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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서부지방법원 이종광 판사.
ⓒ 오마이뉴스 조경국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모든 국민은 직업선택의 자유, 주거의 자유,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모두 헌법에 나온 말이다. 나라의 통치체제와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규정하고 있으며 모든 법률의 토대가 된다는 헌법. 얼마나 좋은 말만 골라서 썼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 하지만 현실이 어디 그렇냐고 반문할 만하다.

그런데 법전에서 잠자고 있는 줄 알았던 헌법이 가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지난해 11월 헌법정신에 기댄 판결 하나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친일재산은 '3.1운동의 정신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에 위반되는 행위로 취득된 재산이다. 이를 박탈하는 것은 부당한 차별에 해당되지 않으므로, 국회가 헌법에 맞는 법(친일재산환수법)을 만들 때까지 재판을 정지한다."

친일파 후손의 땅 찾기 소송에 제동을 걸기 위해 헌법전문을 법정으로 불러온 주인공 이종광(37.서울서부지법 민사2단독) 판사. 당시 이 판사는 수원지법에 근무했다. 지난달 29일 저녁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 판사실에서 만난 이 판사는 "헌법은 장식적인 말이 아니라 재판 규범"이라고 잘라 말했다.

"헌법은 장식적인 말이 아니라 재판 규범이다"

ⓒ 오마이뉴스 조경국
'입법을 할 때까지 재판을 정지한다.' - 새로운 판례를 만든 셈인데, 판결을 쓰면서 부담스럽지는 않았을까? 그것도 대법원이 아닌 1심 법원에서.

"부담스러웠던 건 사실이에요. 그래도 판사는 독립된 판단을 해야죠. 마음대로 한다는 말이 아니고 주어진 권한에 따라 양심껏 판결을 써야 된다는 거죠. 대법원이나 상급심의 판결을 의식하지 않았느냐고요? 대법원장님도 판사고, 저도 판사입니다.(웃음)"

예상대로 딱부러진 답변이 나왔다. 이 판사와 인터뷰 약속을 하면서 몇 차례 전화통화를 했던 기자는 이미 그의 시원시원한 성격을 확인한 터였다.

"제 판결은 어느 정도 국회를 의식하며 썼습니다. 문제의 핵심이 뭐냐면, 헌법에 맞게 친일재산의 범위, 재산권 박탈 정도를 법률로 정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환장하겠더라고요. 국회가 만들지 않은 법을 판사가 마음 속에서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행히 지난해 말에 친일재산환수법이 만들어졌고, 정부가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판사는 이럴 때 보람을 느낄 만 하겠다. 그런데 소신만 갖고 이런 판결을 쓸 수 있을까? 약 80쪽에 이르는 방대한 판결문은 차라리 논문에 가까웠다.

역사적 소명이 없었다면, 친일파 연구, 과거의 판례, 외국의 사례, 친일청산 입법 상황, 헌법의 변천사까지 담아내기는 힘들었을 터이다. 어떻게 큰 일(?)을 저지르게 되었을까?

"역사속의 밀린 숙제를 근본적으로 풀어보자는 생각으로 덤볐습니다. 1년 정도 이것저것 찾아보고, 한 석 달 (판결을) 썼나? 내가 성질이 더러운 면도 좀 있고(웃음)."

표현은 투박했지만, 곳곳에서 그의 치밀한 성격을 느낄 수 있었다. 판사실 책상에는 이 판사가 연구하려고 모아둔 각종 판결과 자료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80쪽에 이르는 방대한 판결문, 석달에 걸쳐 쓰다

세상은 변하고 가치관도 바뀌어간다. 그런데 고정된 법은 빠르게 변하는 현실을 따라가지 못할 때도 있다. 이 판사는 "헌법정신과 변화된 시대에 맞게 법도 따라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논쟁이 되고 있는 몇가지에 대해 견해를 들어보기로 했다. 먼저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병역거부자의 현황과 실태, 외국의 입법례, 우리나라의 국방계획까지 막힘없이 설명해나갔다. '육군 예비역 병장' 이 판사의 의견을 들어보자.

"지금 헌법상 양심의 자유와 병역법상 처벌 조항이 충돌하고 있는 셈이죠. 병역거부로 문제되는 사람들이 1년에 대략 6백명 정도인 것으로 파악돼요. 우리나라는 이미 매년 수만명의 젊은이를 공익근무요원으로 보내는 대체복무제를 이미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대체복무가 아닌 감옥에 보내면서까지 처벌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 판사의 열변은 이어졌다.

