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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오릉을 지나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전설을 간직한 우물이 있었던 나정(사적 245호)을 찾았다. 이곳은 현재 완전히 아무것도 없이 넓은 지역이 그대로 있다. 2002년 발굴 조사 되었는데 신궁(神宮, 박혁거세를 모시는 사당) 터일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였다.

발굴 조사후 지금은 터만 있다.
▲ 나정 발굴 조사후 지금은 터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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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양산재가 있는데, 신라가 건국하기 전, 여섯 촌을 다스리던 6부 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남간사지 당간지주와 우물

이제 멀리 당간지주가 보인다. 이 일대는 남간사지로 현재 마을 민가에 절터로 추정되는 각종 부재들이 많다. 그중 우물은 신라시대 우물로 추정되는데, 아무런 표지판도 없다.

남간사지 우물로 신라시대 우물이다.
▲ 남간사지 석정 남간사지 우물로 신라시대 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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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간사지 당간지주(보물 909호)는 남간사의 옛터 논 가운데에 세워져 있다. 논을 경작하면서 지주의 아래 부분이 드러나 있으며, 기단부가 없어서 기단 위에 당간을 세우던 받침돌도 찾아볼 수 없다. 지주 안쪽 면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세 군데에 뚫어 놓았는데, 특히 꼭대기에 있는 것은 십(十)자 모양으로 되어 있어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남산에 남아있는 유일한 당간지주이기도 하다.

남간사지 당간지주는 남산 유일로 위에 십자형 간구가 특이하다.
▲ 남간사지 당간지주 남간사지 당간지주는 남산 유일로 위에 십자형 간구가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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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이나 아직도 주변은 정비되지 못하고 늘 그대로 방치된 느낌이다. 세월이 갈수록 서서히 기울어진 현상도 보이기 시작한다.

창림사지는 여러 부재들이 절터에 남아 있는 곳

남간사지에서 당간지주에서 조금더 포석정 방향으로 가면 있는 창림사지는 삼국유사에 신라 최초의 궁궐지로 기록된 유서 깊은 장소로 통일신라시대에 창건 되었다. 고려 때까지 존속되어 오다가 조선 초기에 폐사되고 탑만 남아 있었는데, 1824년 사리 장업구를 도굴하려던 자에 의해 도괴되었다. 이 때 조탑 사실이 기록된 창림사 무구정탑원기가 나와 이 탑이 신라 문성왕 7년(855년)에 건립된 것임이 밝혀졌다.

남산에서 가장 큰 석탑이다.
▲ 창림사지 석탑 남산에서 가장 큰 석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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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명필가 김생이 쓴 사비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쌍두귀부와 많은 주초석만 남아있다. 주변 군데군데 주초석과 탑 부재들이 보인다. 현재 복원된 탑이 있는데, 1층 탑신석 사면에는 문비(門扉)를 표현하였는데, 사각테두리에 2줄로 되어 있고 안에 문고리를 표현하였다. 탑신석의 비례는 2·3층에서 현저하게 감소되었으며, 지붕돌 받침은 5단이다.

팔부중상 중 아수라 이다.
▲ 팔부중상 팔부중상 중 아수라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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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층기단면석에는 팔부중(八部衆)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아수라상의 표현은 정말이지 잘 남아 있어 9세기 탑으로 보인다. 신라 건국 시조의 무덤과 탄강 설화 그리고 궁궐지로 추정되는 곳이 아직도 남산자락에 있어 신라의 흥망성쇠를 그대로 알 수 있다. 남산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태그:#나정, #창림사지, #남간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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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문화유적을 찾아 답사를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구석진 곳에 우리문화를 찾아서 알리고 문화관련 행사를 좀 더 대중에게 보급하고자 하며 앞으로 우리문화재의 소중함을 일깨워 나아가려고 합니다. 괌심분야는 역사유적, 석조조형물과 민속,고건축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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