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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항쟁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학생들. 가운데가 이명박 학생. 피고인들은 학생이 데모에 나선 것은 "위정자의 잘못을 각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진술했다.
 6·3 항쟁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학생들. 가운데가 이명박 학생. 피고인들은 학생이 데모에 나선 것은 "위정자의 잘못을 각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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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 외교를 반대했던 6·3 항쟁에 대한 기록이 공개되었다. 29일 오후 2시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3층 회의실에서 열린 '6·3 그날의 기억과 기록'이라는 세미나에서 그동안 민간이 보관하고 있던 40여종 1만매 분량의 기록이 행자부 산하 국가기록원에 의해 공개되었다.

발제자로 나선 김학준 동아일보 회장은 "신입사원 면접시험 볼 때 6·3세대가 뭐냐고 물으면, '63년도에 태어난 세대를 말하는 것 아닙니까?' '63년도에 대학을 다녔던 세대가 아닙니까?'라고 대답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언론고시를 준비했다는 언론사 신입사원 응시생들의 답변이 이 정도이니 우리에게 6·3항쟁은 잊혀진 학생운동이다.

6·3항쟁은 굴욕적인 한일회담 저지를 위해 전개된 학생 시위로 4·19이후 1960년대의 대표적 민주화 운동이었다. 1964년 3월 24일. 서울 문리대 교정에서 '민족반역자 화형식'을 마친 학생들이 도심으로 진출하여 '주체성을 잃은 정부에 함성으로 호소한다'는 구호를 외친 고려대 학생들과 합류했다. 이날 시위로 서울대생 161명, 고려대생 29명, 기타 10명이 연행되었다. 민족반역자로 지칭된 사람은 김-오히라 메모의 주인공 김종필이었다.

서울 문리대에서 행해진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서울 문리대에서 행해진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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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외교 반대', '학원사찰 즉각 중지', '구속자 석방하라'는 학생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시위학생에게 청구된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되자 당황한 박정희 정권은 무장 군인들의 법원 난입이라는 자충수를 두었다.

5월 20일. 학생총연합회 주최로 서울문리대에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치른 학생들은 '박정희에 의한 5월 군부쿠데타는 4·19 혁명의 민족, 민주 이념에 대한 정면 도전이며 노골적인 대중탄압의 시작이다'라고 선언했다.

부슬비가 내리는 6월 3일. '박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1만5000여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청와대 부근까지 진출한 시위대는 경찰백차와 트럭을 빼앗아 세종로와 시청 앞을 질주했다. 시위대에 경찰이 밀리자 오후부터 공수부대와 수도경비사 군인들이 데모 진압에 나섰다. 그리고 밤 9시 40분. 대통령 박정희는 서울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6·3항쟁 주역들이 현상 붙은 사나이가 되었다. 그런데 상금이 1만원이다.
▲ 현상수배 벽보 6·3항쟁 주역들이 현상 붙은 사나이가 되었다. 그런데 상금이 1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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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선포 이후 대량 검거 선풍이 불었다. 계엄사 검찰부는 서울대 정치학과 4학년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을 내란죄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했으나 변호인단이 제출한 '재판관할에 관한 제정신청'을 재판부가 받아들여 대법원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 공판이 무기 연기 되었다. 7월 29일 비상계엄이 해제되어 피의자는 일반법원에 이송되었다.

9월 22일 서울형사지법 합의21부에서 내란 혐의로 구속 기소된 이명박 등 5명에 대한 첫 공판에서 피고인들은 "대일 굴욕외교를 반대하고 위정자의 잘못을 각성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10월 10일 서울 형사지법에서 열린 공판에서 김중태는 "6·3항쟁은 자연적인 대중의 힘으로 일어난 것이다"라고 진술했다.

김지하의 옥중 엽서
 김지하의 옥중 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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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8일 재판에서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이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어 석방되었고, 12월 22일 공판에서 불구속 재판을 받던 이명박 피고 등 5명에게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죄만을 적용, 집행유예 2~3년이 선고됐다. 이로써 모든 학생들이 석방되었다. 이것이 6·3항쟁의 시말이다.

이러한 과정을 당시 중부경찰서 형사를 자칭한 청년들에게 끌려가 외딴 집에서 구타와 고문을 당한 서울문리대 송철원 학생의 아버지 송상근(94세·당시 의사)옹이 보관하고 있던 것을 국가기록원에 기증하여 공개된 것이다. 당시 경찰로 위장한 괴청년은 중앙정보부 이동식, 박영철, 송명성 등이었으며 이들은 불법감금 및 상해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현재까지 6·3항쟁에 관한 기록은 검찰과 법원을 비롯한 정부기관에서 작성한 판결문 등이 대부분이었으나 이번에 기증된 기록은 6·3항쟁 주역들이 작성한 자신들의 주장과 활동에 관한 생생한 사실을 수록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진실을 균형 있는 시각에서 규명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에 따라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원장 정진철)은 6·3항쟁에 관한 민간기록을 정부기록과 함께 후대 기록유산으로 영구 보존한다고 밝혔다.

29일 세종로 종합청사 3층 회의실에서 열린 '6·3 그날의 기억과 기록' 세미나
 29일 세종로 종합청사 3층 회의실에서 열린 '6·3 그날의 기억과 기록'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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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이명박, #김지하, #6.3항쟁, #박정희, #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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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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