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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에 있는 황궁은 황제가 거쳐했고 도르곤을 비롯한 십왕(十王)은 주변에 궁을 지어 살았다.
▲ 황궁. 심양에 있는 황궁은 황제가 거쳐했고 도르곤을 비롯한 십왕(十王)은 주변에 궁을 지어 살았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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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곤이 자신의 집으로 소현세자를 초대했다. 뜻밖이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아니 갈 수 없다. 도르곤은 조선침략의 선봉에 섰던 원흉이지만 청나라의 2인자다. 부름일 수 있다. 소현은 행장을 갖추어 세자관을 출발했다. 대빈객 박황과 부빈객 박노 그리고 익위 양응함이 호종했다.

"어서 오시오. 세자. 우리가 조선에서 같이 들어올 때 고생도 많았고 정도 들었는데 초대가 늦어 미안하오. 나라의 법도가 엄하여 그리되었소."
"초대해 주셔 영광입니다."

"이제 황제의 허락이 있었으니 다른 왕들도 세자를 초대할 것이오."
"광영입니다."

술이 곁들여진 진수성찬이었다. 소현은 술을 사양했다. 조국을 패망시킨 적장과 흥겨운 마음으로 술을 마실 수 없었다. 도르곤이 친근하게 접근해왔지만 소현은 마음을 열 수 없었다. 건조한 담소의 시간을 보낸 후 세자관으로 돌아왔다. 소현세자는 자신을 세자관 까지 호위한 용골대와 마부대를 안으로 불러 차를 대접했다.

세자관 터로 알려진 심양 아동도서관. 최근엔 다른 곳이라는 설이 있다.
▲ 세자관, 세자관 터로 알려진 심양 아동도서관. 최근엔 다른 곳이라는 설이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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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대 청국은 이미 한나라가 되었으니 모든 일을 사실대로 알려 주시오. 한 가지 일을 신뢰하면 모든 일을 믿을 수 있고 한 가지 일을 불신하면 모든 일을 믿을 수 없소. 조선이 우리나라를 정성으로 대하면 어찌 세자께서 여기에 오래 머무르시겠습니까?"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짓는 용골대의 태도로 보아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불안했다.

"이르다 말씀입니까. 정성을 다하여 대하고 있습니다."
"정성을 다한다는 나라가 우리 몰래 명나라에 사신을 보낸단 말이오?"
"……"

소현은 할 말을 잃었다. 본국에서 명나라에 파견했던 동지사 김육을 통원보에서 비밀리에 만난 무재(武宰) 박종일의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 청나라가 어떻게 알았을까? 당혹스러웠다. 

"귀국이 명나라에 보냈던 사신이 돌아왔다 하니 틀림없이 칙서를 가져왔을 것이오. 그 칙서를 열어보지 말고 봉한 채로 우리에게 보내주시오."

난감한 요구였다.

"전에 사신이 돌아올 때는 칙서를 받아오기도 하고 받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칙서가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소만 있다면 무엇이 어려워 보내지 않겠소? 다만 칙서를 받아왔다면 열어보았을 것이니 봉한 채로 보내기는 어려울 것이오."

"이미 열어 보았다 해도 원본을 보내오도록 하시오."

"돌아가는 사신 편에 알리도록 하겠소."

청나라의 첩보망은 조밀했다. 부역하는 조선인도 있었고 조선 조정에 반감을 품고 가담하는 조선인도 많았다. 특히 변방 수령들의 학정에 시달린 조선인들이 월경하여 청나라의 정보 수집에 적극 협조했다.

청나라는 사신을 체포하지 않고 압박수단으로 활용했다

청나라는 동지사 김육과 서장관 이만영이 청나라 사람 옷으로 변장하고 청나라를 통과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신 일행을 체포하지 않고 미행했다. 압록강을 넘겨준 청나라는 동지사 문제를 조선 임금과 심양에 억류되어 있는 세자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세자 저하. 주위를 물리쳐 주시오."
용골대가 요구했다.

"모두들 나가 있으시오."
시종 신하들을 물리치고 세 사람이 마주 앉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조선 국왕이 나와 여기에 있는 마부대에게 백금을 보내 왔소. 미천한 장수에게 과분한 선물을 보내주셨으니 감사한 마음이오. 그러나 사사로이 받을 수 없는 선물이기에 황제께 보고 드렸더니 '사람은 성심으로 사귀어야지 웬 뇌물인가?'라 하시면서 대노하셨소."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까?"
소현은 속내를 감추었다. 하지만 소현의 목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역관 정명수와 김돌시에게도 선물을 보내온 모양인데 뇌물에 대한 별도의 자문이 있을 것이오."

세자관에 비상이 걸렸다. 선물을 뇌물로 보고 있다는 황제의 시각은 태풍을 예고하고 있었다. 다급한 소현은 박노를 예부에 급파했다. 우리나라의 예조와 같은 기능의 예부에서 세자관 관원을 맞이한 사람은 범문정이었다.

청나라 건국초기 황궁이었던 ‘심양고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황궁표지석. 청나라 건국초기 황궁이었던 ‘심양고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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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책사 범문정, 조선 문제 전면에 등장하다

누루하치에게 발탁돼 청나라 건국에 이바지한 범문정은 홍타이지에게 '서쪽 변방국은 진실하게 대하고 동쪽의 조선은 보호하며 북쪽 몽고는 정벌하고 남쪽의 명나라는 장수를 끌어들여 지치게 하면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라는 이른바 '은밀한 변경'이라는 책략을 냈던 인물이다.

훗날 홍타이지가 대륙을 평정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승하하자 청나라는 난기류에 휩싸였다. 몽고 귀족 출신으로 홍타이지 여인이 된 장비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황제가 승하하면 후궁을 순장시키는 여진족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세는 도르곤이었다. 하지만 장비의 몸에서 태어난 복림이 즉위했다. 순치제다. 천하의 책략가 범문정을 끌어들여 첫사랑 도르곤을 요리한 장비의 솜씨였다.

"소국이 상국의 신하를 뇌물로 매수해도 된단 말이오?"
범문정의 서릿발 같은 질책이었다.

"본국에서 하는 일이라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다 알고 있는 일이지만 박노는 변명했다.

"조선 국왕에게는 황제의 별도 칙서가 있을 것이나 이 문서를 세자에게 보여 주고 가져오시오."
범문정이 한 장의 문서를 내놓았다.

"보여 드리고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한성을 떠났다는 최상서는 왜 이리 오지 않는 것이오?"
"최명길은 상서가 아니라 판서였고 지금은 재상이 되었습니다. 영의정입니다."

"재상이 되었으니까 상서라 불러주는 것이오. 어찌 소국의 판서와 대국의 상서가 같은 반열이란 말이오? 사신은 지금 어디쯤 오고 있소?"
"의주에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는 기별을 받았습니다."

"빨리 오도록 독촉하시오."

박노는 범문정이 내민 문서를 가지고 세자관으로 돌아왔다. 문서를 펼쳐든 소현은 경악했다. 내용은 한바탕 회오리를 예고하는 협박장이었다.


태그:#소현세자, #도르곤, #홍타이지, #범문정, #용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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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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