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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6시. 경당의 기합소리와 함께 '우금티 청소년 역사 캠프'의 둘째 날이 시작되었다.

▲ 경당 시범을 보이고 있는 정선원 교사(공주중)는 경당무예는 임진왜란 이후 정립된 조선 군인들의 무예라고 하였다.
ⓒ 최장문
경당 시범을 보이고 있는 정선원 교사(공주중)는 경당무예는 임진왜란 이후 정립된 조선 군인들의 무예라고 하였다.

충남 공주에서 1시간 30분을 달려 전북 정읍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에 도착한 시간은 10시가 조금 못 되어서였다. 이 곳은 동학농민전쟁 박물관 같았다. 전국의 동학농민전쟁 관련 주요 유적과 유물들을 한데모아 전시해 놓았다.

▲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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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현 전투 유적지로 안내한 김석민 교사(전북 원광정보여고)는 동학농민전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 황토현 전투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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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11년 전 전북 고부 군수 조병갑이 정읍천에 만석보(洑, 둑을 쌓아 흐르는 냇물을 막고 그 물을 담아 두는 곳)를 만들고 논농사에 쓰는 물 값을 받았다. 이런 부당함에 대항하여 농민들이 말목장터에 모여 들고일어나서 고부관아로 진격하여 곡식창고를 부수고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또한 만석보도 헐어버렸다.

▲ 만석보(좌)와 사발통문 작성지 고택(우). 임두영 옹(75세)이 사발통문 작성지였던 고택에서 동학농민전쟁의 출발점이 된 고부봉기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 최장문
만석보(좌)와 사발통문 작성지 고택(우). 임두영 옹(75세)이 사발통문 작성지였던 고택에서 동학농민전쟁의 출발점이 된 고부봉기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중앙 정부에서 이 소식을 듣고 두 관리를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조병갑 편을 들어 죄가없는 농민들을 감옥에 가두자, 전북 전역에서 다시 농민들이 들고일어났다.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감영군(지방군)과 황토현에서 싸워 승리한다.

이에 서울에서 중앙군이 내려와 다시 한번 동학농민군과 전투를 벌이는데 이곳이 전남 장성의 황룡촌이고 여기에서도 동학군이 승리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청에게 동학군 진압을 요청하였고, 청은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고, 일본군도 뒤따라 들어왔다.

동학농민군 진압을 명분으로 청과 일본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게 되자 농민군은 전주에서 정부와 협약을 맺고 자진해산하지만 일본군은 돌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조선정부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였다. 이에 농민군은 다시 봉기하여 반외세 반봉건를 외치며 서울로 진격하는데 그 길목에 해당하는 곳이 공주였다. 공주의 우금티에서 2만이 넘는 동학농민군은 진압당하고, 동학농민전쟁은 결국 실패하고 만다. 이후 동학농민군이나 관련 가족들은 죽거나 이동하여 숨어살아야만 하였다.

▲ 공주 우금티 동학농민전쟁 기념탑
ⓒ 최장문
설명을 들은 학생들은 '동학농민전쟁'에 대하여 아는 듯, 모르는 듯 했다. 하지만 필자는 '동학'이란 말 자체가 담고 있는 느낌이 무겁게 느껴졌다. 이 사건의 성격을 규명하는 명칭을 보면 '동학농민의 난',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전쟁', '동학농민운동' 등이 있다.

필자가 어릴 적 배운 이 사건에 대하여 국사교과서에는 '동학농민 난'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동학농민운동'으로 바뀌었다. 또, 전북지방에서는 '혁명'으로 쓰고 있었다. 어떻게 똑같은 사건을 두고 이렇게 상반된 평가가 나올 수 있을까?

'세상에는 이런 일들이 많단다. 그래서 역사란 씌여지는 사람들에 따라 바뀔 수도 있고, 시대의 환경에 따라 다르게 서술될 수도 있단다'라고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끝내 말하지 못했다.

동학농민전쟁이 '난'에서 '혁명'쪽으로 평가되면서 역대 대통령들도 황토현 전투 유적지에 강한 흔적들을 남겼다. 박정희는 황토현 전투 기념비를, 전두환은 황토현 기념관을, 노태우는 제민당(濟民堂, 죽은 사람을 제사 지내는 곳)을, 김대중은 전시관과 교육관(신 기념관)을 세웠다.

▲ 동학농민혁명 구 기념관 계단을 오르고 있다. 멀리 뒤편에 보이는 것이 2004년에 개관한 신 기념관이다.
ⓒ 최장문
동학농민혁명 구 기념관 계단을 오르고 있다. 멀리 뒤편에 보이는 것이 2004년에 개관한 신 기념관이다.

▲ 태인군수 공덕비중 맨 오른쪽이 조병갑의 부친 조규순 공덕비이다. 김건호(공주중 2) 학생은 비석을 깨부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공덕비라고 생각되었다.
ⓒ 최장문
태인군수 공덕비중 맨 오른쪽이 조병갑의 부친 조규순 공덕비이다. 김건호 학생(공주중 2)은 비석을 깨부숴야 한다고도 주장하였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공덕비라고 생각되었다.

공주 숙소로 돌아와 교사와 학생들은 너나할 것 없이 수영장으로 뛰어들었다. 수영장은 그동안의 무더위와 피로를 씻어주기에 충분했다.

▲ 수영장
ⓒ 최장문
동학농민전쟁의 현장을 찾아간 오늘 학생들은 과연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그들은 왜 목숨을 내던지며 정부군과 싸웠을까? 청일 군대의 철수를 주장했건만 111년이 지난 지금 한반도의 평화라는 명분으로 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 동학농민군의 함성은 아직도 계속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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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세월속에서 문화의 무늬가 되고, 내 주변 어딘가에 저만치 있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보면 예쁘고 아름답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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