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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1월 22일 강원도청 앞에서 벌어진 한미FTA 반대집회 모습.
ⓒ 강기희

눈이 내린다.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난다.

강원도 정선 지역은 며칠 전에 이어 대설주의보가 또 내렸다. 이번엔 얼마나 많은 눈이 내릴까. 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요즘엔 눈이 자주 온다.

골짜기를 훑고 내려오는 바람이 세다. 눈은 제 한 몸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날린다. 강한 바람은 한미 FTA일 것이고, 날리는 눈발은 우리네 농민들이다. 이땅의 농민들은 작은 바람에도 쓰러지고 넘어지기 일쑤다.

눈발이 굵어졌다 가늘어졌다를 반복한다. 한해 농사를 위해 밭갈이하는 농민들의 한숨이 커진다. 밭갈이는 해서 무엇하고 씨앗을 뿌린들 무슨 소용인가 싶다. 한숨을 깊게 몰아쉬는 농부의 마음은 이미 갈라지고 터진 지 오래되었다.

농사에 한미FTA 반대 투쟁까지... 정선의 농부들은 바쁘다

정선군농민회 회장인 김영돈씨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밭갈이를 하고 있다. 날아드는 눈발을 맞으며 갈고 있는 것은 처갓집 밭. 사위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이지만 농사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못하다. 그 밭에 어떤 작물을 심을 거냐고 물었다.

"다른 건 해보았자 인건비도 못 건져요. 땅이 있으니까 뭔가는 심어야 하고, 이번엔 황기를 심어볼까 하고요."

황기는 한약재로 쓰인다. 수입 황기가 많이 들어온다지만 그래도 다른 작물보다는 가격이 안정적일 거라는 계산에서다. 돈벌이는 안 되지만 정선 지역의 황기가 다른 지역에서 재배한 것보다 알아준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란다.

그는 늘 바쁘다. 농사를 짓다가도 한미FTA 반대집회가 있으면 회원들과 함께 서울 또는 춘천으로 간다. 그도 아니면 정선 읍내에서 촛불을 든다. 게다가 그가 작년에 한 농사는 만평이 넘는다. 그러나 지난해 가을 배추값이 좋지 않았다면 적자 인생이었을 거라고 말한다.

정선지역의 농민회 회원들은 다들 젊다. 젊은 나이에 농사꾼이 된 그들은 꿈도 많다. 유기농·무농약 등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친환경 농사에 관심이 많다. 한국 농업의 미래를 스스로 열어가고자 하는 젊은 마음들이 곱다.

젊은 농부들은 오늘도 각자 밭으로 나갔다. 요즘 하는 일은 거름을 내고 밭을 가는 일이다. 땅은 그들에게 하늘이다. 하늘을 거역하는 것은 농부가 할 짓이 아님을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안다. 땅에 대한 믿음은 어떤 신앙보다도 깊다.

한미FTA 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도장 찍을 날만 기다리는 게 이 나라 정부다. 그들은 지난 10일에 이어 25일에도 서울로 간다. 한미FTA협상 저지투쟁을 하기 위해서다.

그런 날은 정선지역의 농민들 뿐 아니라 전국의 농민들이 쟁기를 놓고 투쟁현장으로 간다. 농사일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한미FTA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게 이들의 신념이다.

농민이 투사 되는 것, 잠깐이다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미국의 농산물 개방 압력은 농민들을 더 힘들게 한다. 이 땅의 농민들을 보듬어 안아야 할 정부는 그런 농민들의 서러운 심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한미FTA가 체결되면 이 나라 농민들은 설 곳이 없다. 정부는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협상 체결을 강행한다.

정부는 협상 내용을 공개하지도 않는다. 미국측에 협상 전략이 노출될 수 있다는 웃기지도 않은 논리로 정보공개를 거부한다. 정부는 차라리 국민의 저항이 두려우면 솔직하게 그렇다고 하는 게 옳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 나라 정부가 과연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정부인지 묻고 싶다. 농민이 땅을 버리면 농업이 망하고 농업의 예속은 나라의 존재마저 흔들 게 불보듯 뻔하다. 최소한 지켜야 할 것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다.

▲ 한미 FTA 저지를 위한 집회에 참가한 정선군농민회.
ⓒ 강기희
그러나 이 나라 정부는 농민을 포기한 듯 하다. 오히려 농민을 죽이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사정이 그러하니 농민들이 목숨을 걸고 한미 FTA 협상을 반대하고 나섰다. 농민들을 투사로 만들고 있는 나라는 온전한 나라가 아니다.

