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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하면 '인천 상륙 작전'이 생각난다. 아직도 나의 뇌리 속에는 전쟁의 흔적이 꽈리를 틀고 있는 모양이다. 근래 논란을 일으켰던 맥아더 장군 동상도 아마 인천에 있지 않나 짐작된다. 얼마 전 영천의 호국원에 갔다가 벽에 걸려 있는 게시물 안의 사진에서도 그를 보았다. '기함 마운트 매킨리 함상에서 상륙 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1950.9.15.)'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사진이었다. 맥아더에 관한 흥미 있는 해설을 읽어본다. 주강현의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 321쪽이다.

▲ 영천 호국원에 게시되어 있는 맥아더의 사진
ⓒ 정만진
필리핀 총독 명단에 A.맥아더 장군이 등장한다. 그는 누구일까. 이른바 태평양 전쟁을 이끌었고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D. 맥아더의 친아버지다. 그의 재임 기간(1900〜1901)은 처절한 독립전쟁(1899.2〜1902.4) 기간이었다. 전쟁은 잔인했다. 섬 지방에서 전투를 지휘했던 스미스 장군은 병사들에게 "나는 포로를 원치 않는다. 죽이고 태워버려! 더 많이 죽이고 태워버리는 것이 곧 내가 바라는 바다!"라고 명령하였다.

다른 지휘관들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왜 포로 숫자에 비해 그렇게 많은 필리핀인들이 사살되었느냐고 묻자, 맥아더 장군은 자신의 병사들이 "과녁 맞히기 연습을 효과적으로 훈련했던 것"이라고 응답하였다.

결국 2만여 명의 필리핀 병사들이 숨지고 25만여 명의 시민들이 희생당하였으니, 필리핀을 정복하기 위한 미국인들의 전술은 '대량 학살' 그 자체였다. 태평양에서 펼친 맥아더 1세의 의연한 전통을 이어받아 그의 아들이 2차 세계대전에서 다시 태평양으로 나아가며 끝내 일본과 한국에까지 발을 내딛게 되니 아시아 바다에 관한 맥아더 집안의 끈질긴 악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 백령도 가는 길

백령도에 가려면 인천에 가야 한다. 사실 인천부두에 온 것은 오늘(6월 25일)이 처음이 아니다. 백령도에 가려고 작년 11월 7일에도 이 곳에 왔다. 그러나 심한 풍랑 탓에 배가 뜨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부두 인근에서 하룻밤을 잤다.

잠에서 깨어나니 제법 날씨가 괜찮아 보였다. 잔뜩 기대에 부푼 가슴을 두근거리며 다시 국내선 대합실로 들어섰다.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니, 서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아니나 다를까, 서성대는 사람들에게 확인하니 한 시간을 기다려보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고 했다.

아직은 배가 바다로 나아갈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한 시간 뒤, 하지만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 시간을 더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한 시간을 더 기다렸다. 결국은, 끝내 그 날 배를 타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저 아쉬움을 달래고 대합실 벽에 걸려 있는 두무진 사진이나 카메라에 담았다. 대합실 2층으로 올라가 아쉬움과 초조함에 차마 편안히 앉아 있을 수도 없어 선 채로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카메라에 담았다. 대합실 바깥 사진도 찍었다. 그런다고 백령도에 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달래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일수록 더 애잔하다고 했던가.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대구로 내려오는 길에 삽교천 함상공원에 들렀더니 거기에도 인천 상륙 작전 사진이 커다랗게 내걸려 있었다.

▲ 인천부두 국내선 대합실에 걸린 두무진 풍경 사진을 재촬영했다. 혹 앞으로도 백령도에 가볼 수 없다면 이 사진이라도 보며 아쉬움을 달래야지 하는 마음에서.
ⓒ 정만진
▲ 인천항 국내선 대합실 앞(왼쪽), 2층에서 내려다본 대합실 광경. 풍랑 탓에 백령도로 가는 배를 출항시킬 수 없어 일단 연기하니 기다리라는 안내방송에 초조한 승객들이 서성이고 있다.
ⓒ 정만진
▲ 백령도 방문이 좌절된 후 아쉬움을 달래려고 삽교 함상공원에 들렀다. 그 곳에 게재되어 있는 인천상륙작전 사진을 재촬영했다.
ⓒ 정만진
발발일로 전쟁 성격 규정?

▲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332쪽에는 동학 농민군 위령탑, 김좌진 부대, 6월 민주항쟁 사진이 실려 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교과서는 깨끗하다. 대학입학시험에 출제 빈도가 낮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듯하다.
ⓒ 정만진
2007년 6월 25일 오늘은 '6·25' 즉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이다. 그런데 '6·25'라고 해야 하나, 한국전쟁이라고 해야 하나, 그것도 헷갈린다. 지금은 군대 생활을 하고 있는 아이가 고등학교 때 배운 교육부 발행 <고등학교 국사>를 들춰보니 '6·25 전쟁'이라 되어 있다. '6·25'도 아니고 한국전쟁도 아닌, '6·25 전쟁'이라 이건 또 뭔가?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 19~20쪽에 나오는'세계 어느 전쟁도 발발일을 기준으로 그 전쟁의 성격을 규정하는 예는 없다'와, '외국의 모든 학자들은 ('6·25'를) 한국전쟁(Korean War)이라 부르고 있다'는 설명에 따라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게 좋을 듯하다.

그나저나, 아이의 국사 교과서를 다시 뒤적거려 보니 전체 435쪽 중에서 329쪽까지만 밑줄이 그어지는 등 배운 흔적이 있고 그 뒤로는 정말 너무나 깨끗하다. 개화기 이후로는 전혀 가르치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은 것이다. 개화기, 동학, 의병, 독립운동, 분단, 한국전쟁, 민주화운동, 통일문제 등에 대해서는 대학수능시험에 출제되지 않으니 가르칠 이유도, 배울 필요도 없다는 뜻인가? 이 무슨 황당한 충격이란 말인가!

