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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 전, <오마이 뉴스> 인턴 기자에 지원하기 위해 서울에 도착했다. 우리 형이 먼저 상경하여 직장을 구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묵을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형의 가이드를 받으며 서울역에서 택시를 탔다. 택시 안에서 형은 기사아저씨에게 어디로 갈지를 설명했다.

“아저씨, 신림동 갈꺼거든요? '패션과 문화의 거리' 있죠? 그리로 가주세요.”
“오호… 문화인이신가 보죠? 역시 사람은 문화생활을 하고 살아야 한다니까요. 제가 이래봬도 문화생활은 좀 합니다.”

운전기사 아저씨는 유독 말씀이 많으신 분이셨다. 형은 웃으며 답했다.

“참나, '패션과 문화의 거리', 거기 아무것도 없는데요 뭘.”

그 후 나는 운 좋게도 <오마이 뉴스> 인턴기자로 뽑혔고, 현재까지도 기자교육을 받고 있다. 그간 내가 배운 것은 문제의식의 ‘더듬이’를 손질하는 법이다. 이번 주말, 나는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내가 가진 '더듬이'를 한 번 사용해 보기로 했다. '패션과 문화의 거리'에 패션은 어디에 있는지 문화는 어디에 있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기로 한 것이다.

신림5동에 위치한 패션과 문화의 거리입구이다. 문에는 '걷고 싶은 패션 문화의 거리'라고 써있다.
▲ 신림5동 신림5동에 위치한 패션과 문화의 거리입구이다. 문에는 '걷고 싶은 패션 문화의 거리'라고 써있다.
ⓒ 구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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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거리'에 문화공연장 하나 없어..

관악구는 2001년 12월, 신림사거리와 인접해 있는 신림5동 부근을 '걷고 싶은 패션 문화의 거리'로 지정했다. 당시에 발간되었던 <관악지역 정론지 KD NEWS>에 따르면 '패션거리'는 총 사업비 약 10억원을 투입하여 길이 약 500m 폭 16m의 곡선형 도로로 현상공모를 통해 당선작을 확정하여 기본 및 실시설계 용역을 거쳐 완공했다고 한다.

또한, 쾌적한 거리환경을 만들기 위해 차량중심의 도로를 보행자 중심으로 바꾸고, 차량통행도 일방통행으로 바꾸었다. 차량 감속을 위해 도로를 곡선화 하고, 보도의 차량진입을 방지하는 손톱모양의 볼라드를 도로변에 설치하며, 회화나무·선주목·칠엽수·은행나무 등을 식재하여 '그린환경'을 조성했다고 한다.

거리를 아름답게 조성하여 사람들이 "걷고 싶다"는 느낌을 받도록 만든 것이다. 그래서 정식 명칭도 '걷고 싶은 패션과 문화의 거리'이다. 그런데 과연 '걷고 싶은 그린 환경'일까? 나는 그다지 이곳을 걷고 싶지 않다.

한쪽에 차들이 일렬로 주차돼있어 보기에 좋지 않다.
 한쪽에 차들이 일렬로 주차돼있어 보기에 좋지 않다.
ⓒ 구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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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이곳 '패션과 문화의 거리'에는 앞서 말한 '그린환경'은 없고 '레드'와 '블랙'만이 있을 뿐이었다. 거리 곳곳에는 거대한 화분이 불규칙하게 놓여 있었는데, 그 화분에 식물은 보이지 않고 더러운 흙만이 가득 들어있었다. 도로도 마찬가지 일방통행은 잘 지켜지고 있는 듯 했지만, 도로 한쪽에는 온통 차량이 빽빽하게 주차 돼있어 보기에 좋지 않았다.

'패션과 문화의 거리'에는 이런 빈 화분이 여러개 있다.
 '패션과 문화의 거리'에는 이런 빈 화분이 여러개 있다.
ⓒ 구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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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문화'의 거리임을 내세우고 있는데, 가까운 곳에 '문화공연장' 하나 없었다. 아무리 돌아다녀봐도 발견되지 않았다. 곡선거리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골목골목 다녀봤지만, 보기 좋은 '조형물' 하나 설치돼 있지 않았다. 간혹 모텔촌과 유흥업소만이 눈에 띄고, 길 끝까지 갔을 때는 기찻길을 막은 소음 방지판만이 보일 뿐이었다.

패션과 문화의 거리에서 골목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모텔촌이 있다.
 패션과 문화의 거리에서 골목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모텔촌이 있다.
ⓒ 구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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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내가 이 곳 지리를 잘 몰라, 못 보고 지나친 것이겠거니 생각해 40대 아주머니로 보이는 행인에게 한 번 물어보기로 했다.

"제가 지방에서 올라왔거든요. 이곳 지리를 잘 몰라서 그런데 여기 '패션과 문화의 거리' 맞죠? 근데 문화 공연장 같은 거는 어디 없나요?"

아마도 그 아주머니는 내가 이곳에 관광하러 왔는지 아셨나 보다.

