수군도, 병졸도 없는 수군통제사가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그러나 이순신은 주저앉지 않는다.
 
임지로 가는 길을 길게 늘여가며 하동부터 구례, 곡성, 순천, 보성 등지를 돌아 싸울 장정을 모집한다. 칠천량 대패에 휩쓸리지 않고 무단 탈주한 배설로부터 12척의 배도 수습한다.
 
이때 선조가 또 한 번 오판을 내려 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조서를 내리지만, 이순신은 저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나이다'는 장계를 올린다. 백의종군 뒤 다시 한 번 왕명에 반하는 장계를 올린 그는 그가 아니었다면 반드시 패했을 명량 울돌목으로 나선다. 최소 330척, 최대 500척에 이르는 대규모 왜 수군을 아군 함선 13척(장계 이후 한 척 보강)으로 맞선 전설의 전투다.
 
정유년 재침해온 대규모 왜 수군을 연전연패하며 사기가 꺾일 대로 꺾여 있는 조선수군이 맞이한다. 한눈에도 절대적 열세인 상황에서 이순신(최민식 분)은 대장선에 타고 전장 가운데서 분투한다. 영화 속엔 신기에 가까운 전략전술도, 신화적인 용맹도 없다. 피칠갑을 한 채 적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무장과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눈앞의 적을 베는 병사들, 그들의 승리를 소망하는 백성들이 있을 뿐이다. 대장선 뒤 저 멀리엔 장군을 나몰라라 하고 떠 있는 12척의 전함이, 또 겁을 잔뜩 집어먹은 장수와 병사들이 있다. <명량>이 그리는 건 전설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전장이다. 이순신이 마주했던 절망의 언덕이다.
 
479년 전 오늘, 이 땅에 천운이 내렸다
 
명량 스틸컷

▲ 명량 스틸컷 ⓒ CJ ENM

 
시작부터 결말이 정해져 있다 여겼던 싸움이다. 왜도, 심지어는 조선 장수들조차 조선의 패배가 기정사실이라 여겼다. 그 치밀한 이순신이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말 밖에 꺼낼 수가 없었던 전투였다. 그 절망의 언덕에서 어떻게 희망을 구하였는가, 그것이 <명량>의 관심이다.
 
영화는 그 답이 이순신의 특출난 리더십, 또 민중들이 모아 비춰낸 귀한 마음에 있다고 말한다. 짙게 드리운 두려움을 한 줌의 용기로 변화시키고 그 작은 용기를 키워내 국면을 단박에 전환시킨 이순신의 리더십이 영화 내내 홀로 빛난다. 감독은 장수들이 저 멀리 물러난 가운데 절벽 위에 올라 한 마음으로 승리를 기원하던 백성들의 귀한 마음 또한 기적적 승리에 한 몫을 담당한 것으로 그려낸다. 명량의 회오리바다와 대장선의 위험을 알린 백성들의 몸짓 가운데, 무엇이 더 천운이었느냐 묻던 이순신 장군의 물음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그 끝을 맺는다. 천운이 따라 이길 수 있었던 승리, 무엇이 더 천운이었나.
 
명량해전으로부터 427년이 흐른 오늘이다. 오늘에 이르러서야 이 영화의 마지막 질문에 나는 확실히 답할 수 있다. 가장 큰 천운은 이순신이란 인물의 존재다. 그가 아니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다시 쓰일 밖에 없었을 테다. 임진년과 정유년의 두 차례 전쟁에서 제해권을 얻지 못하였다면, 또 선조의 명에 따라 수군을 해체했다면, 명량으로 나아가 싸우지 않았더라면, 그 전쟁에서 다른 12척처럼 물러났다면, 그랬다면 조선은 바다를 지키지 못했을 테다. 전라도를 지키지 못했을 테다. 조선은 고립돼 짓밟히고 명은 후퇴해 새로 전선을 짜고 마침내 한반도는 왜의 땅으로 전락했을 테다. 그래서 이순신은 천운이었다. 오늘의 우리가 기꺼이 기념할 영웅이었다.
 
479년 전 오늘인 1545년 4월 28일, 이순신이 이 땅에 났다. 아무리 보아도 그것은 천운이었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명량 김한민 최민식 류승룡 김성호의씨네만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