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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5일 오후 뒤늦게 한미 쇠고기 협상 합의문 한글본을 공개했다. 당초 7일로 예정된 쇠고기협상 청문회 때 공개하려던 방침에서 후퇴한 것이다. 이미 미국쪽에서 지난 3일 영문본을 공개한 상황에서 졸속협상이라는 비판이 거세지자, 여론에 밀려 한글 합의문을 내놓은 것이다.

 

정부는 스스로 전격적인(?) 합의문 공개와 보완대책 등을 강구하고 있지만, 검역주권 포기와 광우병을 둘러싼 안전성 논란을 잠재우기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에 한미 양국 사이에서 체결된 합의문 내용 등을 꼼꼼히 따져보면, 과연 누가 자국 국민의 건강권을 책임지고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논란이 되고 있는 한미 쇠고기협상의 진실을 한글과 영문 합의문을 직접 대조해 알아본다.

 

① 광우병이 여러건(cases) 나오더라도 수입금지 못한다(5조)

 

이번에 양국이 합의한 합의서 정식 명칭은 '미국산 쇠고기 및 쇠고기제품 수입위생조건'(Import Health Requirements for U.S. Beef and Beef Products)다. 용어 정의부터 시작해서 모두 25개 조항에 4개의 부칙을 가지고 있다.

 

이 가운데 수입위생조건 제5조를 둘러싼 논란이 거세다. 한글본에는 "미국에 광우병(BSE)이 추가로 발생하는 경우 미국 정부는 즉시 철저한 역학조사를 실시하여야 하고, 조사 결과와 내용을 한국 정부에 알리고 협의한다"고 돼있다.

 

하지만, 영문에는 "In the event (an) additional case(s) of BSE occur(s) in the United States, the U.S. government shall..."라고 씌여져 있다.

 

정부는 광우병이 추가로 발생할 경우라고 했지만, 영문 합의문에는 "사례들"(cases(s))로 '단수'가 아닌 '복수'로 발생할 경우로 적혀있다.

 

이어 다음 문장에서도 한글본에는 "추가 발생 사례로 인해 국제수역사무국(OIE)이 미국 BSE 지위 분류에 부정적인 변경을 인정할 경우 한국 정부는 쇠고기와 쇠고기 제품의 수입을 중단한다"고 씌여있다.

 

결국 이는 미국에서 광우병이 단 한 건이 아니라, 여러 건(cases)이 발생하더라도, 한국정부는 OIE가 미국의 '광우병 위험통제국' 지위를 변경하지 않는 한, 미국산 쇠고기를 계속 수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② 광우병 나오더라도, 수입중단 몫은 우리나라가 아닌 미국(7조)

 

5조와 함께 미국 육류작업장 요건(6조~9조)을 적어 놓은 부분 역시 논란의 소지가 크다. 7조 한글본에는 "중대한 위반이 발생한 경우, 미국 식품안전검사청(FSIS) 직원은 위반 기록을 발행하고, 제품을 즉시 통제한다"고 돼있다.

 

이어 "FSIS가 적절한 개선조치와 방지조치가 결정될 때까지 해당 공정을 중단시키고, 개선 조치가 적절하다고 FSIS가 결정하는 경우에만 생산 재개가 허용된다"고 적혀있다.

 

또 "한국정부는 육류 작업장 중 대표성 있는 표본에 대해서 현지 점검을 실시할 수 있다"(8조)고 규정해 놓고 있다.

 

하지만 이는 과거 참여정부 시절 한국 검역관이 모든 미국 도축장에 대한 현지 점검 권한을 가진 점이나, 중대한 위반이 적발돼서 해당 작업장에 대한 한국 수출 작업이 중단되도록 요구할 수 있는 권한에서 크게 후퇴한 것이다.

 

결국 미국 쇠고기를 먹는 사람은 한국 국민이지만, 정작 광우병 등 문제가 생겼을 경우, 수입을 중단하는 등의 권한은 미국 검역당국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③ SRM이 나오더라도, 쇠고기 수입은 그대로(23조)

 

광우병의 안전성과 직접 관련이 있는 부분은 수입위생조건 23조와 24조에 들어있다. '수입 검역검사 및 규제조치' 항목인 이들 두 조항에 따르면 광우병 특정위험물질(SRM)이 나오더라도 쇠고기 수입을 중단할 수 없게 돼 있다.

 

23조를 보면, "검역 검사과정중 한 로트(수입검역증 한장에 들어가는 총 물량)에서 SRM이 발견될 경우, 미국 FSIS는 문제 원인을 밝히기위한 조사를 실시할 것이다. (SRM이 발견된) 육류작업장 제품은 여전히 수입검역검사를 받을 수 있다"고 써 있다.

 

SRM이 발견되더라도 해당 작업장에서 수출되는 쇠고기는 여전히 수입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최소 2번에 걸쳐 SRM이 포함된 쇠고기를 수출한 미국 작업장은 잠시 수출이 중단되지만, 중단 이전에 인증된 쇠고기는 수입할 수 있게 했다.(24조)

 

이에 대해 한국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전수검사가 아닌 표본검사의 비율을 높이는 정도다.