"하하하, 그런 곳 없어요. 여기 도로변이 쭉 패션과 문화의 거린데, 찾아봐도 없을 걸요? 이렇게 된 지 오래됐을 텐데요."
"첨부터 없었나요?"
"아마 그럴걸요."

저렴한 옷 가게들 대신에 '고깃집'만...

신림5동 1489번지 일대 주변에는 신림사거리, 재래시장, 보라매타운, 롯데백화점 등 대규모 상권이 인접해 있다. 관악구는 최초에 이러한 입지조건 때문에 '패션과 문화의 거리'에 저렴한 옷가게를 여러 개 유치하면 '성공 할 것'이라 판단했다.

시민들은 오히려 이런 거대 상권 때문에 '패션과 문화의 거리'에 위치한 저가 의류 가게가 침체하고 있다고 말한다. 상점을 운영하고 계신 분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기 위해 옷가게들을 돌아다녔다. 속옷가게를 운영하던 30대 여성은 "원래는 많았는데 장사가 잘 안 되어 빠져 나가는 옷가게 들이 많다. 뒤에 보이는 롯데백화점으로 손님들이 다 빠진 것으로 보인다. (손님들도) 이곳으로 올 이유가 없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전했다.

신림동에는 유독 고깃집이 많다. '패션과 문화의 거리'보다 음식의 거리가 맞을 듯 싶다.
 신림동에는 유독 고깃집이 많다. '패션과 문화의 거리'보다 음식의 거리가 맞을 듯 싶다.
ⓒ 구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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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에 있던 한 부동산 중개인도 "옷가게들이 준공 당시만 해도 많았다. 그런데 재작년부터 급격이 그 수가 줄고, 그 자리에 고깃집같은 식당들만 들어섰다"며 "이름만 '패션과 문화의 거리'다"라며 웃었다.

내가 돌아본 패션과 문화의 거리도 그랬다. 서민들을 위한 저렴한 옷가게보다는 고깃집, 통닭집, 유흥업소가 더 많았다. 저녁에는 간판 불이 켜진 가게들 중 고깃집이 옷가게를 수적으로 압도했다. 이른 저녁 시간이였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 곳에 남은 옷가게들은 장사가 잘 되고 있을까? 상점들을 직접 돌아다니며 물보기로 했다. 간판에 '여성도매의류'라고 쓰인 가게가 보였다. 역시나 손님은 없었고, 주인은 무료하게 TV만 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패션과 문화의 거리'에 처음 와봐서 그런데요, 아무리 찾아도 패션도 없고 문화도 없는 것 같아서요. 이 주제로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장사는 요즘 잘 되시는 편인가요?"

주인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허허, 장사요? 그냥 그래요, 뭐 다들 그럴 걸요? 옷가게들 모두 다 고깃집으로 바뀐 거 보면 아시잖아요."
"패션의 거리라고 지정했으면 관악구에서도 지원책 같은 걸 내 놓았을 것 같은데, 혜택은 보셨나요?"
"지원요? 허허 전 들어본 적도 없는데요."

이른 저녁, 옷가게는 일치감치 문을 닫고 고깃집만이 간판불을 켰다.
 이른 저녁, 옷가게는 일치감치 문을 닫고 고깃집만이 간판불을 켰다.
ⓒ 구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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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처럼, 진정한 '패션과 문화'가 있었으면..

시간이 지나 저녁이 밤이 되었다. 취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주말이라 형은 집에서 쉬고 있었다. 형이 취재는 어땠냐고 물어 보았다. 나는 대답 대신, 반대로 형에게 질문했다.

"패션과 문화의 거리 어떻게 생각해?"
"나는 왜 여기가 '패션과 문화의 거리'인지 궁금할 뿐이야."

잠시 동안 형과 나는 웃었다. 나는 재미난 상상을 해본다.

신림은 고시촌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고시생들은 힘든 시험 준비로 인해 패션에도 관심 없고 문화생활은 어림없는 소리다. 그런데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고시촌을 빠져나와 가까운 이곳 '패션과 문화의 거리'를 찾는다. 홀로 고시원에서 책과 씨름하다가 지쳐, 바람이나 쐬려 이곳을 찾은 것이다.

고시생들은 이곳에서 다채로운 문화행사를 만끽하며 시험의 압박 속에서 잠시나마 해방된다. 50% 세일이 적힌 옷가게 앞에 서서는 후줄근한 자신의 옷차림을 발견하고 부담 없이 가게 문을 연다. 녹색 나무들 사이를 걸으며 갑갑한 도심 속 스트레스를 풀고, 고시원 음지에서 해방되어 따뜻한 햇살을 온몸으로 맞는다. 고시생은 다짐한다. '다시 한 번 열심히 해보자!' 

모든 게 즐거워진다. 상상 뿐이라는게 아쉽지만….

덧붙이는 글 | 구자민은 <오마이뉴스> 7기 인턴기자입니다.



태그:#신림5동, #패션과 문화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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