일제 강점기 농민들은 땅을 버리고 만주로 사할린으로 떠났다. 땅이 농민을 버린 것이 아니라 나라가 땅을 버리고 농민을 버렸기에 조국을 등진 것이다. 쟁기를 놓은 농민들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제와 맞서 싸웠다.

농민이 투사가 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라가 농민을 버리면 농민들은 언제고 투사의 길을 걸었다. 그 역사도 깊다. 농민이 아니었다면 나라는 애초 존재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정부는 세상 바뀌었다며 이 나라에 농민 필요없단다.

농민이 투사가 되는 건
잠시 잠깐이더군
나라가 제 나라 땅 잃거나 농민들 버리면
농민은 쟁기 대신 죽창 들고
왜놈들과 싸우고 미국놈들과 싸우고

세월 바뀌어 살만하다 싶으면
농민들 목 죄는 이 나라의 기름진 정부
툭하면 미국놈들에게 살살기며
아양 떠는 모습 보기 역겨워
침을 퉤, 뱉아 보지만 끓어 오르는 속은 식질 않고

한미 FTA란 괴물의 출현에
농민들은 또 다시 분연히 떨쳐 일어서고 경찰 몽둥이에 맥없이 주저앉고
제 나라 관리들
멀리서 빤히 지켜보는 것도 화날 일인데
앞장서서 농민 목숨 하나씩 거둘 때
버러지만도 못한 그것들과 싸우고

경찰 몽둥이에 맞고 터지고 구속되는 건 힘없는 농민들이지만
제 것 지키려는 싸움 멈출 수 없으니
밭 갈다 촛불 들다 밭 갈다 구호 외치다
바쁜 건 언제나 농민뿐이지
농민들 투사 만드는 건 잠시 잠깐이지

- 강기희 시 '모든 건 잠시 잠깐이더군' 전문


▲ 집회에 참가한 할머니도 한미FTA는 싫단다.
ⓒ 강기희
정부가 백성 버리는데, 백성인들 정부 못 버릴까

정선군 농민회 회원인 진호씨는 얼마 전 한미FTA 협상 저지를 위한 투쟁에 나섰다가 벌금 100만원을 선고받았다. 농사지어 열심히 살겠다는 젊은 농부에게 벌금이나 선고하는 이 나라는 과연 누구의 나라인지 궁금해진다.

강원도의 경우만 해도 한미FTA 협상 저지를 위한 투쟁에서 재판을 받은 농민이 20여명이 넘는다. 진호씨와 같은 벌금형을 선고받은 이도 있지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이에 덧붙여 벌금까지 선고받은 이들도 많다. 전국적으로 따지면 구속되거나 형을 선고받은 농민들의 수는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대단한 참여정부다.

땅을 우러르며 농사만 짓던 이들이 투사가 되고 전과자가 되는 세상이다. 농사꾼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투사가 가당키나 한 것이며 전과자는 또 무슨 일인가. 그런 세상을 만든 이 나라 정부 관리들의 밥상에 어느 나라 농산물이 올라와 있는지 안 보고도 알 것 같다.

그들은 밥상에 올라온 것들과 미국말로 "먼 이국 땅까지 오느라 고생했네, 내가 너희를 여기까지 오게 하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는가" 하며 저들끼리 '낄낄 하하' 할 것이다. 이 나라 농민들이야 미국 농산물의 꼬부라진 말 알아 먹지못하니 "저것들이 시방 뭔 소리디야" 하며 멀뚱멀뚱 바라보다 "에이, 더런 세상" 하고 막소주나 찾을 것이다.

미국산 농산물 먹었다가 내 나라 말 잊을까 염려된다. 밥상에 올라온 것들이 영어로 뭐라 지껄이면 그것들 방바닥에 패대기치기도 우습고 하여 꾸역꾸역 먹어야 하는 게 이 나라 백성의 몫이라면 나는 이 나라 백성 안할란다.

그런 일 생기면 차라리 주민등록 말소시키고 홍길동처럼 율도국 하나 만들어 힘없는 이들과 정 나누며 오손도손 살련다. 정부가 백성을 버리는데 백성인들 정부를 버리지 못하겠는가. 그런 날 오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횃불 든 농민들.
ⓒ 강기희

태그:#한미FTA, #정선군, #농민,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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