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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비가 나리는 궂은 토요일 오후, 무비 카메라를 멘 10여명의 노인들이 모여든 곳은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713번지 “은빛둥지” 교육장이다.


삼삼오오 맡은 일거리에 따라 준비에 바쁘다.  카메라와 액세서리들을 챙기는 그룹과 여행에 필요한 준비물들을 챙기는 노인들, 몇 장의 종이에 나누어 적은 6박 7일의 만주여행계획표를 재검토하는 노인들, 2시간 가까운 정리를 마치니 10여 개의 행낭이 준비되었다.

 

11월 26일 (월요일) 드디어 만주를 정복할 할머니 군단이 장도에 오르는 것이다.
 

 

 

25명의 할머니들이 한국정보문화진흥원의 지원으로 지난 2006년 9월부터 동영상을 익히기 시작하였으며, 2007년에는 여성가족부의 지원으로 “할머니도 할 수 있다”라는 프로그램으로 무비 카메라의 촬영에서 편집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을 마치고 독립 프러덕션인 “은빛미디어”를 지난 4월에 설립하였으며, 야심찬 기획 하에 첫 작품을 “염석주를 찾아서”라는 다큐멘타리를 찍기로 한 것이다.

 

염석주는 수원 율전리의 만석꾼으로, 주로 안산의 최용신 선생을 도와 후일 “상록수”가 되도록 밑받침을 한 사람이며, 여운형 선생과 신간회를 운영하며, 만주(흑룡강성 오상시 충하진)에 90만평의 “추공농장”을 개발하여 당시 안산과 수원 일대의 빈농들을 이민시키고 그들의 명의로 땅을 분양하여 주었으며, 소출의 대부분을 독립군 2지대 김창환 장군의 부대에 군량미로 공급하였고, 나머지는 상해 임시정부로 재정지원을 하였다.


 


  그러나 염석주는 해방의 기쁨을 함께하지 못하고,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가족들에게 1944년 6월 싸늘한 사체로 인도된다.

 

왜경에 염석주를 팔아먹은 민족반역자는 자신의 죄과를 숨기고자 “빨갱이”로 몰아 염석주는 물론, 그 유족들의 사회적 지위까지 박탈한 채 반세기가 흐르고, 그리고 모두 염석주를 잊어버렸다.

 

“할머니군단”은 지난해부터 염석주의 자료를 모아오기 시작하였으며, 이제 마지막 단계로 염석주의 열정으로 일구어낸 만주벌의 “추공농장”까지 추적하게 이른 것이다. 

 

국내에서도 염석주의 자료는 귀하며 구하기 어려우며, 작은 자료이나 장기간 전국을 수소문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구할 수 없는 상태이다. 더구나 만주의 정치적 지리적 상황은 급변하였고 그곳에서 염석주의 자료를 취할 수 있을지는 지극히 의문시된다.
 

 

위의 염석주 사진을 힘들여 구하였으나,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고작하여, 정축(丁丑)년(1937년) 겨울의 한창 때. 음력 십일 월, 북만주 “하얼빈”, “망향사진관”에서 찍었다는 정도이다. 5남매를 둔 앞줄의 부부 가정사에 염석주(후열 우측)도 함께 사진을 찍어준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25명의 “은빛미디어”를 대표할 8명(5분의 할머니와 3분의 할아버지)으로 이루어진 “촬영단”은 이제 꽁꽁 얼어 붙은 만주벌로 날아갈 것이며, 염석주의 한을 풀어줄, 아니 이 민족의 목에 감긴 탯줄 같은 애물을 걷어버리기 위하여 힘차게 장도에 오르는 것이다.

 

12월 말까지 모든 자료는 한편의 다큐멘타리 “염석주를 찾아서”로 엮어지며, 12월말에 안산예술의 전당에서 각종 TV 방송사들 및 관심 있는 분들을 모시고 시사회를 갖게 된다.

 

할머니들의 열정은 얼어붙은 만주벌을 녹이고, 한 세기 동안 얽혔던 염석주의 한을 풀며, 우리국민 모두가 만주를 다시 한번 생각하여야 하는 계기를 줄 수 있어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할머니들이 무사히 뜻한 바를 이루고 돌아올 날을 기다린다.


태그:#염석주를 찾아서, #할머니 군단, #은빛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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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자신을 위해서 건강하게 살아야 하며 이는 사회에 대한 노인의 의무이기도한 시대이다. 노인들이 활기차게 살기 위하여 ICT기술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공유해가고 있습니다. 잘 이해가 안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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