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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태양으로부터 1억5천만km보다 더 멀리 있거나 더 가까이 있다면 지구상에 생명체가 태어나 인간 같은 고등지식을 가진 생명으로 진화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설명이 인류원리적인 설명이다.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1억5천만km보다 더 멀리 있거나 더 가까이 있다면 지구상에 생명체가 태어나 인간 같은 고등지식을 가진 생명으로 진화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설명이 인류원리적인 설명이다.
ⓒ N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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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물리학계에는 '인류원리(anthropic principle)'가 유행이다. 인류원리란 인간이라는 지적 생명체의 존재 자체가 어떤 물리계의 특성을 설명한다는 원리이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왜 하필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1억5천만km 떨어져 있을까 하는 문제를 인류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지구가 그보다 더 멀리 있거나 더 가까이 있다면 지구상에 생명체가 태어나 인간 같은 고등지식을 가진 생명으로 진화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설명이 인류원리적인 설명이다.

언뜻 보면 말장난 같기도 하고 이게 무슨 과학이냐고 따질지도 모르겠다. 사실 과학계 내부에서도 이를 두고 논란이 분분하다. 인류원리는 1973년 처음 나왔다. 현존하는 최고의 물리학자인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는 1987년 인류원리로 우주상수 문제를 설명하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우주상수'는 우주 공간 자체가 가지는 진공에너지로 우주의 팽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주상수가 양수로 아주 크면 우주의 팽창이 가속된다. 반대로 이 상수가 음으로 아주 크면 우주가 팽창을 멈추고 중력수축을 시작한다. 이 값은 매우 작지만 0이 아닌 양수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값은 양자역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값보다 무려 10^120 정도 작다. 과학자들은 왜 관측된 우주상수값이 그렇게 작을까 고민해 왔다.

와인버그는 인류원리로 이 작은 우주상수를 설명했다. 만약 우주상수가 양수로 너무 크면 우주가 팽창하는 속도가 너무 빠를 테니까 은하나 별이 중력수축으로 생성되기 어려웠을 것이고 음수로 너무 크면 팽창했다가 다시 수축하는 정도가 너무 빨라 역시 인간이라는 고등생명체가 진화를 통해 생겨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인류원리와 초끈이론, 과학에도 인간이 중심이다

최근에 인류원리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초끈이론 때문이다. 초끈이론에 의하면 자연의 시공간은 10차원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시공간은 4차원(1차원의 시간+3차원의 공간)이니까 6차원이 남는다. 초끈이론이 맞다면 이 부가적인 6차원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어떻게든 4차원 시공간 주변에 조밀하게(compactification) 붙어 있을 것이다.

2003년 마이크 더글러스(Mike Douglas)는 특정한 초끈이론에서 이 부가적인 6차원이 조밀화되는 과정에서 가능한 물리적 진공상태가 매우 많다는 것을 밝혀냈는데 그 숫자가 무려 10^500 정도 된다. 이 분야의 선도적인 물리학자 중 한 사람인 레온 서스킨트(Leon Susskind)는 이를 '초끈풍경(string landscape)'이라 부르며 유행을 선도하고 있다.

가능한 물리적 상태가 이렇게 많으면 그 중에서 어떤 상태가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인가를 설명해야만 하는 문제가 남는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그럴 듯한 대답은 역시 인류원리밖에 없다. 즉, 그 많은 가능성 가운데서 생명이 탄생하고 진화하여 인간이라는 고등의 지적 생명체가 출현하는 조건을 만족하는 그런 상태 중의 하나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첨단의 과학이론에서도 이처럼 인간 자신의 존재요건이 자연의 비밀을 설명하는 매우 유력한 도구가 되는 셈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주로 과학의 최첨단을 내달리는, 버시바우 대사의 본국인 미국에서 나온 것들이다.

물리학을 전공한 나는 물론 질병이나 수의 관련 전문가가 아니다. 이는 예일대학교와 컬럼비아 대학에서 러시아 및 동유럽학, 국제관계학을 전공하고 줄곧 외교관으로 살아 온 버시바우 대사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런 그가 이번 미국산 쇠고기 협상과 관련해서 어떤 과학적 사실들을 잘 알고 있는지, 밤새 벌건 눈으로 인터넷을 뒤지는 한국 네티즌들보다 과연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 그 중에서 우리 한국 국민들이 어떤 과학을 잘 모르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아마 나 또한 그 '과학적 사실'을 잘 모르는 한국 국민의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한국 사람으로서 한 가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우리 국민들은 무척이나 '인류원리'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과학자들은 인간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의 질서를 이해할 때조차 인간 생존의 조건을 매우 유력한 도구로 활용한다. 하물며 후천적인 법과 제도와 온갖 사회적 협약들은 당연히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작동해야만 한다.

안타깝게도 언제부터인가 국제외교와 정치에서는 종종 이 근본원리가 잊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세계화나 자유무역은 다수의 힘없는 사람들의 생존보다도 힘있는 소수의 초국적 기업들의 이해를 더 크게 반영하는 쪽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런 불균등한 이해관계는 흔히 세계화나 자유무역 자체가 중요한 목적이 되는 동어반복적 설득구조 위에서 은폐된다. 예컨대, 세계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니 자유무역을 해야 한다는 식이다(이와 똑같은 논리구조를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불법시위를 엄단한다는 경찰청 발표에서도 볼 수 있다). 어디에도 원초적인 목적이었던 인간은 없어졌다.

한미 쇠고기 협상에 한국민들의 인류원리는 없다

지금 온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와 같은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 한 국가로서의 기본 주권이 온갖 말도 안 되는 난잡한 이유들로 철저히 유린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온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와 같은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 한 국가로서의 기본 주권이 온갖 말도 안 되는 난잡한 이유들로 철저히 유린되고 있기 때문이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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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미 쇠고기 협상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협상 결과의 한가운데에 있을 수밖에 없는 한국 국민들에 대한 인류원리가 실종되었다는 점이다. 협상 과정에서 한국 국민들이 인간으로서의 생존을 보장받고 고등 지적 생명체로서 인간답게 살아갈 조건이 하나도 고려되지 않았다. 우리 국민의 생존과 존엄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미국 정치인들의 계산과 미국 축산업자들의 잇속과 한국 대통령의 탐욕만이 이미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버시바우 대사는 자국산 쇠고기가 얼마나 안전한지, 국제수역사무국의 기준을 미국이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지 등에 대한 산더미 같은 '과학적 자료'를 우리에게 들이밀지도 모른다. 우리 국민들은 그 모든 자료에 대한 반박자료를 충분히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에 앞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먹거리(예를 들면 광우병 발생 지역의 쇠고기 전체)를 이 땅에 들여놓지 않고 안심하게 마음놓고 인간답게 살 기본권을 가지고 있다.

지금 온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와 같은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 한 국가로서의 기본 주권이 온갖 말도 안 되는 난잡한 이유들로 철저히 유린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생존을 보장받고 인간다운 삶을 누려야 한다는 일종의 인류원리를 한국 국민들 모두가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류원리로 자연의 오묘한 질서와 원리를 파헤치고자 하는 최근 과학자들의 경향에 비추어 보더라도 이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또 과학적이다.

버시바우 대사가 알고 있다는 그 어떤 과학적 디테일도 한국 국민이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없는 우주공간에서는 한낱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점을 '한국대사'인 버시바우 자신이 먼저 알아야만 할 것이다.


태그:#이명박, #미국산 쇠고기, #버시바우, #미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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