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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디지털도서관조감도
ⓒ 최미경

며칠 전 우리집에 봉투가 하나 배달되었다. 내용을 보니 국립디지털도서관 건립사업 주민설명회를 하니 참석하라는 이야기다. 함께 배달된 칼라 브로슈어에는 디지털도서관의 건립이 이미 결정된 듯한 뉘앙스의 많은 그림들이 이미 그려져 있었다.

이 디지털도서관이 건립될 예정지는 현재 국립도서관의 건너편 녹지다. 이 녹지는 강남 성모병원과 그 옆의 아파트, 그리고 서울지검에 이르는 많은 지역으로부터 접근이 가능해 도심속에 그런대로 훌륭한 산책로를 만들어주고 있는 고마운 공간이다. 그 녹지에 디지털도서관이 왜 서야 하는지 나는 도무지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우선 디지털의 속성을 생각해보자.

내 집에 앉아서 전 세계의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 바로 디지털, 인터넷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닌가. 웹상에서 누구도 평등한 것이 바로 디지털이 추구하는 정보평등사회인 것이다. 그런데 이 디지털도서관은 어떤 특별한 정보를 보관이라도 하는 것인지, 아니면 특수 장비를 이용해서 전혀 다른 기술이라도 보여주는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이런 만삼천평 규모의 건물은 왜 필요한 것인가. (브로슈어의 내용 중에 이런 진짜 정보에 관한 것은 한가지도 없다.)

디지털도서관에 들어갈 기능을 보면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국립디지털도서관 안에는 문화광장과 오케스트라 연주장, 강당, 회의장, 세미나실들이 들어와 지역사회의 중심역할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이 건물의 면적이 전체 녹지의 1퍼센트에 불과하기 때문에 녹지의 기능은 전혀 훼손되지 않음을 강조한다. 이 것은 매우 이율배반적 발상이다.

사람들이 모여서 지역사회의 중심이 되려면 접근 가능한 많은 길들이 개발될 것이고 사람들이 모이기 위해 녹지는 자연히 콘크리트화 되지 않을 수 없다. 저녁에 사용하기 위해 전기가 곳곳에 들어갈 것이고 결국 이 녹지는 휴식과 산책을 위한 고즈녁한 공간에서 시끄러운 지역중심지화 될 것이 뻔하다. 그럼으로써 지역활성화를 이룰지는 모르지만 지역민들은 소중한 녹지하나를 불요불급한 목적으로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사실 서초구는 다른 지역보다 많은 공공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 장소로부터 걸어서 10분거리에 서초구민체육센터와 테니스장이 있다. (이 건물도 94년에 72억이란 예산을 들여 지었다) 넓고 훌륭한 시설로 운동뿐만 아니라 문화강좌도 열려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 곳과 겨우 10분 거리에 또 다른 지역사회의 중심이 있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또 만약 디지털도서관의 건립이 그렇게 필수적이라면 지금 위치에서 걸어서 오분도 걸리지 않은 장소에 그 정도 규모의 건물을 짓기 딱 적합한 사평로공원이 있다. 이 공원은 올해 완성된 데다가 수목은 별로 없고 그저 조형물들만 덩그러니 있어 찾는 사람도 별로 없다.

이런 장소에 디지털도서관을 유치하면 공원도 훨씬 짜임새가 있을 것이다. 거기다가 이 공원은 전철역과 바로 닿아있어 근접성으로 보면 훨씬 유리한 자리임에 틀림없다. 나처럼 그저 서초구에 오래 살았던 구민의 생각은 있는 녹지는 그대로 잘 살리고 활성화되지 않는 공원은 활성화 시키는 편이 훨씬 바람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다고 그 디지털도서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 이전에 먼저 해야할 일이 있다.

내가 국립도서관 바로 뒷편으로 이사를 온 이유는 아이가 크면서 도서관을 가깝게 생각하고 이용하게 해주고 싶은 욕심이 가장 컷다. 이사가자마자 아이의 손을 잡고 들른 도서관은 정말 말도 안되는 규칙으로 아이의 입장을 가로막았다. 국립도서관의 사용은 만 20세가 되어야 한다고. 도서관만큼 온 식구가 건전하게 이용하여야하는 시설이 또 있을까.

그런데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없으니 아이있는 엄마, 아빠들이 이용하기 어렵고 청소년 역시 접근이 안되니 현재는 국가시험공부하는 사람들이나(공인중계사가 제일 많은 것 같다) 과제하려는 대학생, 아니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소일거리 하는 곳으로 전락한 형편이고 따라서 이용율 또한 저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국립도서관 일층의 전자검색실을 가본 분들은 그 시설의 훌륭함과 사용하는 사람의 적음에 놀랄 것이다. 현재 있는 시설의 활용부터 우선 제대로 하도록 해주고 그래도 모자랄 때 다른 시설을 생각하는 것이 요즘처럼 어려운 시절에 국민의 혈세를 쓰는 공인의 자세라고 생각되는데...

이야기가 나온 김에 국립도서관의 문제점을 좀더 짚고 넘어가자. 이 건물을 지은 것이 전두환정권 때라고 하는데 확인은 못해봤고 말하자면 권위주의적 냄새가 물씬한 데다가 구조적으로 도서관에 전혀 맞지 않는 설계로 효율성이 말도 못하게 떨어진다. 예를 들어 일층처럼 접근이 용이한 공간에 별로 활성화 되지도 않은 갤러리나 커피숍등을 유치해서 사람들이 도서관을 이용하려면 일단 무조건 긴 동선을 걸어야 한다. 거기다가 건물이 수많은 계단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차를 타지 않고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의 접근이 불가능하다. 거기다가 로커룸이 입구에 있기 때문에 열람실에서 가방의 무언가가 필요하게 되면 무조건 몇층을 걸어 내려와야 한다.

