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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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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기누설인데, 수능 감독 요령에 대해 교사들 사이엔 공공연한 비밀이 하나 있다. 당일 감독관 업무를 수행하는 도중 웬만하면 수험생의 부정행위를 단속하지 말라는 것이다. 시험 중 부정행위는 예방하는 것이지 적발하는 게 아니라는 선배 교사들의 경험칙이 뒤따른다.

애써 부정행위를 적발해도 철저한 감독에 대해 찬사를 듣기는커녕 온갖 번거로운 업무를 떠안게 된다. 감독관으로서 부정행위의 구체적인 내용을 소명해야 하는 일부터 만만치 않다. 자칫 소송으로 번질라치면 해당 수험생, 보호자와의 지루한 법정 공방을 벌여야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확연한 부정행위를 나 몰라라 해서도 안 된다. 예컨대, 시작종이 울리기 전에 문제지를 펼쳐 보았다든지, 종료령이 울린 뒤에도 답안을 제출하지 않고 마킹을 계속하는 일 등을 묵인했다간 큰코다친다. 시험실 내 다른 수험생들로부터 신고당하기에 십상인 까닭이다.

교사들이 수능 감독관 차출을 꺼리는 이유는, 이른바 '매뉴얼' 이외의 그 어떤 행동도 용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안내 방송에 따라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여야 한다. 방송보다 먼저 실행하면 시험에 방해됐다고 항의하고, 늦는 경우엔 아예 법적 소송을 당할 수도 있다.

당일 수험생들은 한결같이 '수능 대박'을 외치지만, 감독관들은 '수능 무탈'만을 기도한다. 탐구 영역까지 아무 일 없었다고 안도하긴 이르다. 말 그대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수능 직후 수험생들이 제기한 온갖 민원이 다 해결되어야 비로소 끝난 것이다.

수능과 다를 바 없이 깐깐해진 교내 시험

감독 업무가 다소 느슨했던 학교 시험도 이젠 수능과 별반 다를 바 없이 깐깐해졌다. 감독관 입실부터 문제지 배부와 수합, 문항 정정 등에 이르기까지 교사의 조그만 실수에도 곧장 민원이 제기된다. 종료 시간을 잘못 알려주었다가 봉변을 당한 사례는 뉴스거리도 못 된다.

문항의 오류는 물론, 단순 오탈자도 미리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시험의 공신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일뿐더러 추후 재시험을 치러야 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학교마다 방과 후에 교사들이 야근까지 해가면서 교과별로 문제지를 교차 점검하는 건 이젠 필수 과정이 됐다.

교사의 출제 오류로 빚어지는 사달은 아이들과 학부모로부터 민원이 제기될 확률이 100%다. 예상보다 결과가 나쁜 경우 좋은 핑곗거리가 되고, 의사가 관철될 때까지 항의가 빗발친다. 학부모까지 가세하게 되면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못 막는' 일로 비화하기도 한다.

단순 오탈자로 인한 사소한 오류일지라도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재시험을 치르는 게 보통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 상수일 리는 없다. 만약 해당 문제를 맞혔던 아이가 재시험에서 틀리게 되면 또 다른 문젯거리가 될 테니 모두가 맞힐 수 있도록 쉽게 출제하는 게 불문율이다.

이든 저든 평가의 변별 기능이 무력화하는 것이어서 문제의 소지가 있다. 하여 학교는 평가와 관련된 민원이 없도록 출제 과정부터 시험이 종료될 때까지 총력을 다하고 있다. 연중 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연수 프로그램 중 빈도가 가장 높은 것도 평가와 관련된 내용이다.

마치 평가가 교육 전체를 틀어쥔 형국이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대입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듯, 교내 시험이 연간 학사일정의 중심이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는 물론, 수능 모의평가 날짜에 맞춰 창의적 체험활동과 단체활동 등 다른 교육과정이 '종속 변수'처럼 연동된다.

드물게는 교내외 시험 대비를 위해 소풍과 체육대회, 심지어 수학여행이나 수련회까지 학교장 재량으로 학사일정에서 빼버린 고등학교도 있다. 대입 진학 실적이 학교 교육의 '지상 목표'임을 공공연히 드러낸 셈이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와중에 우리 교육은 껍데기만 남았다.

교내 시험 중 부정행위가 접수됐다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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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교내 시험 중 부정행위가 접수됐다. 교실 내 동급생이 감독관에게 신고한 것이다. 종료령이 울렸는데도 펜을 놓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규정에 따라 종료 3분 전에 답안지 교체가 불가하다는 안내와 함께 시험 종료가 임박했음을 알리는데, 안내 방송을 놓친 모양이다.

