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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플루트 플레이어’, ‘종달새’ 등의 수필로 잘 알려진 피천득 선생이 지난해 성탄절을 맞이하여 동화집 <어린 벗에게>(여백)를 펴냈다. 92세의 나이에 동화집을 새로이 펴낸 사연이 궁금해서 반포의 피천득 선생 댁을 찾았다.

최근에 인기있는 하늘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와는 사뭇 대조적으로 반포의 피천득 선생의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짜리 아파트였다. 아파트만큼이나 높게 자란 나무들 덕분에 나무와 한데 어울려져 하루를 보내는 노수필가의 모습이 무척 정겹게 보였다.

삼십여평 남짓한 집에서 피천득 선생은 사모님과 조용하고도 소박한 노후를 보내고 계셨다. 그의 집 거실에는 이웃에서 소란스러울까 염려하는 그의 마음 덕에 벽에 걸리지 못하고 세워 놓은 몇 개의 액자가 있다. 그의 작지만 섬세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구십을 넘긴 노인이지만 아직도 해마다 성탄절이면 크리스마스 트리로 거실 베란다를 장식할 정도로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그의 서재에는 아이를 아끼는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손자들의 사진과 작은 인형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의 수필에서도 여러 번 얘기한 바 있는 딸 서영의 사진이 놓여 있다. 모든 할아버지가 손자를 예뻐하지만 그의 손자에 대한 사랑은 남다른 듯했다. 얼마 전 미국에 사는 외손자 스테판이 이태리에서 세계적인 지휘자 Roberto Abbado와 바이올린을 협연한 연주회의 포스터를 당신의 벽에 붙여두고 손자를 대하듯 아끼고 바라보았다

그의 수필에서도 여러번 언급된 바 있지만 그의 딸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이번 책에 수록된 ‘서영이에게’란 수필은 그가 일년동안 딸과 떨어져 하버드 대학에 연구교수를 갔을 때 썼던 글이다.

‘내 인형 예쁜 것으로 사다두었다. 어서 태평양 바다를 건너가서 너한테 안기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름은 ‘난영’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머리가 금빛이고 눈이 파랗지만, 한국에서 살테니까 한국 이름을 지어 주어야지? 아빠가 부탁이 있는데 잘 들어주어. 밥은 천천히 먹고, 길은 천천히 걷고, 말은 천천히 하고, 네 책상위에 ‘천천히’라고 써 붙여라. 눈 잠깐만 감아봐요. 아빠가 안아줄게, 자. 눈 떠!’ (수필 ‘서영이에게’ 중에서)

이 수필에 등장하는 인형 난영이 역시 그의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잘 보여준다. 난영이는 그의 침실 옆에서 겨울에는 털옷을, 여름엔 짧은 반팔옷을 입으며 마치 작은 아이처럼 선생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피천득 선생이 그토록 애지중지 길렀던 딸은 어느새 중년을 넘긴 교수님이 되었지만 그 딸을 위해 사온 어린 인형 난영이는 아직도 젖먹이 꼬마 아이처럼 선생의 옆에서 자고 사랑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작은 인형을 안고 있는 선생의 모습이 마치 아기를 안고 있는 할아버지 같다.

“내가 서영이 어릴 때 하버드 대학에 연구교수로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서영이 주려고 이 인형을 사왔지요. 그런데 이 난영이와 나는 서울 하늘 아래 같이 살고 있지만 우리딸 서영이는 이 인형을 사올 때와 반대로 보스톤에서 살고 있답니다, 하하하...”

▲ 인형 '난영이'를 안고 있는 피천득 선생
ⓒ 송춘희


이번 책에 수록된 번역 동화는 어린이 잡지 <소학생>과 <어린이> 등에 기고하였던 글인데, 아직까지 이 잡지들을 보관하고 있던 아동문학가 이재철 교수 덕분에 책으로 소생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책의 1장에는 우리에게는 익숙한 나다니엘 호손의 ‘큰바위 얼굴’과 ‘석류씨’, 마크 트웨인의 ‘하얗게 칠해진 판장’, 알퐁스도데의 ‘마지막 수업’, 윌리엄 샤로얀의 ‘아름다운 흰말의 여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장에는 금아문선에 실린 수필과 그의 시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이 글들을 낼 당시는 일제시대이어서 아이들이 따뜻하고 재미있는 글을 읽어 꿈과 희망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번역하고 기고하였지만, 요즈음의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꿈과 희망을 주고 싶어 이 책을 펴내게 되었습니다. 나라잃은 설움보다는 못하겠지만 요즈음의 아이들이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입시지옥 때문에 자살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왕따 때문에 고통받는 아이도 많지 않습니까? 이 책에 수록된 ‘거리를 맘대로’란 동화도 왕따 당하는 아이가 그 상황을 지혜롭게 이겨내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아이들이 용기를 낼 수 있을 거예요.”

이 책은 비록 동화집이지만 어린이 뿐 아니라 어른들도 한 번 쯤은 읽어볼만한 따뜻한 동화집이다.지금의 30, 40대 부모 세대라면 학창시절 ‘큰 바위얼굴’을 교과서에서 접한 적이 있을 것이다. 깊어가는 겨울밤, 아이와 함께 방에 앉아 함께 읽으면서 옛날의 감동을 되살려도 좋고 손자가 눈이 어두우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들려주어도 좋을 듯하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어린이와 똑같아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참으로 진실입니다. 한해 한해 나이 먹으면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생각하다보면 바로 순수한 아이 같은 마음으로 살면 된다는 해답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순수함을 닮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아이처럼 살려고 노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책을 내면서 중에서)

어린 벗에게

피천득 지음, 여백(여백미디어)(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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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입니다.세상에는 가슴훈훈한 일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힘들고 고통스러울때 등불같은, 때로는 소금같은 기사를 많이 쓰는 것이 제 바람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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