이런 물리적 불편함 말고도 이미 말했듯이 도서관 이용자를 20세 이상으로 제한한 것은 정말 행정편의적인 발상이다. 어린이들은 떠들고 어질며 책을 손상시키니까, 청소년은 시험공부나 할 테니까 분위기를 흐리기 때문에 못받겠다는 것이 아닌가. 또 도서관 운영시간도 문제다. 도서관은 매월 2회 평일에 쉴 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공휴일에 역시 쉰다. 어쩌다가 명절연휴나 크리스마스를 차분히 보내고 싶어 들리면 언제나 퇴짜다. 개인의 여가시간을 활용하는데 필요하기는 문화재나 도서관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관리하기가 어렵지도 않은 도서관이 이렇게 많은 휴일을 쉬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어린이들이 도서관을 이용하고 책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습관을 만들어 주는 일은 도서관이 하여야할 가장 큰 업무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오죽하면 모 tv 방송사에서는 어린이 도서관 건립 캠페인까지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시대에 국립도서관에서 어린이의 접근 자체를 금지한다는 것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도서관은 아이들에게 도서관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곳이어야 한다. 우선 도서관의 회원으로 어린이들을 가입시키고 책을 읽는 법, 도서관 이용법, 책을 다루는 법, 검색법 등등을 가르치는 일은 아이들에게 흥미있고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다.

또 자신에게 어른과 동등한 자격을 부여한다는 사실은 아이들에게 도서관을 즐기고 책을 소중히 다루는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할 것이다. 그 이외에도 어린이들이 도서관을 즐길 수있는 프로그램은 예산 없이도 얼마든지 개발 가능하다. 여력이 있다면 국립도서관의 그 넓은 터 어느 곳에 어린이들을 위한 도서관을 별도로 건립해주면 더욱 바람직하겠다. (내 생각에 그 디지털도서관에서 국립도서관을 건너오는데 쓰겠다고 하는 어마어마한 육교를 만드는 예산 정도면 국립도서관 내에 어린이 도서관을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

이야기가 국립도서관으로 새버렸는데 다시 디지털도서관의 쓰임에 대해 짚어보자. 현재 계획하고 있는 도서관 크기는 지상3층에 지하5층, 연건평 13000평이며, 정보서비스공간 1500평, IT연수 및 교육 1000평, 어린이 디지털도서관 1000평, 식당,서점 500평, 사무공간 900평, 서고 6500평(디지털도서관에도 서고가 필요한 것인지?), 주차,설비등 1600평으로 예정되어 있다. 물론 이 것이 확정된 계획은 아니지만 다해서 정보검색 1500평과 어린이 디지털도서관 1000평을 제외하고는 디지털도서관의 목적에 꼭 필요한 기능은 거의 없는데 이 2500평을 위하여 13000여평을 지으려 한다면 수백억의 예산낭비가 될 것이 눈에 보듯 뻔하다.

또 디지털도서관의 특성상 건물을 어떤 규모로 짓고 어디다가 짓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디지털의 특성을 얼마나 잘 이용하고 그 소프트웨어가 얼마나 충실하게 지원되며 관리될지가 더욱 중요한 건립내용이어야 한다. 따라서 실제로 디지털도서관은 서초동 산 40-9번지에 있을 것이 아니라 웹상의 가상 공간에 자리잡아 더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보다 목적에 근접한 발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이런 디지털센터의 핵심은 바로 국립도서관이 되어야 현재 유명무실해진 국립도서관도 활성화시키고 정보와 도서관이 결합된 미래지향의 커뮤니티 중심도 만들어지 않을까.

꼭 많은 돈을 들여 뭔가 그럴듯한 건물부터 지으려는 공무원들의 발상은 가장 경계해야하는 구시대의 습관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미 지어진 것을 활성화하는 비교적 생색나지 않고 힘든 일은 손대지 않으려는 자세도 고쳐져야 한다.

아주 근본적인 생각으로 돌아가 보자. 서초구가 어떤 곳인가.서울에서 가장 부유층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닌가. 집집이 컴퓨터가 한대가 아니라 두세대씩 있는 집이 수두룩 한데 이런 곳에 디지털도서관을 짓는다면 그 효율이 얼마나 있다고 보는지. 서초구민이 원하는 것은 아마 더 많은 녹지일 것이다.

덧붙여 사족을 하나 달자면 디지털도서관을 짓겠다는 계획을 알리는 방법도 정말 한심하다.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 브로슈어를 만들고 집집이 우편을 보낼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인터넷에 올려 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방향을 결정해야 옳은 것이 아닌가. 그도 저도 못한다면 좋다. 그 설명회라는 것을 정신없는 연말 금요일인 12월 26일 오전 11시 30분에 한다면 도대체 누가 그 설명회를 제대로 들을 수 있을지,그리고 우편물이라는 것이 설명회 이틀전에 도착되어 펼쳐볼 시간조차 제대로 주지 않은 행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런지 지역민의 한사람으로 심히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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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디자인회사를 운영하며 인테리어 디자인과 디자인 컨설팅 분야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전통건축의 현대화와 중국전통건축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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