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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 태인면 피향정 하연지.
 정읍시 태인면 피향정 하연지.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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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답사를 접기엔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 정읍 태인에 있는 보물 제289호 피향정에 잠시 들렀다 가기로 한다.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태인 교차로로 빠져나와 30번 국도를 달리자 금세 태인면 소재지에 이른다.

피향정은 호남 제일의 정자를 자처하는 곳이다. '이불 피' 자에 '향기 향' 자를 써서 피향정이라 부른다. 이불을 덮어도 연꽃 향기가 난다는 뜻인가? 옛적엔 이 정자에 딸린 연지가 두 곳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하연지 밖에 남아 있지 않다. 하연지도 그리 작은 연지는 아니다. 꽃이 진 연지가 쓸쓸해 보인다.

신라 시대 최치원이 태산 군수로 있을 때, 이곳 연지가를 소요하며 풍월을 읊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이 정자가 언제 세워진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나로선 왜 굳이 이곳에다 이렇게 규모가 큰 정자를 세웠는지 모르겠다. 앞으로 냇물이 흐르는 것도 아니고 뒤쪽에 바짝 산에 붙여서 솔바람을 맡자는 것도 아닌 아주 어중간한 위치다. 왜 작지만 운치 있는 산도 있는 태인 여자중학교 근처에 세우지 않은 것일까.

정읍시 태인면 보물 제289호 피향정.
 정읍시 태인면 보물 제289호 피향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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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의 우물반자.
 천장의 우물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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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조선 시대 중기의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 크기의 팔작집이다. 4면이 모두 개방되어 있고 주위에는 계자난간이 둘러져 있다. '호남제일정'이라는 현판이 있는 남쪽에 정자로 오르는 돌계단이 있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서까래 아래엔 '피향정'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연등천장의 합각 밑에 설치한 작은 우물천장이 특히 아름답다. 옛 사람들이 '호남제일정'이라고 호기를 부렸던 원인이 있다면 이 우물천장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곳에 올라 하연지에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는 일도 운치 있긴 하지만.

정자 우측 마당 구석을 바라보니, 여남은 개 남짓 되는 '불망비' 혹은 '선정비'가 일렬로 늘어 서 있다. 시방 저 비들은 벌 받고 있는 중이다.

100여 년 동안 벌서고 있는 선정비들

마당가 한 구석에 서 있는 깨진 선정비들.
 마당가 한 구석에 서 있는 깨진 선정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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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구석에 있는 고부 군수 조병갑 아버지 조규순 영세불망비.
 담장 구석에 있는 고부 군수 조병갑 아버지 조규순 영세불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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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정을 베풀고도 선정을 베풀었다고 부득부득 우기는 죄, 각골난망 할 만큼 큰 은혜도 입힌 바 없으면서 백성에게 기억을 강요하는 죄.

비들은 모두 한군데씩은 깨져 있다. 이마가 깨진 놈, 허리가 부러진 놈, 다리가 잘린 놈 등등. 모두 갑오동학혁명 때 농민군들이 "싸가지 없다"고 손 본 놈들이다. 담장의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비가 고부 군수 조병갑의 아버지인 태인 군수 조규순의 '영세불망비'다. 조병갑이 자신의 아버지의 영세불망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고부 농민들로부터 1천 량을 수탈하여 세운 것이 바로 이 비다.

네 아들 녀석 때문에 우리마저 덤으로 이 꼴이 되었노라, 구박을 받다 보니 구석으로 쫓겨난 것인가. 영세불망은 불망이다. 다만 선정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패덕을 기억하는 것이지만.

연지 근처에 서서 지경 쪽을 바라본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성황산이 보일까 해서다. 고부 봉기 후, 전봉준이 집이 불타버리자 조소마을에 있는 가족을 옮긴 것도 이곳 태인에서 멀지 않은 산외면 동곡리였다.

성황산은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주력부대의 최후 격전지로 알려진 곳이다. 원평 싸움에서 패하고 나서 이곳으로 쫓겨와 진을 친 동학농민군은 1894년 11월 27일, 스즈키가 이끄는 일본군과 관군을 맞아 싸웠으나 무참하게 패한 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다음에 이곳에 올 적엔 꼭 성황산을 답사하리라, 마음먹는다.

태인 전투 패배 후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전봉준은 김개남이 은신하고 있는 태인 산내면 종성리로 오다가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 이르러 왕년의 친구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고 만다. 1894년 12월 2일(陽 12월28일)의 일이다.

