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래전 '창비'에 소개된 어느 일본인 학자의 논문을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는데 내용인즉, 어느 민족의 민족성은 오랜 역사에서 비롯되지만, 무엇보다 삶의 터전인 땅, 다시 말해 산맥, 강, 대륙, 바다 같은 지형적 환경뿐 아니라 위도 경도를 포함한 전 지구적 지리환경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지리역사학자의 주장이라고 넘길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궁금했던 의문에 대한 실마리가 되었다.

세계사를 크게 동양과 서양으로 나눠 배웠는데 왜 남과 북으로 나누지 않는지, 그리고 아프리카와 남북 아메리카 대륙이 세계사에서 왜 등한시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문명은 같은 위도에서 동서로 길게 뻗어가기는 쉬워도 같은 경도로 남북으로 뻗어가기가 힘들다는 것, 가혹한 지리조건(열대사막, 대양)에 의한 고립은 문명의 정체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런 지리역사학적인 관점을 빌려서 다소 황당한 가정을 해보았다. 근대부터 시작된 서세동점(西勢東占)의 시작을 1842년의 난징조약으로 계산해도 근 200년 가까이 지속된 까닭이 동서양 문명의 지리적 조건에서 찾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일 먼저 들 수 있는 차이는 유럽의 지중해와 같이 땅속 동굴 같은 바다가 동양의 중국에는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차이는 정체된 문명 즉 미래의 식민지가 되어줄 아프리카 및 아메리카 대륙이 중국보다는 유럽에 훨씬 가까웠다는 것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한 발 앞선 지리상의 발견과 이후 가혹한 식민지 경영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그 힘으로 동양을 점령했다는 가정이다.

지중해 덕에 민주정치를 꽃피웠다?

그렇다면 첫 번째 차이, 즉 지중해 문명이 중국보다 한 발 앞서게 해주었다는 가정이 설득력이 있을까? 결과적으로 그리스로마 문명(지중해 문명)이 이를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지중해의 이탈리아 반도 내륙에 위치한 도시국가 로마가 동서유럽을 통일하는 대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지중해 전역에 건설되고 확산된 그리스 문명이 바탕이 된 것이 사실이다. 수많은 해양 도시국가들의 네트워크라고 불리는 지중해 문명은 그리스에 의해 시민주권의 정치체제를 탄생시켰고 이 체제는 원로원과 시민이라는 양대 주권을 원칙으로 하는 보다 발전된 정치체제로 로마에 계승됐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대륙에서는 도시국가보다는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봉건국가가 성립되기 쉬우며 민주정이 아닌 절대 군주정이 발전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정치체제 면에서 시민주권의 정체가 절대군주의 정체보다 경쟁력이 있다는 것은 노예제 유지 여부와 상관없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본다.

그러나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동서 문명의 차이를 그 문명이 성장한 지리적 조건에서 찾을 수는 있겠으나 서양 우위의 역사를 서양의 지리적 환경의 우위로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가혹한 지리적 조건에 처한 민족이나 국가가 더욱 강성해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해양문명의 조건이 대륙문명보다 조금 더 나은 지리적 조건이라 단정할 수 없다면 문명의 비교우위는 결국 많은 부분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로마인은 지중해 문명에 속한 다른 어떤 민족과도 다른 특수한 경우라고 시오노 나나미는 말한다. 전쟁에서 패하면 죽거나 노예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고대에 패자를 공동체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국가는 로마뿐이었다. 이후 로마가 이룩한 번영과 평화도 고대의 동서양을 비교해도 매우 예외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서구민주정치의 전형이 이미 고대 로마에서 실험을 한 것이다. 몇 가지 차이점이라 한다면 만민평등사상, 공산주의, 일신교의 체험 정도라고 할까. 풍부한 역사적 실험, 다양한 종교의 체험, 과학기술의 혜택에 따른 놀라운 속도의 교통과 통신. 이런 조건에서도 미국은 세계 각지의 전쟁과 학살, 굶주림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2000년 전 로마인은 다양한 민족, 수많은 종교가 뒤섞인 광대한 제국에 300년 넘게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이것만 보아도 그들이 얼마나 예외적이고 특수한 사람들인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런 로마인들의 특징을 해석할 길이 없어 아마도 로마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지니는 DNA가 아닐까, 라고 말했을 정도다. 어쩌면 로마역사 이후 찾아온 서양의 중세 역사가 동양과 비교해서 오히려 일반적인 역사적 진행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로마인 정치적 균형감각의 밑바탕은 '공공심'

우리 현실에서도 남북한 사이 평화 공존과 번영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로마인들의 특징을 이해하고 연구할 필요는 충분하다고 본다. 그들이 타고난 DNA를 쉽게 우리 것으로 할 수는 없을 것이나 그 특징 가운데 꼭 필요한 것을 배울 필요는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 부러운 것이 시오노 나나미가 지적한 로마인들의 '절묘한 정치 균형감각'이다.