"현대전은 한국전쟁처럼 참호 파놓고 땅따먹기 하는 전쟁이 아니잖습니까. 대만의 경우 90년대 중반에 병력을 반 정도로 감축하고 그 비용을 첨단장비 구입하는데 사용했어요. 중국에 맞서는 대만이 병력을 감축하고 여호와의 증인을 대체복무하게 하는 현상, 어떻게 봐야 할까요. 우리나라의 '2020 국방계획'도 병력감축을 예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병영거부, 간통죄, 국가보안법, 그리고 헌법정신

ⓒ 오마이뉴스 조경국
간통죄는 어떤가? 유지냐, 폐지냐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물론 혼인, 가족제도의 보호를 위해서 필요하다는 의견도 많지만, 한쪽에선 헌법상의 행복추구권,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니 없애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 판사는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간통죄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던 한 여성이 법정에 섰단다. 그가 대뜸 판사에게 따지듯이 말했다고 한다.

"언제부터 내 아랫도리를 국가가 관리했습니까?"

"성인이라면 성적 결정은 남자건 여자건 자기가 해야 한다"던 이 판사는 '혼인빙자간음죄'도 같은 맥락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1953년 이 법의 제정이유를 보면 '여자란 선천적으로 판단능력이 떨어지는 존재로서 쉽사리 남자의 말에 유혹되어서…' 라고 되어 있는데, 현재의 여성들을 그렇게 보는 것도 또 다른 차별 아닐까요? 국가가 사적인 부분에 과도하게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국가보안법은 헌법상의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막는다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이 판사는 "<태극기 휘날리며>나 <웰컴투 동막골> 같은 영화가 국가보안법의 엄격한 잣대대로라면 나올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동안 해온 게(법을 적용한 게) 옳아서가 아니라 그냥 쭈욱 그렇게 해왔다는 논리입니다. 그럼 그게 정상인지, 이런 법이 있는 나라가 얼마나 되는지 이제 한번쯤 생각해봐야겠지요. 시대 정신이라고 할까, 헌법과 변화된 시대에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만일 법이 헌법정신에 위배되었을 때 판사의 임무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받아봐야죠." 위헌제청을 활용하겠다는 말이다. 헌법 제107조 1항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는 여부가 재판의 전제가 된 경우에는 법원은 헌법재판소에 제청하여 그 심판에 의하여 재판한다."

헌법 제27조 4항 '무죄추정의 원칙'의 중요성

ⓒ 오마이뉴스 조경국
형사재판부에 있을 때 이 판사는 다른 판사들보다 무죄를 선고한 사건이 많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 모든 일을 따지고 연구하는 성격 탓만은 아닐 것이다.

"국민 10명 중 8명은 재판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까지 재판에선 검찰의 증거가 부족하면 무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기소된 피고인이 내가 무죄라고 적극적으로 밝혀야 하는 잘못된 관행이 있었어요. 전 무죄 추정의 원칙에 충실하려고 했고, 심리를 꼼꼼하게 했을 뿐입니다."

헌법 제27조 4항은 형사소송의 중요한 원칙이다.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 이 판사는 "대신 심리를 통해 유죄가 인정되면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판사는 무죄판결 못지않게 법정구속한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열심히 수사한 검찰에선 상당히 싫어할 일이다. 검찰도 공익을 위해 범죄자를 기소하고 처벌하는 기관 아닌가.

"공소장과 수사기록은 검찰의 주장을 담은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법원은 그동안 피고인보다는 검찰 쪽에 기울어져 있었다고 생각해요. 판사는 한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또한 밀실에서 수사기관과 피고인이 만든 증거보다는 공개된 자리에서 합리적으로 따져서 얻어낸 결론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죠. 그게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공판중심주의입니다."

"지금은 판사의 용기가 필요한 시대다"

법을 바탕으로 사회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법원이라고 해서 사회 변화에 둔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판사도 동의를 표시했다. 이 판사는 "하급심에선 다양한 판결이 나오고 그것이 종합되어 대법원에서 하나의 결론이 나오는 게 좋다고 본다"는 말도 덧붙였다.

"법원은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평가하는 곳이라서 회고적이긴 하지만, 그 일의 평가를 통해서 미래의 어떤 일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곤 합니다. 어떤 사건에서 그동안의 문제 해결방식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면 이젠 판사도 대안을 제시해야 됩니다. 지금은 판사의 용기가 필요한 시대에요. 필요하다면 희생도 감수해야 합니다."

인터뷰가 끝난 시각이 밤 10시. 네 시간 가량 대화를 나누면서 오랜만에 헌법 조문을 다시 들춰본 느낌이 들었다. 마치고 나오는데 문득 헌법 제103조가 생각났다. 물론 이 판사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테지만.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덧붙이는 글 | 이종광 판사의 동의를 얻어 저의 블로그에 '친일파 후손 땅찾기'판결 전문을 올리겠습니다. 

이종관 판사 '친일파 후손 땅찾기' 판결 전문 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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