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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사영이 은거했던 토굴
ⓒ 이기원
더위가 한창 기세를 부리던 8월 13일 충북 제천시 봉양읍에 있는 배론 성지를 찾았습니다.

1801년, 천주교도를 모질게 탄압한 신유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숨어든 황사영은 토굴에 몸을 숨기고 이제까지 조선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의 실상을 가로 62㎝, 세로 38㎝의 비단에 깨알같이 써내려갔습니다.

황사영은 그 글에서 참혹한 탄압을 끝내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심지어는 서양의 군함과 병사들이 조선을 공격해서 천주교 포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게 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까지 썼습니다. 이를 '황사영의 백서'라고 부릅니다.

황사영은 후일 황심이라는 인물을 통해 백서를 청나라 북경의 주교에게 전하려고 했지만, 황심이 체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백서도 압수당합니다. 결국 황사영도 체포되어 대역부도죄로 능지처참을 당합니다.

▲ 황사영 순교 현양탑
ⓒ 이기원
배론 성지 뒤편에는 황사영이 은거했던 토굴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무심히 바라보면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토굴 위는 칡넝쿨과 풀로 덮여 있습니다. 굴은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갈 정도로 자그마합니다.

박해를 피해 숨어든 이의 핏발선 눈동자도 없습니다. 숨 막히는 공포와 긴장도 이제는 느낄 수 없습니다. 황사영이 썼다는 백서의 실물 크기 복사본이 토굴 안에 전시되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토굴을 돌아보고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백서에 대한 평가가 결코 간단치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성스러운 행동으로 평가하는 이도 있지만, 신앙의 자유를 명분으로 서양 군대까지 불러들이려 했던 것은 용납될 수 없는 반국가적 행위라고 비판하는 이도 있습니다.

정조가 죽은 뒤 불어 닥친 신유박해는 단순한 천주교 탄압이 아니라 정조의 재위 기간에 성장했던 남인 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었다는 점에서 백서를 단순한 천주교 박해 차원에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신유박해를 주도한 세력은 천주교를 탄압의 명분으로 이용했고 그 결과 남인 세력은 몰락했다는 것이지요. 정약용의 조카사위였던 황사영도 이 과정에서 희생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천주교 신앙이 백성과 나라에 해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정에서 이를 반드시 금지하고자 하니, 천주교를 힘써 지켜보고자 백서를 작성했습니다."

황사영은 체포된 후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위와 같이 얘기했다고 합니다. 한편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위세를 빌어 선교의 자유를 획득하려고 했던 점, 서양 군함과 군대의 파병을 요청했던 점 등을 들어 황사영을 대역부도죄로 처형했습니다.

모진 박해 속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결과물로 탄생한 것이 '황사영의 백서'입니다. 하지만 '황사영의 백서'는 천주교를 박해한 조정의 폭력을 제거하기 위해 또 다른 외세의 폭력을 불러들이려 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습니다.

황사영이 머물렀던 토굴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러져간 처절한 삶의 자취를 간직한 채, 황사영을 대신해서 역사의 현장을 말없이 지키고 있습니다.

▲ 토굴 안에 전시된 황사영 백서 실물 크기 복사본
ⓒ 이기원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서울방면 
경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제천방면)
→신림IC→국도(제천방면) →배론 성지
중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제천방면)
→신림IC→국도(제천방면) →배론 성지

◈부산방면
대구→안동→영주→단양→제천→배론 성지 

<열차이용시>
청량리역→원주경유→제천역→배론 성지
부산역→안동경유→제천역→배론 성지 
대전역→청주경유→충주경유→배론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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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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