로마는 국가의 발전 단계에 맞는 합리적인 정체를 시의 적절하게 채택해 왔다.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와 비교해 힘이 못 미칠 때는 왕정, 그리스를 무릎 꿇리고 카르타고와 경쟁할 때는 공화정, 지중해를 제패하고 북서유럽으로 나아갈 때는 원수정, 그때마다 수많은 영웅들이 나타났지만 그렇게 수많은 영웅들이 단절 없이 연속해서 나타날 수 있게 한 원동력은 로마인들이 상황에 맞게 정치적으로 균형을 유지해 왔다는 데 있다.

물론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게 공을 돌려야 하겠지만 그들을 믿고 따르고 힘써 도운 수많은 로마시민병사들의 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들이 원로원으로 대변되는 사회 기득권 세력에 맞서 승리를 일구었기 때문이며 그 승리 뒤에는 공화정 이래 지속되어 온 로마인들의 '공공심'이 있었다.

▲ 로마 병사들
ⓒ 한길사
다시 말해 로마인들의 절묘한 정치 균형감각의 바탕이 사회에 대한 '공공심'이라면 그것이 민회 또는 원로원에서의 선거제도로 실천되었기에 훌륭한 지도자들이 풍부하게 배출될 수 있지 않았을까. 이제 로마인들의 바로 그런 공공심과 정치의식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시점이다.

지난해 5.31 지방선거가 있었다. 그해 봄, 시골에 내려갔을 때 우연히 기초의회 의원에 출마한 후보를 면 소재지의 어느 사무실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때 그 후보가 하소연한 내용이, 요즘은 기초의회 의원까지도 정당 공천으로 출마하게 되었는데 정말 어렵다는 것이었다. 지난번 2004년 선거 때만 해도 기초의회는 정당 공천이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시골에 사는 일반 사람까지도 정당에 줄을 서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엔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당시 바뀐 지방선거가 많은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첫째는 후보가 지적한 것처럼 중앙정치에서 시골정치까지 정당에 줄을 서야만 하는 환경이 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마을에서 오랜 기간 지역 유지 노릇을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당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무임승차의 길을 깔아준 것이다.

둘째는 언론에서도 제기한 문제인데 지방의회 의원에 대한 유급제 실시다. 적게는 3000만원에서 많게는 6000만원씩 연봉을 보장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지방의회 선거가 아니라 고급 공무원 선발 시험이다. 가뜩이나 가난한 지방에서 작은 정부를 실현하지 못할망정 오히려 비대해졌다는 비판이 나올법 하다. 이런 환경에서는 지역 유지로서의 명예와 공공심에 기반한 활동이 아닌 직업으로서의 활동이 되는 것인데 이것이 지방자치의 취지에 과연 합당하냐는 것이다.

정부는 지방의회 의원을 지망하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95년 처음 실시된 지방자치가 10년 만에 한계에 다다랐음을 시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의 쇠락에 대해 언급할 때 몇 가지 열거한 내용 가운데 가장 강조한 것이 로마인들의 공공심이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지방의 기사 계급이 나누어 분담하면서 인프라의 유지 보수 및 교육과 국방에서 중앙 정부가 적은 비용으로 제국을 관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누구도 자기 자신의 열정과 돈을 나누려 하지 않는 세상이 되면서 '누구나 로마 시민'이라는 '안토니누스 칙령'이 나오게 되고 이는 다시 안정적인 세입원의 상실과 임시 특별세의 남발을 불러와 해방되는 노예가 사라지고 재산을 기부하고 나누는 현상이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러한 개인주의의 급속한 확대는 결국 가문 좋고 능력 있는 청년들의 군대 기피를 초래하고 군대의 질이 떨어짐과 동시에 야만족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게 되면서 농민들은 농토를 버리고 유랑을 하거나 조금이라도 안전한 도시로 몰리게 되고 도시는 과밀화와 생활수준의 저하를, 농촌은 지방자치단체의 붕괴를 초래했다.