한국전쟁이 휴전한 날은 1953년 7월 27일이다. 그러나 이 날짜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관심이 일어난 날에 집중된 탓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앞으로는 결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므로, 휴전을 넘어 종전, 영원한 평화와 통일을 꿈꾸고 그를 위해 손을 맞잡고 마음과 힘을 모아야 한다.

그런 뜻에서, 한국전쟁 발발일인 6월 25일과 서해교전 발발일인 6월 29일(민주화운동에서는 '육이구'인지 '속이구'인지의 기념일이기도 하다)을 혼자 기념하여 서해의 서북쪽 끝에서 평화와 통일을 고독하게 상징하며 해풍에 맞서고 있는 백령도를 오늘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다.

하늘은 파도를 잠재워 주셨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으니, 멀리 대구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나 꿈결처럼 예까지 달려온 나의 충정을 아신다면 하늘도 무심치는 않으리. 정말인가, 오늘은 파도가 잔잔하여 배가 뜨는 데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한다. 야호! 야, 야호!

몇 년 전, 경외하는 벗으로부터 놀라운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대구에서 같이 출발한 일행 서른 몇 명은 물론이고, 낯선 관광객 백여 명과 함께 백령도로 가는 쾌속정을 탔다고 한다. 이 날은 풍랑이 상당했다고 한다.

배가 인천 부두를 떠난 지 두 시간쯤 지났을까. 이미 그 무렵에는 승객 대부분이 극심한 구토에 시달리다 못해 대부분이 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승객 중 누군가가 바닥에 누워 있으면 구토 증세가 덜 하다는 말을 하자 다들 그렇게 따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극악한 구토는 멈출 줄 몰랐고, 마침내 모든 승객들이 백령도 구경한 일보다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라는 데 합의해 뱃머리를 돌렸다고 한다. 백령도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인천으로 되돌아 왔다는 말이다.

그 이야기를 전하면서 벗은 말을 덧붙였다.

"근데 말이지, 인천 쪽으로 배를 돌리자마자 구토 증세가 싹 가라앉더군. 신기했어. 바람의 방향하고도 관계가 있다고 하더라고."

약국으로 가서 구토가 진정되는 약을 샀다. 이미 귀밑에도 약을 붙이고 있는 판이었다. 약사가 그것을 보더니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귀에 붙인 걸 떼든가, 아니면 약만 먹든가 둘 중 하나만 선택하세요. 붙이고 먹으면 몸에 해롭습니다. 약효도 없고요."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기로 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약을 좋아하는 족속이 우리 한국 사람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자랑스러운 배달 겨레의 일원이다. 붙이고, 또 먹을 것이다. 그래도 약사 앞에서 그렇게 주장을 고집하기는 좀 미안해서 "조금 있다가 한 가지는 포기하죠, 뭐"했다.

돌아서는데 약사가 또 말을 건네온다.

"오늘은 파도가 잔잔하니 백령도 가는 덴 문제가 없겠네요. 그렇지만, 백령도는 여기와 또 다르답니다. 여긴 이렇게 멀쩡해도 백령도는 안개가 잔뜩 끼어서 아무 것도 못 보는 수도 있지요. 힘들게 거기까지 가서 아무 것도 못 보면 뭐 하나요? 가지 않는 게 현명하지."

이런! 말이 씨가 된다는데 이 양반은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나!

'태극기 휘날리며' 백령도로 나아가다

▲ 백령도로 가는 초쾌속선이 태극기 휘날리며 힘차게 물살을 가르고 있다.
ⓒ 정만진
이윽고 개찰구를 지나 배타는 곳으로 나아간다. 아직 백령도로 출발하기도 전인데 돌아올 때 내리는 선착장이 눈에 들어온다. 백령도 구경을 잘 마치고 무사히 저길 밟아야 할 텐데…. 구토 없이 오가고, 안개 없이 절경을 구경해야 할 텐데….

드디어 배가 출발한다. 그냥 쾌속정도 아니고 초쾌속정이라고 한다. 날카롭게 물살을 가르며 초쾌속정은 백령도를 향해 전진, 또 전진한다. 영화 제목 같지만 초쾌속정은 꽁무니에 '태극기 휘날리며' 거칠 것 없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이제 네 시간 후면 백령도 땅을 밟게 된다. 심청과 두무진이 기다리는 백령도로 나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이다. 빨리 사진을 찍어 와서 사람들에게 보여줘야지! 여기가 바로 저 옛날 고구려 사람들이 불철주야 바닷바람과 싸워가며 당나라의 침입을 막아 민족적 자존심을 굳게 지킨 곳이라고! 심청이 몸을 던진 인당수가 지척에 보이고, 그녀가 다시 살아나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고, 나아가 아버지만이 아니라 모든 맹인들의 눈을 다 뜨게 만든 상생과 평화의 땅이라고! 북한땅 장산곶이 그냥 눈에 들어오는 곳이라고!

▲ 심청각과 그 오른편의 심청 동상. 이 곳에 서면 북한땅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동상 뒤로 희미하게 찍힌 곳이 바로 북한 땅인데, 이 희미한 땅의 왼쪽끝이 장산곶이고, 그 앞바다가 바로 심청이 죽은 인당수다. 심청각 뒤 약 12km 지점의 바다가 인당수인 것이다.
ⓒ 정만진

태그:#백령도, #심청, #한국전쟁, #6∙25, #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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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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