그는 순창을 거쳐 담양의 일본군에 인계되어 나주에서 전주를 경유 12월 18일(음), 서울로 압송되는데 동학농민군들의 구출 작전을 염려하여 일본 영사관 감방에 수감된다. 그리고 다음해 5차에 걸쳐 일본영사의 심문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은 그 이튿날 새벽 2시, 손화중, 최경선과 함께 교수형으로 생애를 마치니, 향년 41세였다.

時來天地皆同力 때를 만나서는 천지가 모두 힘을 합치더니
運去英雄不自謀 운이 다하매 영웅도 스스로 도모할 길이 없구나
愛民正義我無失 백성을 사랑하고 의를 세움에 나 또한 잘못이 없건마는
爲國丹心誰有知 나라를 위한 붉은 마음을 누가 알까


- 전봉준 '절명시'



동학혁명의 소중한 역사 현장인 완주 삼례


판화 형식을 빌어 설치한 '선양의 장'의 부조와 '대동의 장'의 조형물.
 판화 형식을 빌어 설치한 '선양의 장'의 부조와 '대동의 장'의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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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념의 장' 조형물.
 '추념의 장'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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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우측에 자리한 '동학농민군 출진상'.
 광장 우측에 자리한 '동학농민군 출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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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인 인터체인지로 들어가 호남고속도로를 탄다. 창밖으로 바라다보이는 김제 만경 평야가 부옇게 비에 젖고 있다. 삼례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삼례읍 신금리에 있는 삼례 봉기 역사광장으로 향한다.

삼례는 갑오동학혁명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현장이다. 1892년 11월(음)에는 수천 명의 동학교도들이 교조신원운동을 펼쳤던 곳이다. 그리고 1894년 9월(음)에 10만여 명의 농민군이 '척왜양창의'의 깃발을 나부끼며 2차 봉기를 일으킨 곳이다.

완주군 문화체육 시설지구 내에 조성된 역사광장은 2002년 12월 준공됐다. 입구에 들어서자, 농민전쟁의 전개과정을 설명과 판화 형식으로 새긴 4각 기둥의 부조물 5개가 손님을 맞는다.

광장 중앙엔 농기구인 쇠스랑을 형상화한 '대동의 장'이 있다. 쇠스랑을 든 팔 아래엔 돌이 쌓여 있다. 방문객들이 여기에다 직접 돌을 놓도록 함으로써 동학 정신의 확산과 계승을 노린다는 의도다. 그 옆에 농민군을 추모할 수 있도록 한 돔 형식으로 된 조형물인 '추념의 장'이 있다.

역사광장을 돌아 나오면서 마지막으로 광장 우측에 있는 '동학농민군출진상'을 본다. 출진하는 농민군들을 부조와 조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한다.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 깨우는 '뭔가'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졸속이란 말의 뜻을 파고들면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반민주적 조치라는 뜻이 될는지 모르겠다. "대부분 조악하고 초라한 느낌을 주는 기념비니 탑들만 군데군데 널려 있네요"라고 불만을 토로하던 어느 독자의 얘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곳은 다른 곳보다는 나은 편이라고 위안을 삼아야 하나.

동학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역사광장을 떠나 집으로 향해 간다. 피노리에서 체포된 전봉준은 어느 길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을까. 전주를 거쳐 보름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는 것만 알 뿐, 그가 서울까지 가는 동안의 더 세세한 일정은 나로선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시인은 탁월한 상상력으로 그가 끌려갔던 길을 복원해낸다.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중간 생략)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 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 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 안도현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 일부

동학혁명의 지도자의 한 사람인 그가 죽음으로써 갑오동학혁명은 끝났다. 그렇다면 동학혁명은 실패한 혁명이었는가. 현실은 그들을 패배자로 낙인찍었을지라도 역사는 결코 그들을 패배자로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이차돈의 순교가 결국 신라에 불교 공인을 가져왔던 것처럼, 그가 이루고 싶었던 것 역시 시차를 두고 서서히 이루어졌다.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은 우리 역사를 반봉건에서 개혁으로 건널 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은 사람들이다. 동학혁명은 미완의 혁명이다. 동학혁명 이후에 일어난 4·19혁명이나 5·18 광주 민주항쟁도 모두 거기에 뿌리를 대고 있다. 불평등과 불합리가 있고 개혁할 것이 남아 있는 한 동학혁명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만일 전봉준이 다시 이 세상에 살아와서 내게 만일 전화를 걸어온다면 내게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지 말고 그 일을 이어가 달라고 말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16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전봉준, #삼례 역사광장 , #피향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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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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