로마의 쇠락은 기독교 때문도 아니고 야만족 때문도 아니다. 군대의 야만족화도 사실은 로마 쇠락의 결과일 뿐이다. 가장 큰 이유는 로마인의 공공심이 흔들렸다는 것이다. 왜 흔들렸는가? 시오노 나나미는 양대 주권자인 원로원과 시민, 로마와 속주, 속주와 야만족, 도시와 지방자치단체 사이에서 오랫동안 유지해온 절묘한 균형감각, 그 감각의 상실이 아닌가 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500년이 넘도록 균형을 유지해온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해방 이후 최근까지 국정을 운영해온 세력 가운데 공공심에 기반한 정치인들이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대주의와 기회주의에 물든 정치인들을 배제하고 주도권을 잡은 지 겨우 10년. 그에 비하면 지금의 상황도 넓게 보면 그리 안타까워할 일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항상 현재가 중요한 법이다. 현재 제대로 방향을 잡고 있는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지방의원 유급제와 정당공천 철회해야

지방자치 실시 10년 만에 아무도 돈을 주지 않으면 출마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물질숭배 때문인지, 급속한 민주화의 반작용인지, 기회주의자들의 저열한 음모인지 진단을 내릴 때다. 뚜렷하게 다가오지 않는 문제라고 가벼이 여길 수 없다. 단계적이고 현실적인 조치와 입법으로 더 악화되기 전에 치유할 길은 없을까?

전문 연구자가 아닌 한계로 로마인들의 균형감각을 모방해서 추상적으로 몇 가지 말해보고자 한다. 먼저 지방의회 의원에 대한 유급제 실시는 대체 입법을 전제로 철회해야 한다. 그리고 지방의회 선거에서의 정당 공천 규정도 철회해야 한다.

그 이후에 대한 대안이 뭘까? 현재 지방의회 의원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시골 유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심하게는 돈 있는 사람 중에 더 돈을 벌려고 나대는 사람들 또는 정당 정치인들의 '꼬붕' 노릇이나 하는 '알바' 정도이다. 20%도 안 되는 투표율이 증명한다. 이런 의식이 팽배한 상태에서 지방자치의회와 의원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선거법을 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피선거권 자격을 지방의회 의원 및 지자체장 경력자 또는 정부 내 고위공무원단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말을 빌리면 한마디로 '잔다리'를 밟으라는 것이다.

공화정 로마에서는 20대에 호민관 또는 군단의 대대장이나 회계감사관으로 군대 행정을 체험한 이후에야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게 했다. 이후 재무관이나 안찰관으로 속주의 행정을 체험해야 비로소 원로원 1인자인 집정관에 나설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경력을 거쳐야 속주의 총독 또는 군단의 사령관으로 나갈 수 있다.

이런 절차와 과정에 있어서 한때 예외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특수한 예에 그쳤고 이와 같은 기본 인사제도는 원수정 초반까지 고집했다. 잔다리를 밟는 과정에서 경험과 실력을 검증받게 되고 공동체에 대한 기여가 높은 사람이 출세하는 시스템이 정착되면서 잔다리를 밟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시선이 자연스럽게 우호적으로 바뀌게 된다고 했다.

▲ 지난해 4월 서울시의회 본회의를 방청하는 초등학생들(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권우성
현실에서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은 아무나 나서지 않는다. 굳이 선거권을 제한하지 않더라도 위와 같은 경력을 거친 사람들이 나서게 된다. 그러나 '40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적의 성인이라면 누구나 대통령 후보로 피선거권을 갖는다'는 허울좋은 규정보다는 휠씬 솔직하고 실리적이다.

우선 국민이 지방의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다. 우리의 지방자치 현실에서 꼭 필요한 것은 이처럼 장차 국회의원이나 장관 또는 대통령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으로 지방의회를 바꾼다면 최소한 국민들의 관심과 감시가 현재보다는 향상될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최소한의 봉사 경력도 없이 지금처럼 화려한 학벌만으로 아무나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서는 몰염치는 배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광역 단체장을 제외한 모든 지방의회 의원의 정당 공천을 배제함으로써 지방의회를 정당으로부터 독립시키는 장치가 강구되어야 할 것이며 유력자들의 공동체 기여를 전제로 그들의 지방의회 진출을 돕는 장치도 강구되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광역단체와 기초의회간 인구 및 재정 불균형으로 인한 자치단체간 갈등과 파행을 막기 위해서 광역의원의 자격을 기초의원 경력자로 한정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광역시에서 태어나 자란 유력자의 경우 인근 연고지의 기초의회에 입후보해 경력을 쌓고 이후 자신의 지역인 광역의원으로 출마하는 것이다. 이후 자치단체장이나 국회로 도전하는 순서가 될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흔치 않지만 현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장과 군수를 지내고 행자부장관을 거쳐 대선 출사표를 던진 김두관이다. 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그의 경력 자체가 앞으로의 대한민국의 정치 체제가 나아갈 길을 로마식으로 앞서서 보여주었다고 나는 평가한다.

더 나아가 대통령을 지낸 후에도 광역단체장으로 나갈 수 있게 하는 것도 생각해볼 만하다. 우리 현실에서 아직은 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지만 아마도 군주제 아래서 오랫동안 살아온 습성이 아닐까. 이것은 지방과 지방의 갈등을 조정하고 지역간 불균형을 해소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본다.

