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동학농민전쟁을 생각하면서 강원도를 떠올리는 이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억울하게 죽은 교조의 누명을 벗게 해달라며 일어났던 보은 집회, 조병갑의 학정에 항거해서 일어났던 고부 봉기,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들고 장렬하게 싸웠던 우금치 전투 등 동학농민전쟁과 관련된 이름난 전투에서 강원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동학농민전쟁 위령탑
ⓒ 이기원
농민군의 기세에 놀란 정부가 관군의 힘만 가지고는 진압이 어려워 청에 군대를 보내 줄 것을 요구했던 동학농민전쟁은 충청, 전라, 경상도만의 저항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강원도에서도 경기도에서도 황해도에서도 거센 항쟁의 불길이 타올랐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팝죽팝죽 잘 논다만
녹두꽃을 떨구고서
청포장수 부지깽이
맛이 좋다 어서 가라
(원주 지방에서 불려지던 파랑새 민요)


동학농민전쟁의 영웅이었던 녹두장군 전봉준을 기리는 민요로 대표적인 것이 파랑새 민요이다. 이 민요가 원주지방에서도 구전되고 있다. 외세의 침략 속에서 속절없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녹두꽃에 대한 회한을 담은 민요였다.

이와 같은 민요가 불려지던 원주 지방에도 동학이나 농민전쟁과 관련된 역사의 자취가 남아 전하고 있다.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란 마을로 가면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체포된 곳이 있다. 지금은 최시형이 머물던 집도 사라져 터만 남아 있지만 최시형이 체포된 곳이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송골 최시형 추모비
ⓒ 이기원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가 포교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혹세무민의 명목으로 체포 처형된 뒤 동학을 재건해서 교세를 확장시키고 경전을 간행하는 등 종교로서의 기틀을 완성시킨 인물이 해월 최시형이다.

▲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송골 최시형 피체지
ⓒ 이기원
해월 최시형이 체포되었던 집터에서 100여 미터쯤 나와 큰길로 들어서면 '모든 이웃의 벗 최보따리 선생님을 기리며'란 추모비가 길가에 세워져 있다. '치악 고미술 동호회'에서 동학과 더불어 민중과 더불어 보따리 하나 들고 40여 년을 살아온 해월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문의 글은 해월 선생의 삶과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쓴 것이다.

강원도 여러 곳에서 최시형의 자취를 찾을 수 있다. 경상도 영해에서 일어났던 영해교조신원운동(이필제의 난)이 실패한 뒤 최시형이 은거하면서 동학 교세를 다시 일으킨 지역이 강원도였다. 영월, 정선, 인제를 거치면서 서서히 세력이 확대되고 동경대전이란 경전을 간행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93년 보은집회에 강원도에서 200여명이 참가할 정도로 그 규모가 커졌고, 이는 결국 홍천, 횡성, 원주를 중심으로 하는 강원지역 동학농민전쟁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강원 중부지역에서 동학농민전쟁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은 1894년 9월 무렵이었다. 홍천 지역에서 아직도 전설적 인물로 구전되고 있는 차기석이란 인물이 중심이 되어 결전을 준비했다.

삼정의 폐단 속에서 신음하던 이 지역 농민군이 가장 먼저 공격한 곳이 동창이었다. 거두어들인 세곡을 보관하던 동창을 공격한 것은 수탈에 대한 저항의 의미와 함께 항쟁에 필요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지평의 맹영재가 이끄는 민보군과 횡성의 유동근이 이끄는 관군은 동학농민군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결국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에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 서석면 풍암리 자작고개 노래비
ⓒ 이기원
전쟁은 참혹하게 끝났다. 무기와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농민군은 무수한 희생을 치른 채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곳에 쓰러진 시체가 가을 추수철 볏단처럼 널려 있었고, 죽어간 이들이 흘린 피가 자작자작 고여 흐를 정도였다고 한다.

▲ 자작고개 꼭대기의 성황당
ⓒ 이기원
이 고개 꼭대기에는 지금도 성황당이 있다. 자작고개란 명칭이 붙여지기 전 사람들은 '서낭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성황당이 있는 고개란 뜻이다.

그런데 동학농민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뒤 이름이 자작고개로 바뀌었다고 한다. 현재 자작고개에는 동학혁명 위령탑과 자작고개 노래비가 건립되어 지나간 역사의 아픔을 되살려 주고 있다.

역사는 특정한 지역 특정한 장소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역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그 숨결을 찾아 느껴보는 것은 선조들의 삶과 함께 우리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는 일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  에도 실었습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