 

23조는 "다만, 한국 정부는 해당 육류작업장에서 이후 수입되는 쇠고기 검사 비율을 높인다. 동일 제품의 동등 이상 물량 5개 로트에 대한 검사에서 식품안전 위해가 발견되지 않았을 때 한국 정부는 정상 검사절차 및 비율을 적용해야 한다"고 써 있다.

 

눈으로 광우병위험물질을 확인하고도, 한국은 단지 검사비율을 높이거나, 이마저 5번 검사에서 합격할 경우 비율도 다시 내려야 한다.

 

④ 부칙에 들어간, 등뼈의 연령표시의무 삭제조항

 

합의문의 부칙에 들어간 내용도 논란의 소지가 크다. 미국이 강화된 사료금지 조치를 취할경우, 수입 가능한 미국산 쇠고기 범위는 '미국 연방 육류검사법에 기술된 대로 소의 모든 식용부위와 모든 식용부위에서 생산된 제품'(부칙 1조)으로 확대 된다.

 

특히 부칙 4조를 보면, 수입 위생조건 시행일 후 첫 180일동안 티본 스테이크와 포터하우스 스테이크의 경우 미국쪽은 30개월 미만의 소에서 생산됐다는 것을 알리는 '어떤 표시'를 상자에 부착한다고 써 있다.

 

하지만 이같은 표시도 180일 이후에는 교역과 검사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한 다음에, 우려사항을 해결하기 위한 측면에서 협의한다고 합의했다.

 

이는 곧 180일 이후 미국산 쇠고기의 SRM(광우병 특정위험물질)인 등뼈에 대한 연령구분 표시 의무 조항이 자동적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⑤ 캐나다산 광우병 소도 들어올 수 있다(10조)

 

10조의 미국산 쇠고기 규정도 마찬가지다. '쇠고기 및 쇠고기제품에 대한 요건' 조항에 나타난 것을 보면, "도축 전 최소한 100일 이상 미국 내에서 사육된 소에서 생산된 것"도 포함돼 있다.

 

이 조항으로 인해, 그동안 10여차례나 광우병이 발병돼 수입이 금지된 캐나다산 쇠고기가 미국을 거쳐 국내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열렸다.

 

 

⑥ 뼛조각 나와 검역중단된 미국산 쇠고기도 무사통과?

 

이밖에 정식 합의문과 별도로 공개된 '쇠고기에 관한 한미 협의 합의 요록'에도 새로운 내용이 들어있다. 이 문건에는 한미간 위생조건 합의 이외에 협상 내용과 과정이 담겨져 있다.

 

특히 작년 10월 이후 검역이 중단된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재개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이 나와 있다.

 

'검역 대기중인 미국산 뼈 없는 제품'이라는 항목에는 "위생조건의 효과적인 시행에 따라 한국 정부는 "지난해 10월 15일 이전에 도축되고 한국의 항구(부산) 또는 미국내 창고에 남아 있는 미국산 뼈없는 쇠고기에 대해 새로운 위생조건에 따라 수입 검역 검사를 실시한다"고 합의했다.

 

이들 물량의 경우 지난해까지 SRM으로 분류돼 있는 척추뼈 30㎏ 정도가 발견됐던 것이었는데, 이번 합의로 인해 다시 수입을 재개하게 됐다.

 

⑦ 15일부터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명시...단계적 허용은 어디로

 

또 이밖에 합의문 요록에는 오는 15일부터 새로운 수입조건의 국내 법적 절차가 끝나고, 미국산 쇠고기가 소 나이에 상관없이 수입될 것이라고 명시돼 있다.

 

'수입위생조건 이행에 관한 일정'(Timeline fot Implementation of Protocol) 항목에는 한국 정부가 4월 22일까지 새로운 수입위생조건을 공고하고, 의견수렴 기간이 끝난 후 공포된다고 씌여있다.

 

또 미국이 의견수렴 기간 중에 강화된 사료금지조치를 공포할 경우, 한국은 30개월 미만의 소에서 생산된 쇠고기와 쇠고기 제품에서 30개월 이상의 쇠고기 및 쇠고기 제품 수입도 허용하도록 확대하기로 했다고 적고 있다.

 

이 같은 합의는 지난달 18일 정부가 미국과 협상 타결 후, 미국산 쇠고기의 단계적 수입재개 허용이라고 발표한 것을 뒤집는 것이다. 결국 정부 스스로 미국에 구체적인 개방 날짜까지 약속해 놓고, '단계적 허용'이라는 말로 축소해 발표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송기호 통상전문 변호사는 "이번 합의문을 보면, 광우병이 아무리 많이 나오더라도 한국은 제대로 된 검역주권을 행사할 수 없게 돼있다"면서 "이것은 세계무역기구(WTO)도 인정하는 국제법상 한국의 법적 권한을 포기한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태그:#쇠고기협상, #검역 주권 포기, #미국 쇠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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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원인은 대중들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故 찰스 킨들버거 MIT경제학교수) 주로 경제 이야기를 다룹니다. 항상 배우고, 듣고,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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