이처럼 먼저 현재의 지방의원 유급제와 정당공천을 철회하고 국회의원과 대통령의 피선거권을 지방의회 의원 및 단체장 경력자로 제한하는 선거법으로 개정한다면 명예로운 경력에 나서는 이들이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지방의회를 바라보는 국민의 의식과 관심 및 감시가 증가할 것이며 공동체에 대한 공헌도 없이 나서는 이들을 배제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방의회 거친 국회의원 10%도 안돼

실제로 17대 국회의원들이 과연 얼마나 잔다리를 밟아서 국회에 입성했는지 궁금하여 그들의 약력과 경력을 살펴본 적이 있다. 비례대표가 전부인 민주노동당과 민주주의의 가치보다는 학벌과 돈을 내세우는 한나라당을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보수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대상이었다.

그들 가운데서도 95년 지방자치 실시 이전에 의원을 지낸 사람들과 민주화 투쟁으로 감옥에 갔다 온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만으로 한정하여 살펴본 결과 지방의회 또는 광역의회 의원으로 잔다리를 밟은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10%도 안 되었다. 지방자치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탓이라고 하기엔 납득할 수 없는 수치다.

TV나 언론에 얼굴을 내밀고 다녔거나 유력정치인의 심부름 노릇을 하며 다진 인맥, 또는 돈의 힘으로 공천권을 샀거나 화려한 학벌과 정체가 불분명한 잡다한 명함으로 온몸을 두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국회에 들어가는 빠른 길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반화된 결과 국민들은 중앙 정치와 지방 정치를 별개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지방의회에 출마하는 사람들을 중앙의 정치인과 비교해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들로 암암리에 단정하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지게 되었고 급기야 김두관 장관의 인사청문회에서 "이장하다 장관 되니 좋습니까?"라는 멸시 어린 비아냥이 거리낌 없이 나오게 되었다고 본다.

서울의 명문대학을 졸업한 젊은이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해방 이전부터 지역의 유지로 점잖게 살아왔고 지역 주민들로부터 신망을 받아왔다. 할아버지는 일제시대 독립운동까지는 하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친일부역을 한 것도 아니어서 그때부터 가세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해방 후 시골 출신으로 성공한 사업가를 사위로 맞으면서 집안이 다시 일어서는가 싶었는데 한국전쟁의 와중에 사위는 인민군에, 아들은 국군에 가담하면서 가족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아들들과 사위는 모두 죽었고 어린 손자만 홀로 살아남았다. 어린 나이에 오갈 데 없어진 젊은이는 고모부의 친구에게 맡겨 자란다. 덕분에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대학에 입학하지만 학생운동에 뛰어들면서 수배를 받고 숨어다니는 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세월은 흘러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군부독재가 끝났다. 자유를 찾은 청년은 노동현장으로 들어가 이번에는 민주노조운동을 시작한다. 용케도 감옥은 가지 않았지만 어려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 후 8년 지방자치 선거가 최초로 실시되자 그는 작업장이 있는 지역의 기초의회 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의원시절 지역의 숙원사업이며 정부기관의 부패를 고발하는 등 활동을 인정받아 98년 기초단체장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그 사이 여야 수평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고 임기를 마칠 즈음에는 그가 노동법 위반으로 기소되었을 때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기까지 했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그는 정당에 가입하고 당의 공천을 받아 서울시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그리고 노동 상임위에서 그는 자신이 과거 일했던 작업장의 파업을 중재하는 등 파업 전문 해결 의원으로 이름을 떨친다.

2006년 5월 그는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기로 하고 당내 시장 후보 경선에 뛰어들지만 처음으로 고배를 마신다. 이듬해 그의 소속 정당은 대선에 패배한다. 그는 그의 지역구에 '한미FTA 저지 국민행동본부'를 차리고 지방의회 및 노조를 찾아다니며 강연을 시작한다. 이듬해 총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비록 가상이지만 이런 정치인들이 지금처럼 극소수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계속해서 나올 수 있는 환경을 지금 만들어야 할 때다. 국민들의 공동체에 대한 공공심을 환기시킬 수 있으면서 서울과 지방의 균형발전을 위해서라면 지방의회와 국회를 하나의 틀로 연계하는 선거법 개정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잔다리를 밟아 국회에 들어가는 정치 시스템이 당연시되는 시기를 하루빨리 앞당겨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로마이 이야기> 응모글. 3년 전부터 <로마인 이야기>를 읽었다. 자세히 보느라 띄엄띄엄 읽어오면서 여러 가지 짧은 생각들이 두서없이 부유했는데 이번 기회에 정리를 하게 된 것 같다.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1995)


태그:#로마인 이야기, #공공심, #정치적 균형감각, #지방자치, #선거법개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