온전히 그 친구에게 귀책 사유가 있으므로, 학교는 규정에 따라 조치하면 된다. 자백으로 사실 확인이 끝났으니, 조만간 학업성적관리위원회가 열릴 테고 해당 시험 과목은 0점 처리될 가능성이 높다. 조금 가혹하다 싶지만, 규정대로 처리하는 게 학교로선 뒤탈이 없다.

부정행위 관련 규정은 수능의 그것과 거의 똑같다. 굳이 다른 게 있다면, 수능과 달리 문제지의 표지가 없어 배부 뒤 첫 페이지의 문제를 시작종이 울리기 전에 흘깃 훑어볼 수 있다는 것 정도다. 답안지를 문제지 위에 올려 보지 못하게 하지만 완벽하게 막을 순 없다.

스마트폰이나 스마트워치를 소지하는 경우는 말할 것 없고, 책상 안에 시험 과목 관련 교과서나 공책이 들어 있는 경우도 부정행위다. 시작종이 울리기 전에 펜을 들어도 안 되고, 도중에 화장실에 가는 것도 금지된다. 수학 영역 시험 때 연습장을 꺼내 푸는 것도 안 된다.

전자기기 소지 사실이 나중에 발각되면 당일 치른 모든 시험이 0점 처리된다는 규정도 있다. 부정행위는 아니지만, 컴퓨터용 수성 사인펜을 사용하지 않거나 서술형 답안을 연필 또는 빨간색 볼펜으로 적은 경우에도 0점을 받게 된다. 학교에서 이토록 촘촘하고 엄격한 규정은 찾기 힘들다.

커닝보다 성적 강박에 시달리게 한 사회가 더 나쁘다

시험 때는 친구도 없다. 1~2점 차이로 등급이 갈리는 한 줄 세우기 경쟁에서 친구는 수많은 경쟁자 중 한 사람일 뿐이다. 감독관의 눈엔 별 게 아니다 싶은 것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부정행위 아니냐며 신고한다. 수험생으로서 그로 인해 관계가 소원해지는 건 차후 문제다.

부정의 반대말은 공정이다. 시험에 대입하면, 정해진 규정을 어긋남 없이 지킨다는 뜻이다. 사용할 볼펜의 색깔까지 지정해 놓을 만큼 지나치다 싶은 규정도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당연시된다. 공정에 대한 가치가 강조될수록 규정은 더욱 세세해지고 엄격해진다.

규정의 교육적 의미와 영향 따위를 따져볼 겨를조차 없다. 일부 교사들조차 야멸차고 맹목적이라고 해도 '공정하게' 순위를 매기려면 불가피하다고 여긴다. 시험을 통해 계량화된 점수로 아이의 역량을 판단할 수 없다고 성토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며 이내 고개를 떨군다.

이 와중에 커닝하다 들킨 '간 큰' 아이가 적발됐다. 걸리면 0점 처리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내신 등급을 위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을까. 그의 낯빛에는 성적 강박에 따른 불안과 초조로 가득하다. 조마조마하며 커닝 페이퍼를 만들었을 그가 되레 가엾다는 생각마저 든다.

손에 장갑을 끼거나 책상 위에 손수건을 올려놓은 채 응시하는 아이들이 종종 눈에 띈다. 긴장하면 손바닥과 얼굴 등에 땀이 흐른다고 하소연한다. 예전엔 수능 시험장에서나 볼 수 있었는데, 요즘 들어선 교내 시험에서도 흔히 보이는 풍경이다. 내신이 수능만큼 중요해져서다.

꼼꼼한 규정과 깐깐한 감독에 몽니 부릴 일은 아니다. 다만, 이것이 과연 공정한 경쟁을 위한 것인지, 나아가 교육의 본령에 부합하는지 자문해 봐야 할 때다. 시험 한 방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후진적인 사회 구조는 방치한 채, 시험의 공정성에만 매몰되는 건 몰상식한 처사다.

커닝은 나쁜 짓이다. 그러나 아이들을 십여 년 동안 성적 강박에 시달리게 만든 사회는 더 나쁘다. 종일 손에서 장갑을 벗지 못하는 아이와 신용카드 크기의 포스트잇에 교과서 내용을 옮겨놓은 아이, 친구가 커닝했다고 스스럼없이 신고하는 아이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의 가치관이 학교 교육을 짓누르는 이 강퍅한 사회가 아이들을 병들게 하고 있다. 쇠고기 부위별로 품평하듯 애먼 아이들을 등급으로 갈라치는 게 과연 교육일 수 있을까. '1등급 학생'이라고 불리는 게 소원이라는 한 아이의 말이 그저 참담할 따름이다.

태그:#학업성적관리규정, #경쟁교육, #각자도생, #부정행위, #평가공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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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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